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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제1592호 기획연재

약간의 성공을 사회에 환원, 열악한 환경의 인재 키운다,
남은 책무? 동원개발, 수익추구보다 사회기여 기업 정착

교육 · 장학 사업가 장복만에게 육영(育英)의 길을 묻다

내용
장복만 동원개발 회장은 건실한 주택사업으로 사세를 키워가며, 오랜 세월 꿈꿔왔던 기업이익의 사회환원을 행동으로 실천하고 있다.

'교육·문화·장학사업으로 국가사회에 기여하는 책임 있는 기업'-(주)동원개발의 기업 슬로건이다. 기업활동에서 얻은 이익을 바탕으로, 동원교육재단의 동원과학기술대(옛 양산대)와 동원학당의 동원중·동원고를 열정적으로 운영한다. 동원문화장학재단을 통한 문화·장학사업도 활발하다. 건실한 주택사업으로 사세를 키워가며, 오랜 세월 꿈꿔왔던 기업이익의 사회환원을 행동으로 실천하고 있다. 감히 '국가사회에의 기여'를 내세울 만한 기업경영이다. 주택건설 외길 40년에 시공능력 부산 1위 업체, 그 동원개발을 이끌고 있는 장복만(張福萬,71) 회장의 육영 스토리다.

장 회장은 1994년 경남 양산의 양산대를 인수한다. 심각한 운영난에 봉착한 학교재단을 확고한 의지로 인수한 것이다. 2000년 경남 통영의 사학 중·고교를 인수한다. 학교재단의 재정난에 대응한 동문회와 통영시민의 인수요청에 따른 것이다. 그는 기업의 성공을 담보하기 전부터, 운영난에 빠진 지방사학 운영에 대담하게 도전했다. 무명의 지방 전문대를 유수의 과학기술대로 키우고, 지방 중·고교 교사 신축에 사재 485억원을 희사했다. 크고 작은 기부와 나눔에도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늘 꾸준하다. 부산 건설업계의 산 증인·지역사회의 원로가 육영에 만년을 쏟아 붓는 뜻은 무엇인가? 사회기여의 꿈을 현실로 성취시킨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의 '노블리스 오블리주' 철학은 과연 어떠한가?
 

담대한 육영 의지… 중·고 신축에 485억 쾌척

Q. 최근 담대한 육영사업으로 지역사회의 찬사를 받고 있다. 1년여 전, 동원중·고 교사 신축에 사재 485억원을 쾌척했고, 최근 양산대의 교명을 동원과학기술대로 바꾸며 'Vision 2020'을 향한 제2도약을 선언했다. 요즘 불같은 열정을 쏟고 있는 동원중·고 얘기부터….

"그렇다. 두 학교는 동원학당 재단 소속이다. 2012년 9월 신축 보금자리로 이전했다. 1947년 개교 이후 65년 만의 일이다. 2001년 9월 학교 이전계획을 신청한 이후, 부지매입에만 약 10년이 걸렸다. 통영시 광도면 용호로 12 일원 133,188㎡ 부지에, 2010년 3월 착공해 2012년 8월 준공했다. 통영의 자랑스러운 교육 랜드마크로 우뚝 섰다. 동원중·고는 'Dream School'을 새로운 아젠다로 정하고, 미래를 향해 비상하기 시작했다.

신축학사 이전을 통해 동원중·고는 전국최고 수준의 교육 인프라를 갖추었다. 새 캠퍼스에는 학생들의 전인적 성장을 위한 체육관, 독서실, 동아리실, 종합 진로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커리어존까지, 최신식 시설을 마련했다. 사실, 동원중·동원고는 그동안 옛 1만여㎡의 좁은 학교에서 60년 넘은 낡은 건물을 함께 사용하며 큰 불편을 겪어 왔다. 나 스스로 동원고 전신인 통영상고 9회 졸업생이기에, 과거 학창시절 열악한 환경에서 공부하던 때를 기억하고 있다."

동원중·고는 신축학사 이전을 통해 전국최고 수준의 교육 인프라를 갖추었다(사진은 신축 이전한 동원중·고교 전경).

Q. 학교 신축에 어느 정도 애정을 쏟으셨나?
"제대로 마음먹고 지었다. 바다가 양쪽으로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학교가 있다. 풍광이 장관이다. 학생들도 기분이 상쾌해져 학교에 가고 싶다고들 한단다. 시설도 국내 최고다. 우리 손자도 보내고 싶을 정도다."

그의 자랑대로, 드넓은 현대식 교사에선 언덕 아래 양쪽으로 짙푸른 바다가 내려다보인다. 학교 구석구석에는 건설 전문가인 장 회장의 손길이 닿아 있다. 그는 학교가 완성되는 순간까지, 설계를 뜯어고치고 시공상황을 점검했다. 그는 최근 두 차례의 '큰 수술'을 겪었다. 간 이식 수술로 4개월여 입원·요양하다, 겨울비가 내리는 날 건설현장으로 달려갔다. 우산을 들고 마스크를 쓴 채-. "학교를 정말 보고 싶더라." 그의 애정을 이해할 만하다.

장복만 회장은 학교가 완성되는 순간까지, 설계를 뜯어고치고 시공상황을 점검했다(사진은 간 이식 수술 후 마스크를 낀 채 건립 현장 점검하는 장 회장).  

그는 교사 이전 준공식에서 "동원고를 10년 안에 국내 상위 5%의 명문학교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그런 다짐 아래, 학교가 돌아가는 상황을 하나하나 챙기며 내심 즐거워한다. 지금 그에게 가장 크고 의미 있는 일은 '교육'임이 틀림없다. 

나의 꿈, 돈 많이 벌기보다 명문학교 키우기

Q. 기업경영에 나날이 바쁘고 건강에도 유념해야 할 시기에, 그렇게까지 애정을 쏟은 특별한 이유라도?
"내 꿈은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오래 사는 것도 아니다. 동원중·고가 최고의 환경에서 최고의 인재를 배출하는 명문학교로 자리 잡는 것이다. 그래서, 내 인생에서 가장 보람 있는 일은, 나의 모교를 새 보금자리로 신축 이전한 것이다. 나의 헌신으로, 나의 모교가 최첨단의 다양한 시설을 갖췄다. 고향 인재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내가 오랜 세월 가슴에 묻어 뒀던 꿈을 고향의 모교에서 실현하고 있다. 이런 보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그동안 교육사업에 바쳐온 열정을 인재육성에 더 쏟으려 한다. 충무공의 얼이 살아 숨쉬는 통영에서 뛰어난 인재를 배출, 우리나라를 이끌어 가는 훗날을 그려가며 적극적 지원을 다할 생각이다.

나부터, 어릴 적 어려운 형편에 교육혜택을 많이 받지 못하고 컸다. 예전부터 통영에는 인물이 없다는 말도 많다. 부산에 와서 사업을 하다 보니 통영 출신 인재가 거의 없었다. 고향, 동문 인맥이 없으니 때로 외톨이 기분을 느꼈다. 40년을 넘게 기업을 경영했고, 이제 우수한 인재를 길러 낼 힘이 생겼다. 고향을 위해 좋은 학교를 만들고 싶다. 우리 사회에 기여하고 환원하는 삶의 목표이다."

장 회장은 옛 통영제일고 졸업앨범을 펼치며 학교 설명을 하기도 했다. 학생들의 졸업앨범은 동원개발 회장실 의자에서 손이 닿는 '귀한 자리'에 놓여 있다. 재단 운영에 참가한 후부터의 졸업앨범이 책장에 연도별로 가지런히 꽂혀 있다. 학교에 대한 그의 애정이 얼마나 애틋한지 엿볼 수 있다. 

Q. 그 중·고교, 어떻게 인수했나? 인수 동기는?
"지난 2000년 송촌학당을 인수했다. 고향과 후배사랑 때문이다. 당시 교명은 통영제일고등학교(옛 통영상고)와 동중학교였다. 재정난으로 학교 운영이 어려워지자 고향 통영지역에서 요청이 들어왔다. 모교를 인수해서 잘 좀 운영해 달라는 부탁이다. 동문들은 물론이고 통영시장과 시민까지 나섰다. 그래도 어느 정도 성공했다는 사람이 자신의 영화만을 위해 살아서야 되겠나. 약간의 성공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뜻으로 나섰다. 열악한 환경의 고향에서 인재를 키워보자는 생각이었다."

졸업생이 모교의 학교법인을 인수, 이사장에 취임하는 것은 그 예를 찾기 힘든 일. 지난 1947년 출범한 송촌학당은 통영제일고(1951년 개교)와 통영동중을 설립, 그동안 2만4천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통영지역의 대표적 사학이다. 통영제일고 동문 장 회장은 재단을 인수하며 다짐했다. 기업활동을 통해 얻은 이윤을 고향 및 모교 발전을 위해 뜻있게 쓸 것이라고, '후배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학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연차적으로 학교환경을 개선해 나갈 것이라고. 
 

'공부 못하는 학교'에서 '공부 참 잘하는 학교'로

Q. 인수 전과 인수 후, 그 학교 얼마나 달라졌나?
"한마디로, 공부를 '참 못하는 학교'에서 '참 잘하는 학교'로 환골탈태했다. 학교 부지는 10배 이상 넓어졌고, 건물은 4배 가까이 커졌다. 전국에서 우수한 교사를 초빙해 학교수준이 몰라보게 높아지고 있다. 예전에는 폐교 직전 상황까지 내몰려 학교가 말이 아니었다. 지금은 서울대 등 명문대 합격자도 상당 수 배출한다. 한 해 서울지역 대학에 50여명, 부산·경남 국립대에 30여명이 진학한다. 그러나, 지금부터  시작이다."

그는 학교가 온 나라 교육계의 벤치마킹 대상으로 도약했다고 자랑한다. 고교, 종전 40실(30학급)에서 92실로, 중학(18학급) 역시 62실을 보유했다. 특별실이 많다? 영어·수학 등의 교과교실제와 수준별 학습이 가능해졌다. 특기·취미별 동아리실 89실을 꾸몄다. 학생들이 학교생활을 즐거워할 수밖에 없다. 중·고교 1,000명에 중도탈락자는 단 7명(전국평균 4%), 경남지역 '최우량'학교다.

장 회장은 학교현황 통계를 두루 꿰고 있다. 표정엔 그저 흐뭇한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우리 학교가 '도전, 골든벨'에 출연한다네?" 고교생 대상 퀴즈 프로그램 '골든벨', 전국 200여 고교가 신청 후 대기상태에서, 동원고교가 11월 20일 녹화일을 잡아뒀다. '공부 못하는 학교'에서의 변신, 또 다른 자랑이다. 우수교사·우수학생이 왜 동원중·고를 찾는가? 그 강력한 '인센티브'를 다 열거할 필요는 없다. 그저 그들의 사기 키우기에 필요한 일이라면 그는 잘라 약속한다. "그거 내가 부담할 테니 열심히만 해라."   

Q. 동원 중·고교, 어떻게, 어디까지 컸으면 좋겠나?
"동원학당은 지난 2009년 '동원학당 장기발전계획'을 수립, 야심차게 추진 중이다. 3단계 발전전략에 따라 새로운 명문사학으로의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학교의 이전과 학교 발전시스템을 구축하는 첫 단계는 2012년까지 끝났다. 학교 이전 후 5년간의 두 번째 단계에는 명문고가 갖춰야 할 제반 교육시설 및 여건을 완비하는 기간이다. 마지막 단계에는 명실 공히 명문사학의 입지를 보이는 자립형·자율형 사립학교로 도약할 것이다. 동원중·고 학생들은 비용과 경비 부담이 큰 사교육을 받지 않고, 공교육만으로도 질 높은 자기주도적 학습을 할 수 있다."

그는 교육사업을 통해 꼭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 그가 구현하고 싶은 '에듀토피아(Edutopia)'다. 그가 교육을 보는 시각은 분명하다. 교육은 가장 정의로운 사회, 사람들이 진정한 기쁨을 서로 나눌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근본적인 토대다. 옳은 일이 승리하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는 것, 사람들이 서로 신뢰하고 사랑하며 함께 선과 평화를 만들어 가는 세계를 뜻한다. 그런 뜻에서, 특히 감수성이 예민한 10대 청소년에의 올바른 교육은 무엇과 견주어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하다. 이들은 인류를 보다 행복하고 아름답게 가꿀 '모든 위대한 가능성'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동원학당의 동원 중·고교가 우리 사회와 국가, 나아가 전 인류의 공생과 평화를 이루기 위한 '전진기지'로 자리매김할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그 꿈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는 묵묵히 걸어갈 각오이다.

장복만 동원개발 회장은 올 2학기부터 '동원과학기술대학교'로 교명을 바꾼 경남 양산 양산대학교도 운영하고 있다(지난 8월8일 '동원과학기술대학교'로 현판을 변경했다. 점선 안이 장복만 회장).

교육사업, 중·고교 넘어 동원과기대 키우기까지

장복만 회장은 경남교육에 기여한 공로로 2012년 12월 경남교육상을 수상했다. 사재 485억 원을 출연해 동원중·고를 신축 이전했고, 2000년부터 2012년까지 경남지역 불우학생 및 성적우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대학진학 학생에게 입학금·등록금을 후원했으며, 경남대 등 3곳에 발전기금을 기부, 지역 교육발전에 기여한 공로다.

경남교육계는 이제 그에게 '경남교육상'을 보답하지만, 실상, 그의 교육사업 영역은 중·고교를 넘어, 일찍부터 대학까지 뻗어 있다. 올 2학기부터 '동원과학기술대학교'로 교명을 바꾼 경남 양산 양산대학교도 운영하고 있다. 동원과기대는 지난 1990년 개교한 뒤 꾸준하게 성장, 현재 6개 학부·27개 학과에 국제교류센터 등 7개 부속기관과 평생교육원 등 7개 부설기관을 갖추고 있다. 현장실무형 전문인력 양성과 교수학습개발센터 운영에 중점 투자, 올해 교육부가 주관한 교육역량강화사업 지원대학에도 올랐다.

Q. 양산대, 최근 동원과학기술대학교로 교명을 바꿨다. 특별한 이유라도?
"양산대는 그동안 글로벌 시대에 부응하는 교육·연구의 역량을 갖추었다. 그러나, '양산'이란 교명으로는 지역의 한계를 넘을 수 없겠더라. 새 교명 '동원'은 학교재단(동원교육재단)의 이름을 딴 것이다. 교명 변경과 함께, 간호과 4년제 학사학위 과정도 신설했다. 동원과기대는 이번 교명변경으로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고 '국가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중견 기술인과 전문인력 양성'(건학이념)에 더욱 매진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기대해 달라."

Q. 그 학교 경영에는 어떻게 참여했나?
"동원 중·고교를 인수한 과정과 같다. 지난 1994년 동원교육재단을 설립, 양산대학 재단을 인수했다. 당시 양산대학은 개교 3년 만에 더 이상 운영이 어려울 만큼 심각한 경영위기에 봉착했고, 많은 부채 때문에 인수 의사를 밝히는 곳도 없었다. 나는 당시 경남 양산에서 동원가족사 '경남제일저축은행'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것도 인연이다, 난 주위의 우려를 이겨내고 양산대학의 미래에 투자할 것을 결심했다.

내가 기업을 경영하며 깨달은 사실 중 하나가 인재의 중요성이다. 글로벌 경쟁시대에 부존자원은 부족한 우리나라와 국내 기업에게, 사람은 투자하고 개발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자원이다. 내가 양산대학을 인수하며 교육사업에 뛰어든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기업이익을 사회에 가장 가치 있게 환원하는 방법은 바로 사람을 키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장 회장이 양산대를 인수할 즈음 주택경기는 장기침체 조짐을 보이며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장 회장의 결단은 그래서 더욱 값진 것이었다.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꿈과 희망을 주며 국가인재로 양성하겠다는 평소의 신념, 그 신념에 평생 땀 흘려  모은 사재 수백억원을 기꺼이 출연한 것이다.

장 회장이 재단을 인수한 후 대학은 꾸준한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동원교육재단 출범 후 1년만에 전국 전문대학 평가 4위에 오르는 것을 시작으로, 매년 교육역량강화 우수대학, 성장동력 특성화대학에 뽑혔다. 2010년에는 교육과학기술부 발표 경남지역 전문대학 종합평가 최우수 대학에 이름을 올렸다. 또 2010년 경향신문 '지속가능사회를 위한 경제연구소(ERISS)'가 전국 135개 대학을 대상으로 조사 발표한 전문대학 지속가능지수 교육부문, 편의·소통 부문에서 모두 10위에 오르는 등 미래 발전 가능성을 인정받고 있다.

동원과학기술대학(옛 양산대)은 장 회장(재단 이사장)의 탁월한 경영 시각과 강한 추진력을 바탕으로 한 효과적 지원정책으로 빠르게 성장했다(사진은 1994년 동원과학기술대학 재단 이사장 취임식).

발빠른 대학 성장, 탁월한 경영·효과적 지원 바탕

옛 양산대가 결코 길지 않은 기간에 빠른 성장을 이룬 비결? 더하고 뺄 것도 없이, 장 회장(재단 이사장)의 탁월한 경영 시각과 강한 추진력을 바탕으로 한 효과적 지원정책이다. 지속적으로 지원과 투자를 확대해 오면서 '선 투자·후 모집'이라는 원칙을 꿋꿋하게 지켰다. 학생들의 등록금에만 의지하는 경영으로는 대학의 성장을 기대할 수 없으며, 먼저 교육환경부터 잘 구축해야 우수한 교육이 가능하다는 소신 때문이다. 국내최고 수준의 첨단 실습실을 갖추고 교수를 지속적으로 충원한 결과, 기업이 필요로 하는 유능한 현장형 인재를 배출할 수 있었다. 부산·울산·경남 지역 취업률 1위, 전국 취업률 5위의 기록이다.

장 회장은 '돈이 없어 공부를 못하는 인재는 없어야 한다'는 고집으로 장학금 혜택을 지속적으로 확대했다. 현재 부산·경남 지역 장학금 지급률 1위, 전국 대학 19위의 우수한 장학제도를 갖추고 있다. 매년 일본 30명, 베트남 15명, 캄보디아 5명의 유학생을 선발해 학비 전액 장학금 유학을 지원하는 제도도 마련했다. 국제 학생교류사업과 학술·문화 교류사업을 계속 확대하고 있다. 

Q. 동원과기대, 어떤 목표 아래, 어떻게 운영하고 있나?
"대학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필수조건은 바로 특성화다. 재능 있는 젊은 인재들이 망설임 없이 선택할 수 있을 만큼 학과운영을 특화, 국가의 미래를 책임질 전문기술 인력을 양성해야 한다. 우리 대학의 건학이념을 실천하는 길, 'Vision 2020'을 달성하기 위한 첫 걸음이다. 우리 대학의 지난 20년 역사는 '지역 산업계에 인재를 공급하며 전문 기술직업인의 산실로서 위상을 다진 시기'다.

이제, 미래의 변화에 대비해 작지만 강한 대학으로 성장하기 위한 준비, 곧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다. 많은 기업들이 '대학을 졸업해도 쓸 만한 인재가 없다'고 얘기한다. 이는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대학의 책임이 크다. 대학이 산업현장에서 필요로 하는 인재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분야의 수요에 맞춰 적절하게 인재를 공급하기 위해서는 우리 동원과기대 역시 대표 브랜드 학과를 전략적으로 키워야 한다. 새 대학 이름답게…"

장 회장은 2009년 3월 제8대 총장에 장호익 당시 동원개발 전무이사를 선임, 대학 경쟁력을 강화할 새 의지를 과시했다. 그는 장 회장의 장남이다. 모기업의 임원으로 13년을 재직하며 경영 일선을 이끌었다.  
 

이제 학령인구 감소시대… 예측하고 도전해야

장 회장은 한국 대학에 곧 닥칠 위협으로 학령인구의 감소를 든다. 그런 만큼 대학 경쟁력의 첫걸음은 교육 소비자로부터 우수성을 인정받는 것이라는 믿음이다. 장 회장이 새로운 학과 개설과 기존 학과 리모델링을 중심으로 한 학과 구조조정에 속도를 내고 있는 것도, 새로운 교수법과 맞춤형 취업지원제도 개발에 집중하고 있는 것도, 모두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10년 후 전국 전문대학 순위 10위권 진입을 현실화하려는 노력이다.

장 회장은 과도한 국내 경쟁에서 벗어나 해외 교육시장 진출을 위한 '2020 YSC 글로벌 전략'을 이미 가동 중이다. 이는 동원과기대 졸업생의 해외취업 확대, 자매대학 젊은 인재의 한국 유학기회 확대, 해외에 진출한 한국기업에 맞춤형 인재 제공 같은, 국가와 국가, 대학과 기업의 윈윈 전략으로 그리는 미래의 청사진이다.

"우리 대학은 이제 혈기왕성한 20대에 들어섰다. 목표를 향해 전력투구할 수 있는 나이다. 재단과 학교, 교수와 교직원, 학생 모두 어려운 상황을 탓하기보다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하는 청년의 자세를 잃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지금 어려움을 예측하고 앞서 도전하고 있다." 그가 글로벌 대학 경쟁 속 동원과기대의 미래를 밝게 보는 이유다. 
 

늘 배움이 목말랐던 청년의 꿈과 비전 성취

장 회장은 새 천년을 앞둔 1999년 10월 거액의 사재를 출연, 동원문화재단을 설립한다. 2가지 목적을 위해서다. 첫째, 경제적 어려움으로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는 유능한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 그들의 재능을 길러 국가·사회에 봉사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둘째, 각종 문화사업 운영을 통해 지역사회·국가의 문화사업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다.  

재단은 2000년부터 장학금 지급사업을 펴고 있다. 부산·경남 일원 261개교 260명의 학생에게 매년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서울대에 진학한 2명에게 4년간 학비를 전액 지급하며, 연·고대와 지방 국립대 입학생에겐 1년치 등록금을 지원한다. 이런 식으로 장학금을 받는 학생은 연간 60여 명, 10년간 700여 명에 이른다. 장학기금은 매년 2억원씩 조성하고 있고, 향후 100억원으로 확대할 계획. 지역사회의 각종 문화사업을 발굴·육성, 부산·경남 문화사업 진흥에도 톡톡히 한 몫을 하고 있다.  

Q. 교육·문화·장학 사업가로서, 그 값진 투자의 대상 청소년에게 한 가지 조언을 한다면.
"음, '책을 많이 읽어라', 이 말을 꼭 하고 싶다. 나에 관한 한, 성공적 경영자로서 나를 키운 8할은 책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년시절, 속상했던 것은 책을 읽고 싶어도 책 살 돈이 늘 부족했던 현실이었다. 나이를 먹고 학년이 오를수록 읽고 싶은 책들은 점점 늘어도 책을 살 돈이 없었던 거다. 그러다 보니 돈이 생기면 죽어라 책만 사서 읽었다.

통영상고 시절, 자취를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집으로 양식을 가지러 가곤 했다. 그때 쌀을 가져오면, 나는 일주일에 하루치 정도의 쌀은 반드시, 따로 떼어 놓았다. 그렇게 모은 쌀을 팔아 돈을 만들고, 그 돈으로 책을 사봤던 거다. 한참 먹을 나이에 끼니를 이을 양식마저 책 사는 데 쓸 만큼 나는 지식에 대한 욕구가 매우 강했다. 책 읽는 습관은 지금까지 이어져 기업을 경영하는 짬짬이 다양한 분야의 책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그는 책을 지식의 보고(寶庫)로 본다. 일상에서 얻을 수 없는 동서고금의 지혜와 깨달음, 각종 사상들을, 전혀 다른 시대·공간의 타인에게 가장 명료한 언어로 제시해주는 보물이다. 가장 좋은 교육은 직접적 체험이지만, 책을 통한 간접경험 역시 무엇보다 중요한 교육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굳게 믿는다, 좋은 책은 좋은 인간을 길러낸다고, 그런 뜻에서 그의 책읽기는 죽을 때까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의 여생 중 독서하는 시간은 그에게 가장 중요한 시간일 것이다. 
 

지역개발·소외계층·국가유공자 지원에도 열성

장 회장은 남에의 배려·나눔에도 꾸준하다. 영역은 넓다. 사회·이웃이 도움을 절실해 할 때, 힘닿는 한 뒷받침을 다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면, BS금융의 지역아동센터 시설개선작업에, '희망주택' 집수리에 직접 뛰어드는 것이다.

부산지역에서 공부방 시설이 열악한 대표적 지역아동센터 16곳은 동원개발을 비롯한 4개 건설사의 도움으로 시설을 현대화했다. 부산 동구 범일동 김 모씨(79) 가족은 화재로 집을 잃고 6개월째 동네 경로당에서 생활하다, 지난 4월 불탄 집을 수리한, 멋진 새집으로 이사했다. 새집 시공은 동원개발 몫. 동구 각 단체들은 목재를 지원하거나 도배, 장판깔기 같은 잡무를 지원했다. 김 씨의 새집은 HOPE(House of Peaple's empowerment·서민 주거역량 강화를 위한 집) 하우스의 첫 번째 사례. HOPE 하우스(희망주택)는 남구 문현동·중구 대청동에도 이어지고 있다.

지역개발과 소외계층 돕기도 마찬가지. 기초생활수급자를 돕기 위해 명절마다 통영시와 인근 고성군에 성금을 기탁한다. 2012년 여름에는 부산 적십자사에 1억1천550만원 상당의 의류를 기증하기도 했다.  

Q. 정부의 국가 유공자 지원사업에도 적극 참여하고 계시던데?
"국가 유공자 노후주택을 무료로 보수해 주는 국가사업에 20년 째 참여하고 있다. 국가를 위해 헌신한 유공자와 유족을 보살피는 일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평소 생각에 따른 것이다. 참여 첫 해인 1994년 전몰군경 유족의 30년 넘은 노후주택(동래구 온천동)을 전면 개보수, 산뜻한 새 집으로 만들었다. 다음 해는 애국지사 유족의 24년 묵은 가옥을 수리했다. 이런 방식으로, 해마다 낡은 주택들을 정성껏 개보수하고 있다." 

Q. 다방면의 사회공헌에 앞장서는 특별한 이유 있나?
"얘기한 대로, '약간의 성공'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뜻이다. 교육·장학사업? 그저 열악한 환경의 지역인재를 키워보자는 생각에서 시작했다. 그 뿌리는 나의 어린 시절 기억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니를 잃고, 배고픈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내가 어린 시절을 서럽게 보낸 만큼, 이제 가정환경 때문에 굶거나 학업을 중단하는 일이 없도록, 힘닿는 한 돕고 싶다. 건설업계·체육계를 위한 기여? 우리 사회가 선진사회로 나아가는데 기업가로서, 당연히 맡아야 할 몫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어느 정도 성공했다는 사람이 자신의 영화만을 위해 살아서야 되겠나."

장 회장이 부산지역의 존경받는 사업가로 선 것은 나름 사회지도층의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를 성실히 실천한 결과다. 기업인이 체육훈장 기린장을 받은 것도 2002년 한일 월드컵 부산시민 서포터즈 대표회장을 맡는 등 사회참여활동에 모범을 다한 결실이다.  

Q. 기업이익의 사회환원, 방향을 제시한다면?
"조금 부끄러운 얘기지만, 주위에선 나를 두고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이라고 칭찬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기업이익의 사회환원, 사회로부터 축복을 받은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의무라고 생각한다. 국민에게 큰 사랑을 받은 기업인으로서, 그리고 지역의 유지로서, 국가와 지역사회의 발전에 한 부분을 책임지는 것은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다.
내가 제시한 '동원학당 건학이념'에도 드러나 있듯, 가난이 혹은 그에 버금가는 어떠한 역경이라도 배움의 길을 막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교육은 인간을 넓게 만들고 깊게 사고하게 하며, 결국에는 모든 것을 극복하게 만드는 힘을 갖게 한다. 이 귀하고도 중요한 일, 누가 맡을 것인가? 결국은 기업이 큰 몫을 맡아야 할 것이라 믿고 있다."

내 주변에도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인이 적지 않다. 지난해 가을 동원중고 교사 이전 때 축하하러 온 부산 상공인 중, 직접 후원 또는 문화재단 활동방식으로 사회환원에 앞장선 분들이 여럿이더라. KNN 강병중 회장 같은 분도 문화재단과 장학회를 통해 여러 대학과 중·고교에 장학금을 전달하고, 산학협력을 통한 지원을 하고 있다. 그 분은 경남 진주의 한 중학교 운영을 맡아 열정을 쏟았으나, 이농현상으로 입학생이 줄어들며 결국 문을 닫았다더라. 그 분이 다녔던 시골 초등학교 이전소식에 부지를 기증했으나, 역시 취학아동 감소로 학교가 문을 닫은 아쉬움도 갖고 있다."

기업이 직접 대학이나 중·고교를 맡아 운영하는 사례도 많아지고 있다. 교육환경이 급변하는 데다 학교사정이 나날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일선 지자체나 교육기관에서 기업인에게 학교 경영 또는 지원을 청하는 예도 많다. 기업인의 학교를 통한 사회환원은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것으로 본다.

장복만 회장은 동원개발을 건실하게 경영하며 사회기여의 꿈을 성취하고 있다(사진은 금탑산업훈장 받는 장복만 회장).

동원개발 근검·절약 경영… 꿈 성취할 힘 바탕

동원개발 장복만 회장. 그는 동원개발을 건실하게 경영하며 사회기여의 꿈을 성취하고 있다. 동원개발을 설립, 하루도 쉬지 않는 근검과 작은 돈 한 푼 허투루 쓰지 않고 절약으로 꿈을 성취할 힘을 얻고 있다. 동원개발은 부산의 대표적 향토건설사다. 주택건설 40년에 4만3천세대의 주택을 공급했다. 지난해 시공능력 평가액 5천40억원으로, 전국 시공능력 53위를 달성(부산업체 1위)했다.

앞서 2011년에는 부산과 경남 김해, 울산 등 전국에 6천여가구를 분양하는 공급력을 과시, 주택공급실적 전국 6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올해는 경기 하남 미사지구, 경남 통영 정량동, 부산 민락동 등에 아파트 공급을 앞두고 있다. 계열사로 동진건설산업, 동원주택, 동원종합건설, 통영수산, 통영산업, 경남제일저축은행, 뉴코아건설 등을 두고 있다.  

Q. 1975년 동원개발을 설립한 계기는?

동원개발은 부산에서 출발, 수도권으로 사업영역을 넓혀가며 주택 전문업체로 좋은 실적을 이어가고 있다(사진은 동원개발의 대표 브랜드 '로얄듀크' 명판).

"군 제대 후 월급쟁이 생활을 통해 철강재 판매업무를 익힌 뒤 1970년 건축용 철강재 판매점 신흥철재상사를 설립했다. 자영업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다. 1970년, 우리나라 고도성장이 첫 발을 뗀 해다. 새마을 운동 시작-주택건설 10개년 계획으로 '철근만 구하면 돈을 벌던 호시절', 신용을 발판 삼아 열심히 뛴 끝에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시대흐름을 살핀 끝에 주택사업으로 전환, 단독주택을 지어 팔기 시작했고, 1975년 개인사업체 '동원개발'을 설립했다.

'동원(東園)', 집단 단독주택지(33세대)를 개발하며 집을 배치하다 보니 동향 집이 많아 지은 이름이다. 시대추세에 따라, 부산지역 주택업체(업자)들과 50여 차례 동업을 경험했다. 나의 동업철학은 '일은 51% 하고 이익은 49% 받겠다'는 것, 그래야 분쟁이 없다. 1978년 '(주)동원개발'로 이름을 바꿨다. 부산지역 주택건설 면허 1호 기업이다." 

 

Q. 그동안 유수의 주택건설업체들이 숱하게 떴다 사라졌다. 그 속에서 건실한 성장을 낳은 경영방침은?
"내실경영-신용경영-책임경영 3가지다. 우선, 과도한 외형 성장보다 안정적 성장을 추구한다. 지킬 수 있는 약속만 하고, 한번 한 약속은 꼭 지킨다, 고객 직원 사회 국가에 대한 기업의 책임을 다한다, 이런 것이다. 트렌드보다 기본에 충실하며 경영 리스크를 줄이려 한다. 합리적인 의사결정과 고객중심 사고 원칙, 전문성·효율성을 극대화하는 경영으로 일류기업을 추구한다. 동원개발 사훈 역시 경영방침과 회사비전을 뚜렷하게 선언하고 있다. '진정 너 자신을 사랑한다면 바르게 사고하고 신용을 축적하라. 그리고 열심히 뛰어 최고가 되라'고."

동원개발인들 왜 고난의 시기가 없었으랴. 1, 2차 오일쇼크, IMF 환란, 세계금융위기, 모두 기업경영의 큰 위기였다. 오일쇼크 때만 해도, 주택 건설계약을 한 상태에서 자재 값과 인건비가 폭등했다. '포기하자'는 동업자도 있었다. 그는, '도망가면 어디로 가나? 차라리 계약대로 집 다 짓고 우리 손해 호소하자. 건축주가 이해 못하면 빚을 안아야지…', 이렇게 버텼다. 그런 신의를 쌓아가니 '저 사람, 틀림없다'는 평판이 쌓여갔다. IMF 때도 그렇다. 아파트 사업, 선분양-후공급 방식 아닌가? 분양 후 물가가 오르면 주택사업자는 망하기 십상이다. 그런 위기를 버틴 저력, 금융에 기대지 않는 보수적 경영에, 어려울 때 쌓아온 신용 덕분이다.   
 

성장비결? 기본에 충실 소비자 만족으로 수도권 진출

동원개발은 부산에서 출발, 수도권으로 사업영역을 넓혀가며 주택 전문업체로 좋은 실적을 이어가고 있다. 부산, 울산, 경남을 비롯, 전국에 주택을 공급하며 미분양이 거의 없는 건설사로 알려져 있다. 소비자들에게 기본에 충실하고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는 상품만 공급하는 데다, 이익을 적게 남기더라도 미분양은 없어야 한다는 판단 때문이다.

동원개발은 2006년 부산의 부동산 침체기 이후 수도권에서 분양을 추진해 왔다. 경기도 성남 분당지구, 남양주 호평지구, 용인 죽전지구, 흥덕지구 등에서 대형건설사와 경쟁, 면적당 가장 높은 분양가와 입주 뒤 최고가를 기록하면서 '성공적으로 수도권에 진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수도권 상륙 작전'을 진두지휘했던 장 회장은 "지방업체라는 인식을 극복하기 위해 신평면 개발, 단지조경의 특화, 조망권 확보, 무엇보다도 소비자의 의견을 반영하는 만족할 수 있는 아파트를 지었다"고 설명한다.

동원개발은 아파트를 지을 때 프로젝트 파이낸싱(PF)을 이용하지 않는다. 자체 자금으로 땅을 사고 아파트를 짓는다. 장 회장은 "남의 돈(은행 대출금)을 쉽게 생각하면 안 된다"고 경고한다. "자체 자금으로 내실을 다진 덕분에 1997년 외환위기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는 확신이다. 

Q. 주택사업에 대한 철학이나 신념이 있다면?
"사소한 부분이라도 안전을 소중히 여기며, 크고 많이 지어서 얻은 명성보다 튼튼하게 잘 지어서 사랑받아야 한다. 집은 사람이 살기 위해 지은 건물이자 가족이 생활하는 터전이다. 온 가족에겐 마음의 안식처인 것이다. 당연히, 주택사업은 착실하고 성실하게, 운영하여야 한다.

되돌아보면, 주택업은 초기에 많은 투자가 필요하기 때문에 항상 리스크가 존재한다. 특히 자금 차입은 회사 규모를 키울 수 있는 '약'이 되기도 하지만 리스크를 키우는 '독'이 되기도 한다. 회사 규모를 키우려면 금방 키울 수 있지만, 이런 자기 과신과 무리한 투자가 가장 위험하다. 시장을 분석하고 자신의 능력을 평가하는 자제력이 중요하다. 보수적 사업판단과 체질적 내실경영, 끊임없는 신기술 개발 없이는 장기생존이 불가능한 것이 주택업이다."
 

고교 졸업 후 부산 찾아 역경 끝 안착 성공

장 회장은 경남 통영시 광도면 안정리 중촌마을 출신이다. 그가 기억하는 '쪽빛 바다 일렁이는 그리운 고향'이다. 그는 한국 현대사의 격변기 속에서 고교 졸업과 함께 부산을 찾았다가 방황 끝에 자원입대를 했고, 제대 뒤 다시 부산에서 군 동기생을 만나 취업에 성공했다. 월급장이 회사원으로 승승장구하다 창업, 부산·경남을 대표하는 주택건설업체를 일군 것이다. 

Q. 부산과의 인연은 언제부터인가?
고향의 통영상고를 졸업하고 무작정 부산으로 왔다. 나의 고교 시절은 정치·사회적 격변기였다. 3학년 때 4·19, 이듬 해 5·16을 겪었다. 국내 시정상 변변한 일거리가 없어 취직 자체가 하늘의 별 따기였던 시절, 통영에서는 마땅히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이름만 듣던 부산을 정처 없이 찾은 것이다. 부산에 도움을 줄 사람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겨우 모 잡지사와 신문사 입사시험에 합격했지만 보증을 서 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 취직하지 못했다. 1년여 부산 등지를 방황하다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할 수 없어 1961년 11월 20살 때 자원 입대했다. 마산 의무교육기지사령부 경리참모부에서 복무했다.

제대 후 아무런 준비도 없이, 다시 직장을 구하러 부산을 찾았다. 그때 군대 내무반 동기 한 사람을 만났다. 현 대한제강 회장 오완수(대한제강 회장)이다. 오 회장의 부친(대한상사 창업자)이 경영하던 국제시장 안 대한상사 점원으로 취직했다. 대한상사는 철물을 납품받아 전국 도소매업을 하며 범냇골에 못과 철사공장을 건설하던 중이었다. 제조업으로 진입하던 시기였다. 차량 같은 운반기구 없이 손수레로 국제시장과 연안부두를 오가며 철물을 운반하던 시절, 그는 3~4개월 일반점원과 함께 손수레 끌기를 하다 경리보조직원으로 취업했다.

그는 타고난 성실성을 바탕으로 상고와 군에서 익힌 경리업무를 전담하며 승진을 거듭, 입사 1년 6개월 만인 24살 때 경리계장으로, 다시 2년 만에 경리과장으로 승진했다. 그런 실무경력을 바탕으로 동원개발을 설립, 부산사람으로 뿌리를 내린 것이다.

Q. 당시의 부산과 지금의 부산 어떻게 달라졌나?
"달라져도 너무 크게 달라졌다. 50년 전, 부산직할시 승격 무렵 아닌가? 도시 자체가 서울 못지않게 천지개벽했다 할 만큼 발전했다. 해운대, 센텀·마린시티가 좋은 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역동적인 도시공간 아닌가.

부산은 앞으로, 강력한 도시경쟁력을 바탕으로 더 도약할 것이다. 부산의 저력 역시 그만큼 엄청나다. 바다·항만의 경쟁력, 해운대·동부산의 희망, 서부산의 잠재력을 주시하라. 단, 도시관리 면에서, 인구유입에 조금 더 고민할 필요는 있지 않을까 한다." 

Q. 부산의 강점, 부산사람의 특질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부산은 바다·산·강을 다 안고 있어 지리적 조건이 뛰어나다. 사람 역시 경남을 비롯, 시골출신이 한데 섞여 있다. 서로 각박하게 살기보다 여유 있는 심성으로 포용력을 갖고 산다. 각박한 수도권보다 훨씬 인정 있는 도시 아닌가. 그만큼 환경적·인문적 조건도 뛰어나다. 한 도시의 강력한 경쟁력이다."  
 

작은 성취는 오직 사회 혜택… 보답할 줄 알아야

Q. 그 치열한 기업 생존경쟁 속에서, 취미는?
"취미가 있다면 일하는 것이다. 쉰다는 것 자체가 불편해서 하루도 쉼 없이 일해 왔다. 절약과 근면의 체질화다. 일하는 즐거움, 일하는 행복으로 이해해 달라." 

Q. '노블리스 오블리주'에 성실한 사회지도층으로서, 좌우명이 있다면?
"이 사회의 혜택을 받아 작은 성취를 이룬 만큼 그 받은 혜택에 보답할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나 혼자 잘 나 기업적 성공을 이룰 수 있었겠나. 개인과 사회가 함께 가야 한다는 생각, 그런 정신을 갖고 있다." 

Q. 건강은 어떻게 관리하나? 언제까지 현역 활동 할 생각인가?
"큰 수술 2번 받고 보니 역시 '인명은 재천'이더라. 건강을 관리한다기보다 무료함을 이기기 위해 걷기운동을 하고 있다. 최근 혼자도 안전하게 걸을 수 있는 동백섬을 찾아 해운대로 이사했다. 아침 6~7시, 1시간씩 꾸준히 걷고 있다. 일 속에서 건강을 찾고 있다. 현역활동? 몇 년 뒤쯤 은퇴할 준비를 하고 있다." 

Q. 어떤 기업, 기업가로 평가 받고 싶은가?
"'열심히 일해 사회에 족적을 남긴 기업인'으로 평가받고 싶다. 성공한 기업인은 누구나 남보다 많이 노력한 결과 일정한 단계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 성공을 혼자 누리다 의미 없이 죽기보다, 의미 있게 살다 간 흔적을 남기고 싶은 것이다. 우리 재벌이든, 부산의 유수 기업인이든, 생각을 크게, 그래서 어떤 '흔적'을 남겼으면 좋지 않겠나?" 

Q. 앞으로의 계획은?
"동원개발이 수익을 추구하는 기업이기보다 사회에 봉사하는 기업으로 자리 잡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자 임무라고 생각한다. 개인재산을 교육문화사업에 많이 투자했던 미국의 석유왕 록펠러와 철강왕 카네기 같은 인물에 비할 수는 없지만, 많은 기업인은 기업경영을 건실하게 하고 남으면 사회에 보답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나 역시 어떤 방법으로든, 언젠가 이룬 것을 사회에 환원할 생각을 갖고 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기억할 수 있는 기념비적 시설을 만들어보고 싶다."

장복만 회장은 동원개발이 수익을 추구하는 기업이기보다 사회에 봉사하는 기업으로 자리 잡는 것이 소원이자 임무라고 말한다.

덧붙일 사실 하나. 장복만 회장의 역사의식에 바탕 한, 놀랄 만한 기록정신이다. 그는 동원개발 30년사(1975-2005), 동원학당 66년사(1947-2013), 양산대학교 20년사(2011) 등을 발간, '역사와의 대화'를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다.

'동원개발 30년사'를 보면, '동원개발 30년의 역사' 편에서 '마음의 안식처, 집', '성공의 밑거름, 성실' '원대한 꿈을 향해', '창업, 그 순수한 꿈'…, 주택철학에서 창업 전·후사까지를 기록했다. 이어 부산의 대표적 그룹형 기업 구축-업계 최정상을 향한 새로운 준비-로얄듀크 브랜드 시대 개막 편에서 모기업의 성장과정과 오늘의 위상을 정리했다.

'동원가족' 편에선 건설업-부동산 개발-금융업-수산업-교육사업-사회사업 등을 소개했다. '자료' 편엔, 전직 임원 및 간부 명단, 우수사원 명단, 경영지표, 사업실적, 주요 수상실적, 연표까지 기록했다. 미래는 과거를 토대로 한다는 역사의식, 역사에서 미래를 찾는 도전의식, 과거 임직원의 열과 성을 다한 희생정신에서 애사심을 고취하는 단결정신을 두루 읽을 수 있다. 과연 기록에 충실한 민족의 후예라 자부할 만 하다. 그는 지금, '동원개발 40년사'를 준비 중이다.

현재 동원개발 본사 사옥은 동구 범일동 830 썬 오피스텔. 1991년 3월 사옥용으로 분양 받은 곳이다. 이제 23년째로 낡고 그룹 사옥으론 좁다. 신사옥을 마련할 계획은 없을까? "사옥 넓힐 돈 있으면 좋은 부지 구해 사업해야지." 장 회장의 단언이다. 온후한 노신사의 풍모 속에, '경리통' 경력을 반영하듯 깐깐하고 강단 있는 포스, 장복만 회장의 기업철학과 육영열정은 그만큼 확고하다. 정말이지, 돈 한 푼 허투루 쓰지 않는 부산사회의 원로, 그는 지금의 사회기여만으로 우리 곁에 길이 남을 위인이다, '부산의 대표적 교육·문화·장학 사업가'란 빛나는 평판으로-.

1942년 경남 통영 출생. 통영상고 졸업, 동아대 법학과 3년 수료, 부산대 경영대학원·미국 UCLA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경남대 명예 교육학 박사, 동원개발 설립(1975).
동원교육재단 이사장(1994), 동원송촌학당 이사장(2000). 동원교육문화재단 이사장(1999), 대한건설협회 부산시회장(2000).
금탑산업훈장(1995), 체육훈장 기린장(2002), 경남교육상·통영시 문화상(2012), 21세기 대상 경영문화대상(2013)수상.
작성자
글 차용범/사진 문진우·동원개발 제공
작성일자
2013-08-27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부산이라좋다 제159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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