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이야기 춤으로 빚는 영원한 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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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마한 체구에서 쏟아져 나오는 격정적 춤사위. 때론 을숙도 앞에서 천천히 숨을 고르는 낙동강 물살처럼 다분히 서정적인 춤동작. 발레에 바탕을 두고 현대적인 테크닉으로 형상화하는 현대무용이지만 그 현대 속에는 토속적인 부산 이야기가 묻어납니다. 한국 여인의 해묵은 심성이 흠씬 피어오르고, ‘순수’를 지향하는 정체성 속에서 때론 절제되고, 때론 자유분방한 고전무용이 살짝 오버랩 됩니다.그가 춤을 통해 풀어내는 ‘현대’는 아이러니하게도 역사적인 것, 그 중에서도 부산의 토속신앙 같은 것에 뿌리가 닿아 있습니다. 한국인의 토속정서에 바탕해 현대적인 테크닉으로 형상화하는 춤 작업. 영도 봉래산의 ‘삼신할매’가 등장하고, 을숙도의 ‘사랑가’가 녹아 있는 부산의 현대춤입니다.
오랜 세월 부산을 지켜오는 현대춤꾼이자 동아대 무용학과 교수인 장정윤(57). 그가 풀어내는 춤사위가 그러합니다. 직접 무대를 누비는 무용수로, 작품을 기획하고 안무하며, 탄탄한 이론을 갖추고 제자를 길러내는 일까지, 그에게 춤은 생활이자, 종교요, 든든한 남편 같은 존재입니다. 세계적인 현대춤의 흐름을 잡아내고, 맥과 혼을 짚어가며 부산의 현대춤판을 지키고 살아오는 부산 춤의 지킴이, 부산의 예인으로 손색이 없지요.그는 자신이 추고 싶은 춤을 춥니다. 간혹 관객이 선호하는 춤, 세태가 요구하는 춤을 따라가느라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춤꾼들이 있지만 그는 철저하게 자신이 추구하는 춤의 텍스트를 좇아 자신이 추고 싶은 춤을 춥니다. 그의 춤 화두는 ‘순수’에 닿아 있습니다. ‘본질’,‘순수’라는 말을 곧잘 씁니다.
“현대춤이든, 전통춤이든, 탈장르와 융합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춤의 정체성을 확실히 다지지 않고 섣부르게 뒤섞어 버리면 본질이 먹히거나 묻히고 맙니다. 순수무용은 막 섞어내는 퓨전이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라도 춤이 중심이고, 제 자신이 중심이 되어, 무용의 자체 본질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부산무용제에서 한 번도 힘들다는 대상을 3차례나 수상했고, 전국무용제에서 은상과 우수상을 내리 받았으며, 연기상도 2차례나 거머쥐었습니다. 1999년엔 국제현대무용협의회가 주는 코파나스상도 받았습니다. 안무가, 이론가, 춤꾼으로서 우리나라 현대무용계 최고 경지에 올라있는 셈이지요.
“그 어떤 순간에도 춤과 동떨어진 생각을 해보거나, 떨쳐내고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춤과 결혼해 춤과 함께 한 생활이 40년을 넘었으니, 춤은 자연스레 친구가 되었고, 생활이 된 거지요. 장정윤 하면 현대무용가를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는 아마도 그런 것이겠죠.”어린 시절 부모님은 재롱삼아 무용학원에 보냈습니다. 한복을 입고 덩실덩실 한국춤을 췄습니다. 학교에도 가기 전의 일입니다. 어쭙잖게 시작한 춤이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가서도 ‘춤바람’은 끝나지 않았고 중학교에 가면서 장르를 바꿨습니다. 발레를 배우기 시작한 것이죠. 처음 무용학원에 보냈던 부모님은 이제 더 춤을 추지 못하게 했습니다. 공부를 하라는 것이었죠. 그럴수록 춤을 춰야겠다는 의지가 더 생겨났습니다. 중·고교를 다니며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상을 탔고 부모님의 반대는 차츰 누그러졌습니다. 상의 힘이 컸던 것입니다.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대입을 앞두고는 학교와 갈등이 심했습니다. 학교에서 무용학과 원서를 못써주겠다는 것이었죠. 공부를 열심히 했던 게 화근. 줄곧 상위권 성적을 유지했기에, 학교에서는 학교 체면 살리기와, 외부에 내세우기 위해 일류대학의 ‘번듯한’ 학과에 원서를 쓸 것을 종용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이화여대 무용과에 입학했습니다.
“대학 3학년 때 미국으로 갔어요. 외국에 나가 발레를 좀 더 체계적으로 배우고 싶다는 욕심으로 미국 죠프리발레학교에 들어가 2년을 배웠습니다. 처음엔 절망이었죠. 아, 그동안 잘못 배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발레는 대단히 과학적인 운동입니다. 과학적으로 배워야 했는데, 그렇지 못해서 오히려 몸을 망쳤던 겁니다. 제대로 못 배우면 신체구조가 비뚤어 틀어집니다. 다 커서 몸을 제대로 잡으려면 너무 힘듭니다.”
그는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UCLA 대학원을 마쳤습니다. 서울에서 태어난 ‘서울내기’가 부산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84년. UCLA 대학원을 졸업, 석사과정을 마치자마자 신문에 난 동아대 교수 공채를 보고 응시, 전격 교수로 채용됐습니다. 동아대에 무용학과가 생긴 이듬해였습니다.
교수로 부임한 그는 지역의 현대무용 발전을 위해 젊음을 불태우자고 스스로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그는 1990년 ‘로고현대무용단’을 창단했습니다. 자신이 길러낸 제자들을 규합, 춤판을 벌여준 것. 말 그대로 산파역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는 이 무용단의 예술감독을 맡고 있습니다. 지난 6월 창단 20주년 공연도 펼쳤습니다. 이 동인춤패는 부산 춤판의 기폭제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습니다.그는 30년 가깝게 쉼 없는 활동을 펼치며 매년 동인춤판과 개인공연을 통해 춤 언어 개발에 힘써 오고 있습니다. 활발한 공연으로 춤의 저변확대에도 노력했습니다. 최근 들어서는 부산이야기를 춤으로 엮어내는 데 역량을 쏟고 있습니다.
“동아대에서 내려다보이는 을숙도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그걸 ‘을숙도 사랑가’라는 춤으로 기획했습니다. 영도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는 영도의 매력에도 흠뻑 빠졌습니다.”그는 봉래산 설화를 배경으로 춤을 만들었습니다. 삼신할매가 등장하고, 절영도가 나옵니다.
‘수선(물의 신선)으로 가는 문’ 같은 작품의 안무도 맡았지요.
“부산에 부산을 내세울 만한 이야깃거리가 참 많아요. 부산의 이야기를 논문으로 쓰고, 춤 작품으로 엮고 있습니다. 얼마든지 한국무용 콘텐츠로도 쓸 수 있는 소재들입니다. 잘 다듬어서 외국에 내놓으면 부산을 대표하는 춤 아이콘이 될 수도 있겠다 싶어요.”
춤에 대한 그의 열정은 세월도 비껴갈 정도입니다. 현역 무용수에서 물러설 만한 나이임에도 그는 아직 배움에 대한 끈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작품 ‘척건탁견’을 기획·안무할 때는 직접 태껸을 배우면서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태껸 1단 단증도 땄고. 몇 년 전에는 부산의 원로 전통춤꾼 김진홍 선생을 찾아가 반년에 걸쳐 ‘승무’를 배웠습니다. 승무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북춤도 소화했습니다.
그에겐 꼭 해보고 싶은 춤판이 있다고 합니다.“기회가 되면 한국무용 전공자들과 의기투합해 현대무용을 해보고 싶습니다. 우리 전통춤 색깔로 현대무용의 테크닉이나 춤사위를 소화해내면 아주 멋진 콘텐츠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가장 한국적인 한국춤 텍스트를 가지고 현대무용을 접목하면 고유한 우리 것이 나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제 역할요? 제작자도 좋고, 안무가도 좋고, 춤꾼 역할도 좋습니다.”
그는 오늘도 춤을 춥니다. 하루 3시간은 그가 정해 놓은 마지노선.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냅니다. 1년에 한차례, 지금까지 빠짐없이 24년째 개인춤판을 열어오고 있는 것도 그런 맥락입니다. 그는, 천상 타고난 춤꾼입니다.
- 작성자
- 박재관
- 작성일자
- 2010-11-03
- 자료출처
- 부산이라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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