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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가 내렸다

쿨부산 스토리텔링 공모전 - 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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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는 너무 더웠다. 하루 종일을 선풍기 앞에서 보내던 그 무더운 여름을 보내고 나니 촉촉이 땅을 적시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어쩐 일인지 그 흔한 장마도 없던 여름에 반가운 단비였다. 그렇게 온 땅을 시원하게 적시고 9월이 시작되었다. 톡톡 빗소리를 타고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잘 있어.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 몸을 일으켜 세웠다.

 생각을 정리해야 할 때면 곧 잘하던 버릇이다. 멀지 않은 곳을 예정 없이 떠나는 것. 운동화 끈을 고쳐 메고 우산을 집어 들었다. 빗방울을 조금씩 맞아가며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갔다. 요즘엔 좀처럼 찾지 않았지만 학창시절엔 자주 갔던 남포동을 가기로 했다. 남포동으로 가는 버스는 금방 도착했다. 정오의 버스는 에어컨공기로 가득했다. 맨 뒷자리에 자리하고 떨어지는 빗방울을 흐릿한 창문너머로 바라보다가 손가락을 들어 물음표를 그렸다. 왜? 그는 왜 그랬을까? 가는 내내 물음표가 가득했지만 아직은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달리던 차는 남포동에서 멈추었다. 버스에서 내리고 우산을 펼쳤다. 집 근처의 공기보다는 볼에 닿는 공기가 조금 차가웠다. 어디를 가볼까? 일단 발길이 닿는 곳으로 걸어보기로 했다. 정류장에서 신호등을 건너 직진만 계속하다 보니 너무나도 당연하게 BIFF광장이 나타났다. 영화인들의 축제라고 불리는 부산국제영화제가 시작하는 곳이다. 영화계의 거장들의 손 모습을 찍은 핸드 프린팅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걸었다. 그들의 손자국에서 영화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 길을 따라 걸어 고개를 들자 부산극장이 눈에 들어온다.

세계적인 영화축제의 도시 부산답게 남포동의 중심부에는 큰 극장이 두 개 자리하고 있다. 부산극장과 대영시네마가 두 주인공이다. 건물의 벽에는 상영 중인 영화의 화려한 대형 포스터가 배우들의 면면을 부각시키고 있었다. 그 중 부산극장은 내 어렸을 적 보다 더 나아가 부모님 어렸을 적으로 거슬러 가더라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부산의 오래된 영화관이다. 내가 첫 영화를 보았던 곳이다. 그 때의 영화 관람은 영화의 내용보다는 버터오징어 냄새, 고소한 팝콘의 향이 진동하던 것이 추억으로 자리 잡고 있다. 영화의 내용이 재미가 없어도 영화관의 분위기가 좋았던 그런 때였다. 이런 부산극장은 나에겐 추억의 영화관이기도 했지만 만남의 광장이기도 했다. 나 뿐만이 아니라 부산극장에서 지금 비를 피하고 있는 대부분 사람들도 그러할 것이리라. 그래서 그런지 비가 오는 날인데도 사람들이 조금 북적였다. 사람들의 표정은 기다림에 대한 설렘을 담고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짜증을 담고 있고 어떤 이들은 연인 혹은 친구를 만나 웃으며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졌다. 잠시 나도 우산을 접고 비를 피해 서있었다. 그들이 보는 내 얼굴은 어떤 얼굴일까? 심정을 그대로 담고 있다면 아무래도 복잡할 것이다. 고개를 돌리니 광장시장으로 가는 길이 보였다.

다시 우산을 펼치고 맛있고 고소한 향을 풍기는 빨간 파라솔들을 지나 광장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광장시장 쪽으로 들어가자 높게 쌓여있는 충무김밥의 긴 줄이 나를 맞이했다. 비가 오는 날인데도 비닐 천막을 임시로 달고 비빔당면, 충무김밥, 순대 등 먹거리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 사람들은 목욕탕의자에 쪼그려 앉아 수북하게 담겨오는 충무김밥과 아줌마의 인심 좋은 웃음을 접시에 한 가득 받아든다. 화려한 색을 뽐내며 펼쳐진 음식들을 신나게 바라보며 걷자 나를 붙잡는 어머니들의 목소리가 달콤하게 들렸다.

그 길로 계속해서 들어가다 보면 보세시장이 나온다. 요즘은 떡볶이 한 접시 사 먹을 수 없는, 단돈 천원에 옷을 살 수 있는 곳이다. 어릴 적에는 몇 개 없던 가게들이 요즘은 점점 늘어나고 가게 디자인 또한 화려한 색을 입고 있었다. 그 때는 몇몇 할머니들이나 아주머니들이 주로 보였다면 빈티지가 유행바람을 타기 시작하자 요즘 중고등학생들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복잡한 마음은 잠시 접어두고 보세시장을 둘러보기로 했다. 아까 광장시장을 지나오면서 봤던 목욕탕의자가 여기서도 요긴하게 쓰였다. 처음 이곳을 왔을 때 산처럼 쌓여있는 구제 옷을 보면서 이게 얼마나 내가 바라고 바라던 장면인가 싶었다. 옷이 산처럼 쌓여있다니! 그 때는 창피한 것도 모르고 그저 신나서 맨 밑에 있는 옷까지 헤집었다. 그 때의 기억에 웃음이나 나도 모르게 그 목욕탕 의자에 앉았다. 학생이라 용돈이 넉넉하지 않아 싸게 옷을 살 수 있어 신났던 그 때의 기분은 더 이상 느낄 수 없어 아쉬웠다. 이전에는 거의 목욕탕의자에서 옷을 고르던 곳이었는데 몇 년 사이 모습이 많이 바뀌어 못 보던 세련된 건물들이 많이 생겨났다. 빈티지하고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건물 안의 옷들은 그 날의 내가 몇 시간을 뒤져야 나올 수도, 아니면 가게 문이 닿을 때까지 뒤져도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옷들이 가지런하게 옷걸이에 걸려있었다. 주인언니는 하나하나 옷을 고르고 옷걸이에 걸고 다리미질을 했다. 손길이 분주했다. 가게 안은 벌써 가을, 겨울 옷이 나오고 있었다. 카디건이나 니트를 뒤적이며 마른 손으로 옷을 만지니 부드러운 실의 감촉이 느껴졌다. 아, 벌써 9월. 가을이구나. 그토록 무더운 여름날 내 마음을 온통 흔들어 놨던 사람을 생각하니 또 다시 마음이 먹먹해졌다. 여름이 아직 정리되지 않았는데 가을이 와버렸구나. 구제 시장을 다 둘러보고 좀 더 들어가 보기로 했다.

구제시장의 끝에 신호등을 건너면 보수동 책방골목이 나온다. 이 곳 또한 학생이었던 내가 보고 싶은 책을 좀 더 싸게 구입할 수 있었던 곳이다.

이전에 어머니와 어머니가 일하시던 곳에서 근무하시던 멋진 여의사선생님과 이 골목을 들린 적이 있었다. 무슨 책을 살까? 어린 날의 나는 책을 고르면서도 정신은 온통 병원 밖에서는 처음 보는 의사 선생님의 취향을 곁눈질하기 바빴다. 두꺼운 의학서적? 아니면 영어가 온통 섞여있는 책?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소설책을 고르실까? 신중하고 설레는 표정으로 책을 고르시던 의사선생님이 집은 책은 한 시간이면 읽어버릴 짧은 분량의 소설 몇 권이었다. 게다가 예쁜 일러스트까지 있는 꼭 동화같은 소설책이었다. 실망한 내 표정을 읽으신 선생님은 환하게 웃으시면서 말씀하셨다.

 ‘책은 어려운 걸 고르는 게 아니라 내가 읽었을 때 행복할 것 같은 걸 고르는 거야’ 너무 당연한 것인데 어려운 책을 이해해야 똑똑한 사람이라는 어린 생각에 신선한 충격을 주는 말이었다. 그 날의 기억이 담겨있는 책방골목은 여전히 그 모습을 담고 있었다.

행복한 책을 고르기 위해 돌아다니다 예쁜 책한 권을 구매했다. 책을 들고 읽을 곳을 찾다가 예전에 볼 수 없던 작고 아담한 카페를 발견했다. 딸랑. 안으로 들어가 어깨에 맺힌 물방울을 조금 털어낸 뒤 따뜻한 커피를 한 잔 주문하고 밖이 보이는 자리에 앉아 뻐근해진 다리를 풀었다. 통유리 밖은 책방골목의 풍경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빛 바랜 사진 같은 풍경에 멍하니 밖을 바라보다 커피가 나왔다는 말에 정신을 차렸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책을 펼쳤다. 책을 한참 읽다 한 페이지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다시 첫눈이 오는 날 만날 약속을 할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첫눈이 오는 날 만나고 싶은 사람, 단 한사람만 있었으면 좋겠다. 정호승의 《첫눈 오는 날 만나자》中 에서’ 이전 내 학창시절의 추억을 함께한 남포동에서 기억을 더듬다 거슬러 올라와 현재의 나에 도착하니 그가 크게 자리하고 있다. 역시 없었던 사람이 될 수는 없구나. 결국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아직 지우지 못한 번호로 문자를 보냈다. ‘첫눈이 오는 날 만나자.’ 비는 여전히 유리창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이 가을비가 끝이 나고 겨울이 오면 함박눈이 펑펑 내렸으면 좋겠다고. 오랫동안 많이 내리면 좋겠다고. 그 날 책방골목에 빛바랜 사진 속에는 그와 함께 첫눈을 맞이하는 모습을 담고 싶다. 그렇게 책을 덮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성자
변예리
작성일자
2013-11-25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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