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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김명자, 춤과 삶

예술부산 ‘예인탐방’ 28. 김명자 선생

내용

“얘, 북 가락만 배워도 남는다. 그 남자랑 결혼해라.” 선배는 나에게 이매방과 결혼하기를 장난스럽게 권했다. 나는 고모의 소개로 부산에서 맞선인지 소개팅인지 그와 만났다. 그는 이미 서울에서도 유명한 사람이어서 무용을 하던 친구들이 결혼을 지지했다.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나는 경남 의령에서 태어났다. 5남매(3남 2녀)의 중간이다. 위로 언니 오빠가 있다.  본명은 김정수인데 일제시대에 아끼꼬라고 부르다가 지금의 이름 김명자가 되었다. 아버지는 일본에 유학 갔다 오셔서, 물가 관리 부서를 책임지는 고위 공무원으로 계시다가 6·25때 납치되었다. 어머니는 5남매를 키우느라 정말 고생을 많이 했다.

우리는 서울에서 대구, 부산으로 피난생활을 했다. 휴전하고 나서 다시 서울로 올라갔는데, 우리 집은 너무 가난하여, 어머니는 나를 인천의 고모 집에 맡겼다. 고모는 큰 적산 가옥에 살았다. 고모는 한량이어서 당대의 유명한 예인을 거두었다. 국악인, 무당, 무용가, 그들은 고모 집에서 먹고 잤다. 그중에는 판소리 명창 임방울 선생도, 국악인 이두칠 선생도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서 자연스럽게 예술을 배웠다. 고1 때쯤 나는 서울역 뒤 만리동 집으로 돌아왔다. 고모의 사업이 망하여 더 이상 신세를 질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시절 서울에서 인천까지 교통이 불편했지만, 기차를 타고 통학하여, 1961년 인천여고를 졸업했다.  

인천 시절은 정말 나에게 힘들었지만 전통 예술을 익히던 시기이다. 나는 예인들에게 양금, 가야금, 아쟁, 그리고 춤을 배웠다. 초등학교 5학년 때쯤 한 남성 박수무당 선생께서 고아원이나 절 같은 곳에서 춤을 가르쳐 준 기억도 있다. 인천여고 교장 선생님은 국악을 좋아하여 국악반을 만들었다. 연습실은 따로 없었어도 열정은 뜨거워 우리는 교사 숙직실에서 연습해서 덕성여대 국악 콩쿠르에 참가했다.

중학교 1학년 때 이동안(중요무용문화재 제79호 발탈 기예능보유자) 선생에게 무용을 배웠다. 그분은 처음으로 인천에서 무용연구소를 차렸다. 너무 어려서 몰랐지만 그분 춤이 지금 생각하면 참 멋졌다. 제자 중에 김영란 언니도 소중한 사람이다. 구음도 잘 했는데 언니에게도 춤을 배웠다.

교생으로 온 이화여대생 이병림 선생도 잊지 못한다. 그분은 무용평론가가 되어서 이매방 선생이 1977년 서울 YMCA에서 공연할 때 보러왔다. 내가 인천여고에서 배웠다고 인사를 드렸더니, “그래, 정말?”하며 반가워했다. 나중에 그녀는 미국 LA에 살면서 그곳 예총회장으로 활동하여 이매방 선생을 초청하여 특강을 열어주었다.

김영옥은 김천흥 선생의 제자인데 인천여고 무용 선생이셨다. 김영옥 선생은 자태가 멋있어서 오래도록 내가 존경했다. 이분은 무용 특별반을 만들었는데 나는 이미 국악반 활동을 하고 있었으므로 거기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나중에 선생은 교사를 그만 두고 성북동에서 학원을 차렸다.

내가 고등학교 일 학년 때쯤 고모는 사업이 실패하여 인천을 떠나게 되었다. 고모는 방랑생활을 했고, 그러던 중 부산에서 이매방을 김춘지(중요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 보유자)를 통해 만났다. 고모는 이매방의 예술적 능력을 보고 적극 나를  연결하려고 했다. “그분, 춤 대단한 사람이더라. 한번 만나 봐라.”

당시 나는 서울에서 무용 활동을 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무용학원에서 배우면서 강사로도 가르쳤던 것이다. 해외 공연도 따라 다녔는데, 그때 김진걸 선생을 만났다. 그분은 해외 공연을 위해 무용수를 모집하고 있었다. 내가 뽑혀 일본, 베트남으로 공연을 다녔다. 김진걸 선생 자신도 무용학원을 하고 있었지만, 퇴계로에 있는 송범무용학원이 넓어서 우리 무용단은 거기서 연습했다. 나중에 김진걸 선생은 한성여대 교수를 역임하고 한국무용협회 회장에 올랐다.

일본 공연을 다녀와서 고모 선물을 사왔다. 고모는 “우리 명자가 노처녀로 혼자 사니 결혼시켜야겠다.”고 생각하여 이매방을 만나게 하려고 나에게 편지를 해서 부산에 오라고 했다. ‘흥, 그 사람은 술 많이 마시고 땡깡 부린다던데’하는 생각으로 내키지 않았지만, 고모께 선물도 드리고, 일본 공연에서 얼굴에 오른 화장독을 동래온천에서 치료도 할 겸해서 나는 부산으로 갔다.  

이매방은 온천장 다세대 주택 3층에 방을 얻어 혼자 살고 있었다. 그는 건강이 좋지 못했다. 사람이 몸이 아픈 것을 보니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나에게  깨알같이 쓴  승무 무보를 주며, 서울 가지고 가서 공부하라고 했다. 나는 그것을 베껴 쓰고 나서 며칠 후 돌려주러 다시 그 집에 갔다. 이번에는 그는 더 아파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누워 있었다.  

고모는 자꾸 우리를 맺어 주려고 노력했다. 고모는 이매방의 실력을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 “얘, 남에게 물어보지 마라. 다 시기해서 나쁜 소리 한다. 니가 그냥  판단해라.” 그 남자의 평이 나쁘더라도 신경 쓰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1973년에 결혼하여, 다음 해에 딸 현주를 낳았다.

우리가 함께 부산에서 산 시간은 몇 년 되지 않는다. 남편은 1977년 김소희 선생 연구소에 거처를 정하고 여기저기 다니며 무용을 가르쳤다. 나는 부산진시장에서 1973년부터 1986년까지, 그리고 데레사여고 옆 이 자리에 1986년에 이사 와서 지금까지 ‘이매방 무용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장검무를 추는 선생의 따님 현주씨.

딸 현주에게 우리 부부는 무용을 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 당시 무용가 대우가 너무 나빴던 것이다. 우리는 현주가 영어 잘해서 외교관이 되기를 바라 현주에게 영어 비밀 과외를 시키기도 했다. 현주는 춤을 가르치려고 해도 춤 연습을 싫어했다. 그러나 늘 피아노 치고 돌아다니는 데도 학원에서 가르치는 춤의 순서를 다 알아, 학원 아이들이 어디 공연하러 가면 자기가 먼저 화장하고 공연할 때 그렇게 끼를 부렸다. 연습도 하지 않으면서 무대에서 너무 설치니까 우리는 다른 학부모에게 미안한 심정이었다. 중학교 때 현주가 무용을 하고 싶다고 해서 현대 무용을 하도록 했다. 하도 애가 덜렁거리고 흔드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현주는 중학교 때 부산여대(현재 신라대) 콩쿠르에서 입상하고 고등학교 때는 경성대와 세종대 콩쿠르에서 상을 받았다. 졸업 후 현주는 한성여대 무용과에 진학하여 거기서 석사까지 마치고 한양대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현주는 미국에 가서 재즈 공부도 했는데, 요즘은 한국 무용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춤을 연습하고 있다.

나는 이매방류 승무와 살출이 춤의 전수 조교이다. 전수교육 조교는 전승자를 가르친다. 나 외에도 김정녀는 살풀이춤, 임이조와 김묘선(일본 거주)은 승무 전수 조교이다. 전수자는 3년 공부하고 나서 시험을 쳐서 합격하면 이수자가 된다. 5명이 춤을 심사한다. 예전에는 떨어지는 사람도 있었지만, 지금은 열심히 대비해서 떨어지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수자도 계속 나와서 연습한다. 이수자들은 대개 다른 춤을 추다가 이매방 춤을 배우는데, 그러다보니 춤들이 섞인다. 만약 그들이 이수하고 나서 연습을 하지 않으면, 원래 그들에게 익숙한 춤으로 돌아갈 위험이 있는 것이다. 나는 10년 전부터 입시생을 받지 않고 전승자(전문가)만 가르치고 있다.

이매방류 승무는 198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되었다. 승무는 1977년  YMCA 강당 무대에서 열린 서울 데뷔 무대에서 선생이 많은 사람들을 감격하게 만든 춤이다. 그때 춤을 본 김정녀는 이렇게 쓰고 있다.

“전통 춤의 하나인 <승무>를 보게 된 그날, 나는 시로만 읽었던 조지훈의 <승무>가 바로 내 눈 앞에서 동작으로 현현됨을 본 것이다. 비록 그가 파계승이 아니라 해도.... 처음에 엎드려서 느린 염불 장단으로 시작, 서서히 일어서면서 장삼을 위로 힘차게 뿌린다. 펼쳐졌던 장삼이 허공에 곡선을 이루며 살포시 내려앉는 그 아름다운 형상은 장관이었다. 장삼이 흩뿌려지고 다시 모아지는 형상은 인간사 백팔번뇌 같았다. 후반부엔 북 놀음이 있는데 구정놀이(자진몰이) 장단으로 자근자근 치다가 점점 몰아가면서 멋드러진 가락이 나오고 신명이 나면서 흥겨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휘모리로 넘어가 매우 빠르게 몰아붙이면서 북소리는 천둥 뇌성 소리로 변하고 관객들의 마음은 물론 공연장 전체를 마구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마침내 한맺힌 고뇌가 몸부림-맘부림하는 듯 꿈틀대다가 마지막 장삼 자락이 허공을 향해 흩뿌려지면서 살포시 다시 내려앉는 그 순간 비로소 모든 번뇌가 사라지는 후련함, 그 카타르시스를 체험한 그날의 감동은 내 춤꾼으로서의 삶에 자극제가 되었다.”

승무는 장단변화가 다섯 번이다. 염불 - 도드리 - 타령 - 자진 타령 - 굿거리. 그래서 승무는 어렵다고 생각하여 전승자들이 살풀이춤보다 적은데, 승무를 배우고 살풀이춤을 추면 춤이 많이 는다. 승무는 장단이 다양하여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염불은 느린 반면, 타령은 쾌활하고 역동적이다. 타령은 동작을 좀 끊어야 한다. 도드리는 염불과 타령을 연결하는 부분이다. 자진 타령은 타령보다 좀더 빠르다. 그리고 굿거리는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춘다.

승무 전수생들에게 나는 자연스러움을 강조한다. 팔을 오므리지 말고 시원스럽게 펼쳐야 하고, 발걸음도 자연스럽게 가야지 윽 하듯 위로 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북을 칠 때도 팔을 겨드랑이에서 충분히 떼고 오므리지 말고 펴야 한다. 전수생들 중 수십 년간 춤을 춘 사람도 있지만 이매방류의 본질을 잘 모르기 때문에 나는 거듭해서 지적한다.

살풀이춤은 살풀이와 구별해야 한다. 살풀이는 굿판에서 무당이 좋지 못한 살을 제거하는 풀이 행위이다. 풀이는 말이 될 수도 있고 춤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신앙적 종교적 목적의 살풀이가 무대의 예술 무용으로 발전하게 되면, 그것이 살풀이춤이다. 애초의 살풀이는 무속 의례인 반면, 살풀이춤은 거기에 미적 감각과 기교적 춤사위를 넣어 무용예술로 승화된 것이다. 살풀이춤은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려 왔다. 즉흥무, 수건춤, 허튼춤, 굿거리춤, 그리고 기방의 기녀들이 이 춤을 학습하고 추었기 때문에 교방춤이라고도 한다.

이매방류 살풀이는 범한국적 춤이다. 이병옥 교수는 이매방은 호남춤, 한영숙은 중부 지방춤으로 구별하는 상식에 결함이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초기 이매방의 춤에서는 호남적 요소와 곱고 아름다운 기방적 요소가 두드러진다. 그러나 이매방이 부산에서 2~30년, 그리고 서울에서 30년 이상을 거주하면서 그의 춤은 호남춤과 기방춤, 부산춤과 서울춤이 혼합되어 범한국적 춤이 되었다.

살풀이춤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굿거리-자진모리-굿거리. 굿거리에서 시작하여 다시 굿거리로 돌아가는데 뒤 굿거리는 조금 짧다. 초반부는 분위기를 표현하고, 중간의 자진모리는 흥을 돋우고, 후반부는 내면의 세계로 들어간다. 자진모리에서는 굿할 때처럼 신나게 춘다. 거기서 수건을 하늘로 마구 던지는 동작이 나오는데, 이것은 지전춤에서 유래한다. 살풀이춤은 단순히 한의 춤이 아니라, 춤추는 중에 환희도 느끼는 등, 희로애락이 모두 다 있는 춤이다.  

살풀이춤이 지루하다고 느끼는 경우도 있다. 표현이 부족한 사람이 출 때는 그럴 수도 있다. 살풀이춤은 춤의 재주가 있어야 제대로 춘다. 잉어걸이는 갈 지之자 모양의 스텝인데 화려하다. 앉음사위는 애절한 표현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비틀어서 쪼아대는 듯한 동작이나 귓등을 스치는 오른손의 요염한 동작이 좋다. 살풀이춤은 재능도 있어야 하지만, 기술보다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내면의 세계가 더욱 중요하다.

이매방 선생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벅찬 춤을 춘다. 비디오를 보고 선생과 비교해 보면 선생의 춤은 금방 살아서 나오는 것 같다. 나는 열심히 노력하는데도 생명력 있는 춤이 잘 나오지 않는다. 선생님은 체격이 다르다. 어깨가 부드럽고 팔도 손가락도 길어서 버드나무처럼 춘다. 선생은 몸도 유연하여 따로 리허설이 필요없을 정도이다. 여러 사람이 이매방 춤의 특징을 여성적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선생이 유연해서 많이 비틀고 꼬기 때문일 것이다. 선생의 춤을 우리는 흉내도 못 낸다. 그분은 타고난 무용가이다.

전통춤은 참으로 어렵다. 그중에서 가장 터득하기 힘든 것 중 하나는 호흡이 아닐까 한다. 호홉을 올리면 배꼽 위로 숨이 들어가 가슴이 고무풍선처럼 부푼다. 호홉을 내리면, 숨을 내 쉬는데 배꼽 밑 배가 부풀게 된다. 호흡을 올리면(들면) 아랫배가 앞뒤로 붙고 상체 상반부가 불룩해지면서 등이 뒤로 활처럼 펴진다. 호흡을 내리면 상체 하반부가 불룩해지면서 등이 앞으로 굽는다. 이렇게 호흡을 올리고 내리면, 상체가 굽었다가 폈다가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그냥 로봇처럼 꼿꼿하다. 한국 무용의 기본이 맺고 푼다고 하는데 이것은 바로 호흡을 말하는 것이다. 네 박자인 경우 하나 둘에 맺고(호흡을 올리고) 세엣 넷에 푼다(호흡을 내린다).

호흡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춤에 무게가 없다. 요즘 30대 후반만 되면 명무인 양 자랑하는데, 전통은 그렇게 젊은 나이에 잘 출 수 없다. 나이가 좀 들어야 호흡을 익혀 춤에 깊이가 생긴다. 나는 예전에는 학생들에게 열심히 노력하기만을 강조했다. 그러나 억지로 많이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연스럽게 시간이 가면서 춤이 익는 것이다.

춤을 시작한 지 50년 이상이 흘렀다. 이매방과 결혼하여 부산에 정착한 지도 40년이 되어간다. 가까이서 돌보아주고 어깨를 툭 치며 지나가는 인정을 소중히 생각한다. 그동안의 춤 인생을 되돌아보면서 예술가로 교육자로 어머니로서 살게 해 준 제2의 고향 부산 시민들의 지대한 관심과 성원에 감사드린다.

작성자
예술부산 2012년 3월호
작성일자
2012-11-06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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