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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말 나는 고개’에 얽힌 기막힌 애환

이야기 한마당 - 송공삼거리 이야기

내용

오늘날 부산진구의 서면과 양정동 길을 잇는 지난날의 고개가 평지가 되다시피 하면서 임진왜란 때 동래부사로 있다가 왜적과 싸우다 순사(殉死)한 송상현(宋象賢)공의 동상이 서고부터는 '송공삼거리'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러나 이 송공삼거리는 191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화지산(和池山)과 황령산(荒嶺山)이 이어지는 능선의 가파른 고개로 그 이름도 '마비을이현(馬飛乙以峴)' '신좌수영(新左水營)고개' '모너머고개' 등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 이름도 다양했다.

馬飛乙以峴 - '말 나는 고개' 이두식 표기

마비을이현(馬飛乙以峴)은 동국제국기(東國諸國紀:1476년 출판)의 동래부산포지도(東萊富山浦地圖)에 그렇게 적혀 있고 부산진지도(釜山鎭地圖:1872년 출간)에는 이 고개를 마비현(馬飛峴)이라 적었고 동래부지도(東萊府地圖:1899년 출간)도 마비현(馬飛峴)으로 적었다.

이 마비을이현(馬飛乙以峴)은 그 당시는 "말 나는 고개"로 불리던 고개를 우리말 표기가 널리 퍼지지 않은 때가 되어 이두식(吏讀式)으로 한자의 음과 새김을 따서 말(馬) 날(飛) 을(乙) 이(以) 고(峴)로 표기한 것이 후대의 지도 작성시에는 마비현(馬飛峴)으로 적은 것이다.

이 고개로 날아가듯 달아난 말은 석포목장(石浦牧場)의 말이었다. 1469년에 편찬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는 석포목장에는 목마 2백32필(匹)이 있다고 했다.

이 석포목장은 오늘날의 남구 대연동을 석포라 했을 때 있었던 목장으로 나라에서 경영하는 국마장(國馬場)이었다.

이 국마장에서 방목하던 말이 황령산에서 풀을 뜯다가 주위에서는 가장 낮은 산등성이인 오늘날의 송공삼거리로 자주 달아나서 '말 나는 고개'라 한 것 같다.

신좌수영고개·개항 후에는 모너머고개

'신좌수영고개'라 한 것은 동래 쪽에서 '송공삼거리' 고개를 가리킬 때 한 말이었다. 이는 울산 개운포에서 이전해 온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좌수영)을 임진왜란 이후 오늘날의 동구 범일동에 있었던 부산진지성(자성대성)에서 재편성했다. 재편성을 마친 좌수영은 본래 있어야 할 지금의 수영으로 옮기고 옮긴 그 자리는 부산진첨사영(본래는 좌천동에 있었음) 진영으로 삼았다.

그런데 좌수영을 재편성하는 과정이 제법 길었던 모양으로 재편과정에 있었던 자성대성을 신좌수영이라 불렀고 동래지역에서 부산 쪽으로 가는 고개인 송공삼거리를 신좌수영 쪽으로 가는 고개라 해서 신좌수영고개라 한 것으로 여겨진다.

서면에서 동래온천장으로 오가는 전차길이 있었을 때(1915∼1968년 사이)는 지금의 송공삼거리의 송상현공 동상에서 거제로 쪽 약 10m 아래 신좌수영역이 있었다. 그 전차역 이름도 신좌수영고개의 이름을 따서 신좌수영역이라 한 것이다.

'모너머고개'라 한 것은 1876년 부산이 개항된 뒤부터 붙여진 이름이다.

이는 개항이 된 부산항에서 일본인이 다닐 수 있는 간행리정(間行里程)을 처음은 10리로 한정했다. 그렇다고 그 10리를 어디까지라 표시하기도 곤란하고 보니 서면의 신좌수영고개는 넘지 못한다 하여 '못 넘어가는 고개'란 말이 일본인은 발음이 잘 되지 않아 '모너머고개'라 하고 우리 쪽에서 그들 말을 흉내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까지의 설에는 '마비을이현'이 고개 주위에 도적이 많아 말을 달리듯 빨리 올라야 하는 고개라 해서 '말 나는 고개'라 하였다는 말도 있고 '신좌수영고개'는 좌수영이 한동안 이 고개에 있어서 그런 말이 생겼다고도 하고 '모너머고개'는 부산 갯가의 천민은 동래 양반 곳으로 못 넘어간다 해서 그런 이름이 생겼다고 하지만 그 모두는 역사적 사실에 맞지 않는 말이다.
 

경편철도 부설로 사라진 고개

그런데 이 고개가 지금처럼 낮아진 것은 합일합방이 된 뒤 국도(國道)를 개설하느라 깎아 내려지고 1915년 부산과 동래 사이 경편철도를 부설하느라 최대한으로 깎여 내려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1910년대 이전은 아주 가파른 고개인데다 주위는 숲이 우거져 동래장과 부산장(당시의 부산장은 범일동에 있었음)으로 오가는 장꾼을 노리는 도둑떼가 많았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부산장을 보고 오는 동래의 어느 아주머니가 해가 져 어두운 이 고갯길을 오르자니 혼자서는 무서웠다. 그래서 혼자가 아니라는 걸 도둑떼에 알리느라 "오빠 좀 천천히 가요!" 하면서 위를 향해 소리쳤다. 그런데 앞에 마침 장정이 고개를 오르면서 "야아, 싸게 싸게(빨리 빨리) 온나! 뭐 하노!"하는 짜증 섞인 소리가 내려왔다.

이 아주머니는 또 아래를 향해 "형님, 싸게 싸게 와요!" 소리치니 아래에서도 올라오는 여자가 있어 "동생아 간다. 싸게 싸게 간다!"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고개를 올라 홰바지(오늘날의 거제리시장쯤의 자리)에 와서 한숨 쉬며 얼굴을 대하고 보니 오빠라 했던 사람은 집안의 시동생 뻘이었고, 형님이라 했던 사람은 친정갈래 동생이었다.

아주머니는 "아이구마, 시동생이 오빠 되고 형님 됐네, 내 이 우짜꼬!"하니 시동생이 "급한 판에 오빠고 동생이 어딨능기요"하며 한바탕 웃었다고 한다.

작성자
부산이야기 2001년 9·10월호
작성일자
2013-02-22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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