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바로가기

다이내믹 부산 제1803호 전체기사보기

한 점 불빛 따라 온 생으로 쓴 루게릭병 7년의 기록

부산소설가협회장 등 지낸 정태규 소설가 새 책 화제
안구만 움직이는 전신마비 안구 마우스로 힘겹게 쓴 병상일기와 인생 찬가 수록

내용

■ 부산의 책|당신은 모를 것이다

기관절개술 이후 난 잎맥만 남기고 깨끗하게 갉아 먹힌 나뭇잎처럼 뼈만 앙상하게 남아 종일 침대에 누워 있는 신세가 됐다.

허리에는 위루관이, 목에는 구멍을 뚫어 연결한 호흡기의 호스가 늘어져 있다. 지지대에 고정시킨 모니터와 안구 마우스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여기저기 호스를 달고 누워 있는 내 모습은 마치 SF영화에 나오는 사이보그 같다. (정태규 ‘당신은 모를 것이다’ 105쪽)...



자신을 잎맥만 남기고 깨끗하게 갉아 먹힌 나뭇잎 같다고 말하는 사람, 한 발 더 나아가 사이보그 같다고 말하는 사람, 걷는 것은 고사하고 스스로의 힘으로는 숨조차 쉴 수 없는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패배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헤밍웨이의 말을 곱씹으며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끝까지 ‘완주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 그는 에세이도, 소설집도, 잠언집도 아닌 세상에 단 하나뿐인 책 ‘당신은 모를 것이다’를 쓴 정태규 작가다.


그는 부산의 소설가'였'다. 부산에서 학업을 마쳤고, 국어교사로 직장생활을 했다. 누님의 소개로 ‘하늘하늘한 벚꽃잎 같은 투명함’을 지닌 여인을 만나 혼인하고 두 아들을 낳고 키웠다. 또 부산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부산소설가협회 회장, 부산작가회의 회장 등을 맡아 부산문단을 위해 헌신했는가 하면 활발한 작품 활동으로 부산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로 사랑받았다. 


그는 부산의 산과 바다와 함께 삶을 일군 부산사람이었고, 부산작가였다. 그런 그를 ‘부산의 소설가였다’라는 과거형으로 쓴 이유는 그가 지금은 부산을 떠나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산을 떠난 이유가 기막히다. 바로 병 때문이다. 


정태규 소설가는 지상에서 가장 가혹하다는 루게릭병에 걸려 7년째 투병중이다. 10만 명 중에 한 두 명이 걸린다는 천형같은 희귀병은 게릴라처럼 찾아왔다. 출근 준비를 하던 어느 가을 아침 와이셔츠 단추를 잠그지 못했다. 그 후로 점점 팔다리에 힘이 없어지고, 가벼운 물건조차 들지 못하고, 길을 걷다 푹 쓰러지는 일들을 겪었다. 그 원인을 찾아 여러 병원을 전전하다 1년여 만에 자신이 굳어가고 있다는 것을, 신문에서나 보던 루게릭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았다. 


온몸이 화석처럼 굳어가는 병, 루게릭병 발병을 확인한 순간 그의 운명은 그 자리에서 꺼지는 듯했으리라. 가혹한 운명을 탓하기도 했지만 곧 새로운 삶의 질서를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병이 날로 깊어가는 과정에서도 자신에게 구원과도 같은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제 그는 전신이 마비되어 먹지도, 말하지도 못하며 호흡기를 달고 숨을 쉰다. 두 눈을 깜빡이는 것 말고는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아직 깜빡일 수 있는 두 눈으로 ‘안구 마우스’라는 장치에 의지해 글을 쓰고 세상과 소통하며 죽음의 문턱에서 깨달은 생의 기쁨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게 책에서 밝히는 대략적인 소개다.


책 중간 중간에 나오지만, 안구 마우스로 글을 쓰는 것은 만만치 않은 노동이라고 한다. 사용 초기에는 한 줄의 문장을 쓰고 나면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됐다고 했다. 아무리 익숙해졌다지만 지금도 모니터 위의 한 점 빛을 찾아 눈을 껌뻑이며 글을 쓰는 행위는 가혹하고 숭고하다. 육신의 감옥에 갇히면서 세상과의 소통은 절박해졌다. 작가인 그에게 글쓰기는 세상과 만나는 단 하나의 허락된 길이었다. 스스로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라고 칭하는 안구 마우스를 통해 그는 세상과 만나고, 인간으로서, 작가로서의 존엄을 매순간 확인한다. 그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움직이지 않는 온몸으로 거대한 지구를 미는 것이나 다름없으리라. 그 가혹한 노동을 이겨내고 세상에 나온 책이 ‘당신은 모를 것이다’이다. 

 

책에 수록된 김덕기 화가의 ‘가족’ 그림은 정태규 작가의 간절한 소망을 상징한다.
▲책에 수록된 김덕기 화가의 ‘가족’ 그림은 정태규 작가의 간절한 소망을 상징한다. 

 

이 책은 단순한 책이 아니다. 한 인간이 생의 끄트머리에 서서 죽음과 마주하며 시커먼 죽음의 아가리를 향해 부르는 찬란하고 경이로운 생의 찬가다. 그래서 이 책은 에세이도, 소설집도, 잠언집도 아닌 지상에 하나뿐인 ‘정태규의 책’으로 불리어도 부족하지 않으리라.


책은 저릿하게 심장을 파고든다. '내가 걸린 병 때문에 할 수 '없는' 일들로 괴로워하기보다는 지금이라도 할 수 '있는' 일들을 시도해보자고 나 자신을 다독였다'는 그는 발병 이후부터 병을 받아들이기까지의 과정, 투병 과정, 여전히 이글거리는 문학에의 갈망, 가족과 친구, 동료 문인들과의 관계 등을 담담하고 유쾌하게 기록한다. 그의 유쾌함은 숱한 좌절과 눈물 끝에 도달한 것이어서 숭고하고 서늘하다. 

호흡기를 떼면 얼마 후 숨이 끊어진다는 정태규 작가에게 생은 ‘타인’이다. 죽음의 문턱을 두 발을 걸치고 있는 작가는 자신의 생명을 이어주고 있는 타인을 향해 지극한 사랑과 연대와 감사를 말한다. 7년동안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아내 ‘백여사’와 두 아들에 대한 감사와 애정은 깊고 지극하다. 아내를 부르는 호칭인 ‘여보’를 한결같은 보석이라 해석하며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애정을 고백하는 대목에서는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존엄을 지키기 위해 기저귀 사용을 거부한 그를 위해 배변을 돕고 있는 아들들에 대한 감사에서는 코끝이 찡해진다. 


‘당신은 모를 것이다’는 어느 날 죽음 가까이 불려간 한 인간의 위대한 투쟁의 기록이자 연대와 사랑과 소통의 기록이기도 하다. 발병 후 3~5년 만에 사망한다는 루게릭병과 7년째 투병할 수 있었던 힘의 근원을 가족과 자신을 아껴준 독자와 주변에 돌리는 작가는 자신을 가둔 암벽처럼 단단한 육신의 감옥을 뚫고 우리가 알 수 없는 새로운 영토를 열었다. 그가 전 생을 바쳐 도달한 새로운 영토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당신은 모를 것이다’를 일독해야 한다. 책에 수록된 김덕기 작가의 그림은 정태규 소설가가 간절하게 원하지만 결코 닿을 수 없는 이상향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이상향은 그가 찾아낸 지상의 마지막 방 한 칸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위대한 한 인간에게 바치는 가장 작은 경의이다. 그러나 이 작고 사소한 것들의 힘이 작가를 일으켜 세울 것이다. 


나는 그가 기적처럼 일어나 그를 키운 부산으로 다시 돌아오기를 바란다. 정태규 소설가는 지금도 여전히 부산의 소설가이고, 우리가 지키고 보듬어야 할 보배다. 정태규 소설가의 완주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마음서재 펴냄.

 

정태규 작가 ‘당신은 모를 것이다’.
▲정태규 작가 ‘당신은 모를 것이다’. 

작성자
김영주
작성일자
2017-11-22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부산이라좋다 제1803호

첨부파일
부산이라좋다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이전글 다음글

페이지만족도

페이지만족도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만족하십니까?

평균 : 0참여 : 0

댓글은 자유로운 의견 공유를 위한 장이므로 부산시에 대한 신고, 제안, 건의 등 답변이나 개선이 필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부산민원 120 - 민원신청 을 이용해 주시고, 내용 입력시 주민등록번호, 연락처 등 개인정보가 노출되지 않도록 주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상업광고, 저속한 표현, 정치적 내용, 개인정보 노출 등은 별도의 통보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부산민원 120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