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첫 양복점 ‘국정사’ 100년 전통 꼭 만들 것”
2005년 ‘대한민국 양복 명장’…2020년 ‘백년소공인’ 선정
“양복 한 벌, 한땀 한땀 1만2천 번 바느질”
1946년 설립, 부산 첫 양복점 ‘국정사’ 대표
- 내용
△양창선 양복 명장이 대표로 있는 국정사는 지난해 12월 정부(중소벤처기업부)가 선정한
‘백년소공인’에 이름을 올렸다. 양 명장은 국내 양복업 발전에 이바지한 공을 인정받아 2005년
정부로부터 대한민국 양복 명장에 선정됐다. - 출처 및 제공 : 권성훈
□부산의 인물 _ 양창선 양복 명장
얼굴에는 삶의 궤적이 그려져 있다. 손에도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손에 박힌 굳은살은 무슨 일을 해 왔고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짐작하게 한다. 부산을 대표하는 양복 명장 양창선(72) 국정사 대표. 50여 년 이상 양복업 한길을 걸어온 그의 손은 오랜 바느질과 재봉틀질로 울퉁불퉁하고 손가락 마디마디는 심하게 휘었다. 하지만 그의 손은 누구보다 멋있고 아름다우며 살아온 세월을 말해주는 ‘훈장’과도 같다. 그 자신은 오늘의 그를 있게 해준 손이 참으로 고맙고 자랑스럽다.
2005년 대한민국 양복 명장 선정
“기성복이 보편화됐지만 맞춤 양복을 따라올 수는 없어요. 맞춤 양복은 몸의 치수를 일일이 재어서 만들기 때문에 입었지만 입지 않은 듯한 편안함과 품격, 여기에 자기 만족감까지 느낄 수 있어요.”
양창선 양복 명장의 맞춤 양복에 대한 지론이자 철학이다. 양 명장이 대표로 있는 국정사(부산시 해운대구 중동 파라다이스호텔 신관 지하 1층)는 지난해 12월 정부(중소벤처기업부)가 선정한 ‘백년소공인’에 이름을 올렸다. 백년소공인은 전국의 소공인 가운데 정부가 엄격한 심사와 평가를 통해 빠르게 변화하는 제조환경 속에도 숙련된 기술력으로 장인정신을 지키며 향후 100년 이상을 이어갈 성장 가능성을 인정한 곳이다. 양 명장이 지난 2005년 '대한민국 양복 명장'으로 선정된 이후 또 한 번의 쾌거이다.
양 명장은 최고 수준의 양복 제작 기술력과 ‘원 타임 시스템’(One Time System : 몸 치수 재는 것부터 가봉까지 한 자리에서 원스톱 제작. 제작 공정을 대폭 단축하고 ‘양복창작 시뮬레이션’을 통해 주문 단계에서 고객이 완성된 옷을 미리 보고 느낄 수 있는 시스템) 기법을 개발해 국내 양복업 발전에 이바지한 공을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대한민국 양복 명장에 선정됐다. 실제로 그는 한국남성복기술경진대회서 12차례나 수상하는 등 우리나라 맞춤 양복업계 최고 장인으로 통한다.
부산 최초 양복점 ‘국정사’ 백년소공인 우뚝
양 명장이 대표로 있는 ‘국정사’는 1946년 부산 동구 범일동 옛 조선방직 인근에 ‘태양피복사’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광복 이전 지역 내 양복점은 일본인 재단사가 운영하는 곳뿐이었다. 국정사는 부산에 처음으로 생긴 양복점이다. 국정사 설립자 김필곤 선생은 일제강점기 쵸지아 양복점과 미나카이백화점 부산지점에서 조선인 최초 재단사로 일했다.
‘태양피복사’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나라가 바로 서야 한다’는 의미를 담아 국정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바른 옷을 만들겠다’는 의지도 함께 담은 것이다. 양 명장은 국정사를 1981년 인수해 “국정사를 100년 넘는 가게로 만들어 달라”는 김필곤 선생의 유지를 꿋꿋하게 이어가고 있다.
△"기성복이 보편화됐지만 맞춤 양복을 따라올 수는 없어요. 맞춤 양복은 몸의 치수를 일일이 재어서 만들기 때문에 입었지만
입지 않은 듯한 편안함과 품격, 여기에 자기 만족감까지 느낄 수 있어요.” - 출처 및 제공 : 권성훈
운명처럼 마주한 양복업
양 명장의 고향은 제주도이다. 집안 형편은 넉넉하지 않았고 7남매 가운데 넷째인 그는 자신의 인생 항로를 스스로 개척해야 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1966년, 18살의 푸른 청춘은 무작정 부산행 배에 올라 뭍으로 건너왔다. 부모 형제와 의논조차 없었다. ‘제대로 된 기술을 배워야 굶지 않고 대접받으며 살아갈 수 있다’는 부친의 평소 말씀이 그가 가진 전부였다.
부산항에 첫발을 내리고 보니 남포동과 중앙동의 휘황찬란한 양복점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당시 이 일대는 300여 곳 이상 양복점이 영업 중일 정도로 한창 호황을 누리던 때였다. 몇 곳의 문을 두드렸지만 찾아가는 양복점마다 문전박대를 당했다.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포기할 수도 없었다.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이른 아침, 양복점이 문을 열기 전 청소를 도와주고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양복점 사장 눈에 띄어 마침내 일을 배워 보라는 허락을 받아냈다.
평생 스승 김필곤 선생과의 인연
청년 양창선은 누구보다 근면 성실했다. 이른 새벽 가게 문을 열고 저녁 늦게 문을 닫는 것은 언제나 그의 몫이었다. 모든 기술자가 퇴근한 후 공방에 홀로 남아 밤늦은 시간까지 양복 만드는 기술을 익혔다. 누구보다 성실했지만 기술 습득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양복 만드는 일이 도급제 방식이다 보니 다른 사람이 일감을 맡으면 자신의 몫이 줄어들어 웬만해서는 기술을 알려주지 않았다. 선배들 어깨너머로 배우는 기회가 전부였다. 하지만 누구를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고 묵묵히 기술을 하나둘씩 익혀나갔다. 양복 기술자로 이름이 알려질 무렵 평생의 스승이자 국정사 대표인 김필곤 선생을 만나 인연을 맺었다. 스승은 누구보다 열심인 그에게 자신의 모든 기술을 아낌없이 가르쳐주었다.
“보통 재단 기술은 잘 알려주지 않습니다. 훌륭한 스승 밑에서 최고의 기술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1981년 연로한 스승이 가게를 접어야겠다고 이야기했고, 국정사 철학을 이어갈 적임자로 자연스레 양 명장이 떠올랐다.
“호사다마라고 해야 할지, 국정사 승계 후 4개월 만에 큰 화재가 발생해 가게 전체가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천막을 치고 6개월 동안 임시영업을 했고, 하루라도 빨리 재기하려고 발버둥을 치다 보니 건강이 나빠져 오랜 시간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어요.”
다행히 평소 그의 능력과 노력을 눈여겨본 단골손님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위기는 또 한 번 찾아왔다. 어느 정도 가게가 안정을 찾을 무렵인 1980년대 후반부터 대기업이 기성복 시장에 진출하면서 맞춤 양복업계에 위기가 찾아들었다. 대규모 시설에서 대량으로 공급하는 기성복과는 가격 경쟁이 애초부터 될 수 없었다. 선후배를 비롯한 많은 기술자가 전직했고 맞춤 양복은 사양 산업으로 내리막길을 걸었다. 하지만 양 명장의 생각은 달랐다.
△양 명장이 가장 아끼는 보물 1호는 1천500여 명이 넘는 고객 명단이다. - 출처 및 제공 : 권성훈
보물 1호 ‘1천500명’ 고객 명단
“당시 양복업을 사양 산업 취급했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고 확신했어요. 맞춤 양복은 기성복이 흉내 내거나 따라올 수 없는 멋과 품격이 있어요, 가격이 다소 부담스럽다고 하지만 제대로 만들어 내면 평생 고객을 만날 수 있어요. 실제로 한 단골이 결혼을 앞둔 손자와 찾아와 ‘나와 너의 아버지가 장가갈 때 이곳에서 옷을 맞췄고, 네가 옷을 맞춘다’고 말씀할 때 큰 보람을 느꼈어요.”
양 명장이 가장 아끼는 보물 1호는 1천500여 명이 넘는 고객 명단이다. 몇십 년째 그의 손을 거친 맞춤 양복만 고집하는 충성고객도 적지 않다.
양 명장은 후진 양성에도 열정적이다. 자신은 힘들게 기술을 익혔지만 후배들에게는 최고의 양복 기술을 아낌없이 전수해 주고 있다. 국정사는 양복 부문 국내외 기능대회에서 숱한 금메달리스트를 배출했다. 양 명장에게서 기술을 배워 독립한 후배 대부분은 양복업계에서 높은 평가와 대우를 받는다.
사회봉사 활동도 열심이다. 장기재소자들에게 양복 기술을 가르쳐 그들의 삶이 더는 다른 방향으로 나가지 않도록 돕고 있다. 장애인 대상 교육도 활발하다. 장애인들은 상대적으로 집중력이 뛰어나고 이직률이 낮아 양복 제작 기술을 익히기에 더없이 적합하다.
△양창선 명장이 대표로 있는 부산 최초 양복점 국정사는 100년 양복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가능성은 무척이나 희망적이다.
양 명장의 아들 필석(사진 오른쪽) 씨가 누구보다 열심히 양복점 일을 도우며 아버지의 뒤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 출처 및 제공 : 권성훈
“100년 양복점 희망 보다”
75년이 넘는 연륜의 부산 최초 양복점 국정사는 100년 양복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가능성은 무척이나 희망적이다. 양 명장의 아들 필석(40) 씨가 누구보다 열심히 양복점 일을 도우며 아버지의 뒤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필석 씨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가게에서 뒹굴며 자랐다. 대학에서는 시각디자인과 패션디자인을 전공했다. 2005년 (사)한국맞춤양복협회가 개최한 맞춤 양복 경진대회에서 우수상을 받는 등 실력도 탄탄하다. 필석 씨의 꿈도 국정사가 100년 양복점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후계자로 안성맞춤이다.
양복은 상·하의 한 벌을 만드는데 1만2천 번의 땀(바느질)이 들어간다. 한 벌의 양복이 완성되는 데는 60시간 이상 장인의 손길이 필요하다. 최고의 반열에 오른 지금도 양창선 명장은 오늘의 그를 있게 해준 '훈장'같은 손으로 직접 옷을 만든다.
- 작성자
- 조민제
- 작성일자
- 2021-01-28
- 자료출처
- 부산이라좋다
-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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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이라좋다 제202103호
-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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