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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고승이 찾은 부산의 명당

무학대사 성지 ‘강선대 성지곡’ 명당으로 꼽아

내용

'성지'라는 인물은 광해군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 성지가 이 지역으로 언제 왔다는 기록은 접할 수 없으나 그 같은 고승이자 풍수가의 몸으로 이 지역으로 와서 명당을 찾아 쇠말뚝을 꽂아 두었으니 오늘날까지 그 사실이 이야기로 남아 있을 만하다.

사하구의 동아대학교 승학캠퍼스가 있는 산을 승학산(乘鶴山)이라 하고 승학산 아래를 오늘날에는 에덴공원이라 하지만 그 옛날에는 강선대(降仙臺)라 했다. 강선대는 고려말의 무학대사(無學大師 : 법명 자초(自超))로 해서 그리 이름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오늘날의 부산진구의 어린이대공원 골짜기를 성지곡(聖知谷)이라 하고 그곳을 성지동(聖池洞)이라는 동명을 가졌던 바도 있는 성지는 성지라는 풍수가(風水家)로 해서 그리 이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지곡의 성지는 풍수지리가라기 보다 조선시대 광해군을 도와준 고승(高僧)이었다.

불가의 고승들이 풍수지리에까지 그 힘이 미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신라말의 고승 도선대사(道詵大師)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무학대사와 강선대

그 도선은 오늘날의 풍수설인 음양지리설(陰陽地理說), 풍수상지법(風水相地法) 등 풍수지리의 원리를 형성하였을 뿐 아니라 뒷날 국사(國師), 왕사(王師)로 추앙을 받는 고승이었다. 국사라 하고 왕사라 하면 왕의 자문을 받는 존재다.

이 자문은 불법만이 아니었다.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면에 걸치면서 미래까지 바라보는 해박한 식견과 예지를 가진 존재라야 했다.

고려 태조가 송악(開城 개성)으로 수도를 옮긴 것은 고려의 미래를 도선의 풍수지리설인 도선비기(道詵秘記)에 따른 것이라 한다.

그와 같이 이곳의 승학산, 강선대의 이름이 되게 한 무학대사도 조선 개국 후 조선 태조 이성계의 왕사가 되어 그가 가진 풍수지리의 원리를 따라 조선의 미래를 위해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는 데 역할을 했다.

미래를 바라보는 풍수지리에 통달했던 무학대사는 전국을 주유(周遊)하며 자연경관을 즐겼다고 한다. 그 전국 주유 때 이곳으로 걸음한 것이다. 이곳이라면 나라의 척량(脊梁) 백두대간이 대한해협을 향해 밋밋하게 낮아지면서 바다로 마무리되고, 낙동강이 영남의 곡창(穀倉)을 적시며 유유히 흘러내리는 풍광의 곳이었다.

무학대사가 이곳으로 온 그 날을 오늘에서 헤아리면 600여년 전이다.

그 무렵의 사하구 하단지역은 낙동강이 바다와 어우르는 하구(河口)였고 오늘의 강서구지역은 바다에 삼각주(三角洲) 사구(沙丘)를 띄엄띄엄 띄우고 있을 때다.

낙동강 풍광 즐긴 무학대사

그 날 무학대사가 승학산과 강선대를 바라보니 강의 하구에서 안개구름이 강선대(降仙臺 : 오늘날의 에덴공원)에서 승학산 영봉으로 피어오르면서 산비탈을 보였다 가렸다 했을 것이다. 그 보였다 가렸다 하는 안개구름 속으로는 안개구름 속에서 살면서 땅을 밟지 않고 이슬을 먹고 불로불사(不老不死)한다는 신선이 환상인 양 오갔을 것이다.

그래서 신선이 학을 타는 묏봉우리를 승학산이라 하고 신선이 내리는 대를 강선대라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어떠한가? 그 날의 강선대는 1930년대 낙동강 제방을 쌓을 때 강가 부분은 깎이어서 제방에 소요되는 흙과 돌로 쓰였고 앞의 강도 메워져 옛 모습을 잃었다. 광복 후 강선대는 에덴공원으로 이름이 바뀌고 주위는 주택가가 빽빽하게 들어서 시가지 속의 고도(孤島)가 되어 그 날의 신선을 이야기하기는 멋쩍게 되었다. 승학산도 고층의 건물과 아파트에 가려 지난날을 상상하기에는 어려워지고 있다.

성지(性智)와 성지곡(聖知谷)의 유래

부산진구 초읍동에 속해 있는 부산어린이대공원 골짜기를 성지곡이라 하고 공원 안에 있는 수원지를 성지곡수원지라 하고 1942년에는 이곳에 성지동(聖池洞)이 형성되어 1963년까지 그 이름을 가지기도 했다.

이렇게 성지라 하는 것은 성지라는 풍수가가 전국으로 명산을 찾아다니다가 이곳이 빼어난 명산이라 하여 그 명산의 명당자리 혈(穴)에 쇠말뚝을 꽂아놓고 보니 그 풍수가의 이름이 지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지라는 풍수가를 '부산의 고적과 유물(1969년 刊)'에서 근거나 출전을 밝히지 않은 채 신라사람이라 한 데서 그 이후 여러 기록들도 그에 따르고 있다. 그러나 그 성지(性智)는 조선시대 광해군 때의 성지다.

한국인명대사전(신구문화사 1967년 출판)은 그 성지를 1623년에 타계하였다고 하면서 승려로서 풍수지리에 밝아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다고 했다. 그것은 성지가 왕(광해군)에게 인경궁(仁慶宮), 경덕궁(慶德宮), 자수궁(慈壽宮)을 짓게 하고 1618년에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고, 광해군은 새로 지은 궁궐 옆에 성지를 살게 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인조반정 후에 죽음을 입었다.

성지(性智)는 광해군 때 인물

성지의 이러한 사실들은 그 만큼 광해군을 도와 광해군과는 밀접한 관계였다는 말이 된다. 그 성지가 이 지역으로 언제 왔다는 기록은 접할 수 없으나 그 같은 고승이자 풍수가의 몸으로 이 지역으로 와서 명당을 찾아 쇠말뚝을 꽂아 두었으니 오늘날까지 그 사실이 이야기로 남아 있을 만하다.

그리고 성지로 해서 지명이 성지가 되었는데 그 성지를 한자로 표기할 때는 갖가지다. 성지곡이라 할 때는 聖知谷(성지곡)으로, 동명으로 썼을 때는 聖池洞(성지동)이 되었다. 그 이외 聖智(성지), 聖旨(성지)로도 씌었다. 어찌 성지가 그렇게 바뀌어졌느냐는 말이 나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승려의 법명으로는 사람의 성품을 말하는 성품 성(性)이 은근하고도 겸양이 드러나 마땅하지만 지명으로는 맞아들지 않아 신성을 뜻하는 덕명(德名)인 성(聖)으로 바뀌어 간 것으로 본다.

성지(性智)의 성지(城地), 그 성지는 성지(聖地)임에 틀림없다.

 

작성자
부산이야기 2005 3·4월호
작성일자
2013-07-02
자료출처
다이내믹부산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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