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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서정의 향기로 꽃 피운 시심

예술부산 ‘예인탐방’ ⑬ - 시인 김석규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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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김석규金晳圭 시인은 1941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부산사대, 부산대교육대학원을 졸업했다.

1965년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시단에 나왔으며, 이어서 『현대문학』지에 청마 유치환의 추천으로 등단했다.

『풀잎』, 『남강 하류에서』, 『저녁 혹은 패주자의 퇴로』, 『먼 그대에게』, 『섬』, 『적빈을 위하여』, 『훈풍에게』, 『낙향을 꿈꾸며』, 『청빈한 나무』 등 많은 시집을 간행하여 경상남도문화상, 현대문학상, 봉생문화상, 부산시인협회상, 윤동주문학상, 부산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부산시인협회장을 역임하는 한편 경남교육청 장학사를 거쳐 중고등학교 교장, 울산광역시교육청 장학관, 울산교육연수원장, 울산광역시교육청 교육국장 등 오랜 기간 교직에 종사하여 정부로부터 황조근정훈장을 받은 바 있다.

필자는 지난 8월 13일~15일 울산학생교육원에서 열린 사단법인 우리시진흥회가 주최한 제3회 《여름자연학교》 교장을 맡은 김석규 시인을 만났다.

장영희(이하 장)  문단의 대선배 시인이신 선생님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건강하신지요?

김석규(이하 김)  장영희 시인, 반갑습니다. 몇 년 전에 교직을 정년퇴임하고 시 쓰기와 독서로 소일하고 있어요. 지난해부터 월간 『조선문학』에 신작시를 매월 5편씩 연재하고 있는데 올해 말까지 발표할 예정입니다. 『시문학』과 『시를 사랑하는 모임(현대시 발간, 격월간)』 등에도 작품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바쁘게 읽었던 고전들을 요즘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요, 특히 「열하일기」, 「징비록」 등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고전의 가치를 다시금 알게 되는 시간을 마음껏 누리니 참 즐겁습니다. 저는 병원 갈 일이 별로 없어서 건강한 편인데, 다만 치통으로 가끔 치과에 다니고 있어요. 이가 오복의 하나라는 걸 새삼 깨닫습니다.

장 _ 시 쓰신 경력이 참 오래 된 걸로 알고 있는데요, 언제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나요?

김 _ 고교시절부터 시를 썼어요. 집안의 독서 환경이 참 좋았습니다. 경남 함안이 고향인데 형님이 장서가 많았어요. 그때 방인근, 김래성, 이광수 등의 작품을 많이 읽으면서 책 읽는 재미를 붙였고, 시인으로는 김소월, 정지용 등의 시집이 있어서 읽기 시작했는데 시 읽는 재미가 참 좋았습니다.

대학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어요. 1950년대 말 대학의 학보에 시를 발표할 수 있는 지면이 있었고, 지역의 일간지로는 [부산일보], [국제신문], [민주신보] 등이 있었는데 대학생들이 글을 발표할 수 있는 지면이 마련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투고하여 글이 실리곤 했습니다.

1965년 제1회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정식으로 시인의 이름을 얻었습니다. 당시 지방지는 중앙의 5대 일간지, 즉 [동아일보], [조선일보], [한국일보], [서울신문], [경향신문] 등에 비해 큰 영향력이 없었어요. 그래서 신춘문예에 당선되어도 그 경력으로는 시를 발표할 지면을 얻거나 시인으로 활동하기에 별 효과가 없었습니다. 청마 유치환 선생께서 돌아가시기 바로 전 『현대문학』 추천을 받았어요. 청마의 마지막 추천 시인이 된 셈이지요.

장 _ 선생님 시의 바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김 _ 거의 40년 넘게 시를 써오다 보니 제 시도 조금씩 변하는 걸 느낍니다. 초기에는 농촌 서정을 바탕으로 한 시가 주를 이루었어요. 1970년대에는 사회 현실을 바라보는 시를 썼는데, 주로 비판적 시각으로 현실의 부조리를 까발리는 시를 썼습니다. 1980년대에 직장 때문에 부산으로 이사했는데, 이때부터 도시 서민의 일상적인 애환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를 쓰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모든 제 시의 본령에는 서정이 짙게 깔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잘 알다시피 시는 언어를 매개의 도구로 사용하여 소통하는 문학의 한 갈래이며, 서정의 힘이 이 언어적 요소인 의미에 기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현대시가 태어난 지 1세기가 흐르면서 여러 가지 갈래이름을 부여받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데요, 저는 시의 근본은 서정이며 지금 우리 시단의 주류는 서정시라고 생각합니다.

장 _ 시인과 교직생활을 오랫동안 병행하신 걸로 압니다. 어땠나요, 힘들지는 않았습니까?

김 _ 지난번 부산문인협회에서 주관하는 제28회 영광문학토론회에서도 같은 질문이 나와서 이미 밝힌 바 있지만, 저는 시인의 삶과 교직이 두 개의 바퀴를 굴리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늘 균형을 갖추고 잘 굴리는 일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시도 쓰고 교직 생활도 했습니다. 단언하건대, 저는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한 적이 없습니다. 그만큼 두 가지 일에 충실했고 또 지금 후회도 없어요.

교직을 그만 둔 지금 이제 바퀴가 하나만 남은 셈인데, 한쪽 바퀴가 빠진 수레가 아니라 한쪽으로 돌아가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요즘의 제 삶은 한쪽으로만 돌아가는 팽이와 같다고 생각해요. 비록 팽이처럼 돌지만 동력을 잃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있습니다. 잘 알다시피 팽이는 넘어지려고 하면 채를 휘둘러 쳐야 하지요. 넘어지지 않을 때까지 세게 쳐야만 팽이는 돌아가면서 제 역할을 합니다. 지금 저는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저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열심히 팽이를 돌리고 있습니다. 그 채찍질이 시 쓰기라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이틀에 한 편씩 쓴다는 각오로 시를 씁니다.  

장 _ 시도 많이 쓰셨지만 시집을 여러 권 내신 걸로 압니다. 시집, 시비, 수상 등에 관한 것을 엮어서 말씀 좀 해 주시지요.

김 _ 펴낸 시집이 서른 권이 넘었군요. 제가 낸 시집이지만 제목도 다 기억하지 못해요. 1967년 첫 시집 『파수병把守兵』을 낸 뒤 최근 펴낸 서른한 번째 시집 『냇가에 앉아』까지 거의 1년 반 정도 간격을 두고 시집을 상재했습니다. 다작에 대한 제 소견은 흔들림이 없습니다.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입니다. 뭐니뭐니 해도 시인은 시를 써야 합니다. 십 년 만에 시집을 냈다느니, 또는 그보다 더 오랜 시간 침묵하다가 시집을 냈다고 해서 뉴스가 되는 걸 보았는데 참으로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다작이 다 잘하는 일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시인은 끊임없이 시를 써야 합니다. 올해 펴낸 『냇가에 앉아』는 칠순 기념으로 고향친구들이 내 주었어요. 시비 제막식에서 출판기념회를 겸했습니다. 그 뒤로도 발표한 시가 책으로 묶지 않은 것이 거의 시집 4권 분량이 모였어요.

제 고향은 경남 함양인데 고향의 친구(최동열 등)들이 고향 땅에 시비를 건립하겠다는 연락을 해서 극구 사양했어요. 평소에 생존 시인의 시비를 세우는 것에 대해 별로 탐탁하지 않게 여겼고 또 제 시비를 세우는 일이 마땅치 않아서 반대하고 만류했어요. 그랬더니 제 개인의 시적 성취를 기려서라기보다는 친구들이 “고향을 위해서 마땅히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니 잠자코 있으라”면서 제게는 이러쿵저러쿵 토를 달지 말라는 거예요. 본인은 모른 척 해 달라고 어찌나 해쌓는지 끝까지 거부할 수 없어서 그냥 내버려두었습니다. 제 시비는, 고향 함양 하림공원에 있는 것은 시비 제막식에 참석했기 때문에 제가 잘 아는 것이고, 저 모르는 곳에도 시비가 있다는 것을 인터넷을 통해 알고 지인이 알려주어서 알았어요. 목포해양대학(전남 목포시 죽교동)에도 있고, 부산시 부산진구 양정2동 주민자치센터 근처 쌈지공원인 양정동 양지골공원(동의의료원 후문 부근)에도 있다고 하는군요. 저는 그 시비를 아직 보지는 못했습니다.

1974년에 낸 시집 『풀잎』(현대문학사) 이후 시인으로서 인지도가 높아졌습니다. 이 시집으로 제 나이 30대 초반에 경상남도문화상을 탔습니다. 이어서 『저녁 혹은 패주자의 퇴로』(현대문학사, 1985년)로 현대문학상을 탔는데 당시 지방 시인으로서는 드문 일이었어요. 2003년 『훈풍에게』(빛남)로 윤동주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장 _ 요즘 시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김 _ 개성이 잘 드러나고 다양한 시적 시도를 하는 것은 나무랄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다만 소통이 안 되는 현상을 참 안타깝게 생각해요. 사람들의 예술관이 다들 다르기 때문에 어떨지 모르지만 시도 예술이기에 저는 전달되는 메시지가 중요하고 아울러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는 느낌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감정에 갇혀 있는 시, 전달이 안 되는 시가 넘쳐나고 있는 요즘 시단의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시를 읽지 않는 현실의 책임은 시각에 따라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시인에게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도무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는 시가 무척 많아요. 40년 시를 쓴 제가 모르는 시라면 일반 독자들은 더더욱 잘 알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장 _ 젊은 시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한 마디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김 _ 시인으로서의 위의를 지녀야 하고 기본을 잘 다져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시는 언어예술이므로 시어를 구사하고 운용하는 솜씨를 갈고 닦아야 해요. 시어는 장식적인 것이 아니라 진솔하고 정확한 것이어야 하며, 견고하고 명징한 시란 가장 또렷한 언어로 발언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물이나 감정을 시적으로 형상화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며, 시적 긴장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고 진한 시의 향기가 묻어나기까지 충분한 숙성과 발효의 시간을 가진 뒤에 시를 썼으면 좋겠습니다. 시인은 선택받은 사람이에요. 시인으로서 긍지를 지니고 시 쓰는 일에 정진하시길 바랍니다.

장 _ 오랜 시간 동안 좋은 말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생전에 만 편의 시를 쓰겠다고 다짐하시는 선생님의 좋은 뜻이 독자들에게나 시인들, 특히 젊은 시인들에게 자양분이 되기를 바라면서 이 자리를 마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글 장영희/시인,문학박사

작성자
예술부산 2010년 9/10월호
작성일자
2012-06-26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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