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눈썰미로 조곤조곤 읊어주는 ‘오늘’
부산의 책 - 김성배 첫 시집 ‘오늘이 달린다’
- 내용
김성배 시인의 첫 시집 ‘오늘이 달린다’가 모악시인선 열 번째 시집으로 세상에 나왔다.
김성배는 부산지역에서 조금 유별난 시인이다. ‘문화계의 마당달’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부산의 문화판을 구석구석 훑고 다니는 문화기획자이자 출판사 대표이자 소극장 극장장이다. 그가 등단시인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졌지만, 24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바쁘게 살고 있는 그가 시를 쓰리라고 생각한 이들은 드물었다. 분초를 쪼개어 일하는 그의 왕성한 활동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시집을 냈다. 도대체 이 부지런한 남자는 언제 시를 썼을까? 발바닥으로 부산 문화판을 헤집고 다녔던 저력은 어떤 시어를 탄생시켰을까? 못내 궁금하다.
모악시인선이 열 번째로 펴낸 ’오늘이 달린다’는, 부산지역에서 오랫동안 문화 활동을 해온 김성배 시인의 첫 시집이다. 모든 시인의 첫 시집은 특별하지만, 이 시집이 더욱 각별한 이유는 ‘과연 우리의 삶이 이렇게 투명해도 될까?’라는 물음을 던져주기 때문이다. 시집 ’오늘이 달린다’를 읽다보면, 어느 순간 우리들 삶의 풍경이 투명한 꿈처럼 선명해진다. 오래 전 떠나온 삶의 장소와 그곳에 대한 기억들이 어제 일처럼 뚜렷해진다.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 연결된 감정의 흐름이 보이고, 감추어둔 욕망의 밑바닥까지 훤히 들여다보인다. 우리가 오래 뒤척여왔던 삶의 비밀을 시인은 조곤조곤 읊어주고 있다.
’오늘이 달린다’에 수록된 56편의 시에서는 삶의 심연이 보인다. 그로 인해 삶의 깊이와 생활의 친연성 사이의 거리감이 무시되기도 한다. 이쯤일 것이다, 라고 짐작하고 발을 내딛었으나 하염없이 허공 속으로 빨려드는 순간처럼, 혹은 그 반대의 경우처럼. 시집에 실린 시편들은 삶을 수식하거나 왜곡하지 않는 대신 투명해진 삶을 보여줌으로써 문학적 착시 현상을 선사한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감각을 동원하여 반복되는 우리의 일상이 왜 특별한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시집 ’오늘이 달린다’는 철저히 ‘오늘’을 사는(달리는) 사람들의 호흡을 담아낸다. ‘오늘’은 지나간 시간도 아니고 다가올 시간도 아니다. 오늘은, 삶이 살아있는 순간이며, 어떤 비애나 연민에도 오염되지 않은 시간이다. 때문에 김성배 시인은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하는 삶이 아니라, 스스로 어떤 것이 되는 삶을 그려낸다. 그러한 삶은 사유하는 삶이 아니라 생활하는 삶, 성찰하는 삶이 아니라 행동하는 삶, 돌아보는 삶이 아니라 진격하는 삶이다.
주공아파트 입구 기둥 벽을 끼고 종이상자로 만든 노점 과일집은 정원이다//주름진 앞치마가 싱싱한 낯빛으로 먼지를 털고 화단의 물을 뿜는다/좌판은 또래 상자에 놓인 계절의 씨앗을 널고 있다/낯익은 과일에 뾰드득 뾰드득 장갑으로 씻은 가격이 몸통을 쌓고 있다/얼음골사과와 서생배, 진영단감과 서귀포감귤 줄지어 고개를 내민다/어깨를 들추며 늦가을 볕에 시큼한 통증을 베어 먹은 단풍이 말을 붙인다//얼맙니까?//길 위의 물음이/베란다 바람에게/그 바람이 속삭이는 과일에게 옷을 입힌다/종이상자가 해넘이만큼 쌓이는 저녁, 가로등에 익는 계절을 흥정한 주인은/과일을 상자에 담고/옥상의 불빛을 덮는다//상자 속에 오늘 하루치의 종이를 세워 그 무게만큼 달빛을 세고 있다(‘과일가게’ 전문)
시 ‘과일가게’는 ‘오늘 하루치’의 ‘무게’를 ‘세’는 시다. 삶의 단위는 ‘오늘’이고, ‘오늘’의 ‘무게’는 곧 ‘오늘’의 삶이다. 삶은 오로지 ‘오늘’의 어깨에 올라설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나간 ‘오늘’인 어제나, 아직 오지 않은 ‘오늘’인 내일은 우리의 믿음 속에만 존재한다. 그러한 ‘오늘’의 삶에 의미를 얹어주는 것은 ‘달빛’처럼 빛나는 대목들이다. 모든 불투명했던 순간들은 ‘달빛’을 통과하면서 여과된다. 그렇게, 달빛 아래 드러난 투명함으로 인해 우리는 또 내일을 살아갈 용기를 얻는지도 모른다.
시인 김성배는 1964년 충남 조치원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성장했다. 2009년 시전문계간지 ‘시평’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도서출판 ‘해성’과 연극 소극장 한결아트홀을 운영하며 지역출판 및 문화예술교육을 위해 일하고 있다. 저서로 ‘문학을 찾아서 시비를 찾아서’가 있다.
- 작성자
- 김영주
- 작성일자
- 2018-01-24
- 자료출처
- 부산이라좋다
-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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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이라좋다 제1812호
-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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