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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청년들의 1박2일

쿨부산 스토리텔링 공모전 - 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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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부산국제영화제 구경가기로 한 것은 한 친구의 즉흥적인 생각이었다. 도서관에서만 얼굴을 가끔 보던 친구들이 같이 점심이라도 먹자고 모인 자리에서 엉뚱하기로 이름 난 친구 하나가 이렇게 있지 말고 머리도 식힐 겸 영화제에서 영화를 보고 오자고 했다. 도서관에서 PC만 붙잡고 있는다고 원서가 붙는 것도 아니고, 이제 우리가 쓸 원서는 다 썼으니 잠깐이나마 머리를 식히고 오자는 것이었다.

기차는 금요일 밤을 달려 새벽녘에 부산역에 우리 일행 다섯을 내려주었다. 정말 아무런 준비 없이 동네 마실 나오듯이 떠나온 우리들은 그제서야 영화제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화예매는 고사하고 무슨 영화가 어디서 하는지, 무슨 프로그램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고 떠나온 것이었다. 그저 골치 아픈 현실에서 잠시만이라도 떠나있고 싶다는 마음이 한때는 동경했던 영화라는 촉매제를 만나서 급속히 반응한 여행이었으니 무계획일 수밖에 없었다.

명색이 영화제 관람하겠다고 부산까지 내려온 것인데 영화제 프로그램도 한 번 못보고 서울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가장 먼저 프로그램을 확인하고 예매를 하기 위해서 PC방에 자리를 잡았다. 이미 괜찮은 영화들은 온라인 예매가 매진되었고 오프라인으로도 구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영화제 자료들을 얻을 수 있는 곳이 어딘지, 어디서 오프라인으로 티켓을 구할 수 있을지 검색을 마치고 일행들은 둘로 나눠서 영화제 표를 확보하기로 했다.

폐막을 하루 앞둔 주말이라 영화표는 정말 구하기 어려웠고, 부산지리를 모르는 우리 다섯명은 부산 남포동과 해운대 일대에서 표를 찾아 헤매야했다. 그래도 대구출신, 전남출신, 강원도출신, 경기도와 서울출신인 우리들은 그저 부산 거리를 헤매는 것만으로도 즐거웠고 영화제의 열기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아침은 간단히 편의점에서 때우고 점심은 거르며 열심히 돌아다닌 끝에 오후 영화와 저녁 영화 표를 구할 수 있었다. 점심을 굶었는데도 다섯 명 모두 활기 넘쳤다. 도서관에서 기운 빠진 모습으로 어깨마저 축 쳐져서 돌아다니던 녀석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입학했던 그때처럼, 그리고 영화 한 번 만들어 보겠다고 힘쓰던 그 신입생 때로 돌아가 있었다.

남포동 길거리 음식으로 점심을 대신하고 오후 영화 상영관에 들어가서 영화를 보고 나와서는 영화 이야기로 다섯 명이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촬영이 어떻고, 화면이 어떻고, 미장센이 어떻고, 어설픈 지식으로 길거리에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저녁 프로그램을 관람하고 나서는 더 난리가 났다. 저녁 프로그램은 상당히 인기가 있는 작품이었고 예매 시작 5분 만에 온라인 예매가 마감되었던 기대작이었다. 정말 오프라인에서 그것도 당일에 어렵게 구한 영화였다. 영화를 보고 나온 우리는 모두 아무 말이 없었다. 우리가 만들고 싶은 영화였기 때문이었다.

“야, 우리도 저런 영화 한 번 만들어 봐야하는데.”, “그러게 영화판에 뛰어들어야하지 않냐?” 늦은 저녁을 먹고 소주 몇 병과 새우깡을 사들고 해운대 바닷가에 앉아서야 우리들은 영화이야기를 다시 시작했다. 스무살에 꾸었던 꿈, 그런데 스물일곱이 되니 그 스무살이 수평선 저 멀리만큼이나 멀어보였다. 영화를 좋아했던 소년들이었지만 지금은 현실적인 고민으로 가득 찬 청년이 되어있었다. 당장 서울로 돌아가면 월요일에 합격 문자가 올지, 불합격 문자가 올지, 그리고 기말고사와 함께 하반기 공채를 늦게 진행하는 회사들의 리스트에서 어디에 원서를 써야할지, 그리고 어떻게 원서와 자기소개서를 써야할지. 영화 이야기를 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던 그 묵직한 고민은 떠나지 않았다.

몇 병의 소주도 떨어지고, 갈매기에게 줄 새우깡도 더 이상은 남지 않았을 즈음, 눈앞에 닥쳐온 현실의 무게를 깨달은 친구들의 말수는 점점 줄어갔다. “그래도 우리가 단편 영화 만들 때 그땐 참 좋지 않았냐?” 누군가 꺼낸 이야기에 우리들은 잠시나마 현실의 무게를 밀어두었다. “그럼, 그때 저 녀석이 조명판을 들고 말이야…” 우리가 만들어 본 것은 10분, 15분짜리 단편 영화 두 편이었지만 그 영화를 만들 때만큼은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했었고 그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즐거워졌다.

“학생들 영화 동아리 하나 봐요? 아, 오해는 하지 말고. 옆에 앉아있는데 이야기 소리가 들려서요.” 옆자리에 있던 중년의 사내가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50대 아저씨와 함께 있던 사내는 우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저희가 대학교 영화동아리에서 만난 친구들이거든요.” 그렇게 우리를 소개하며 자연스럽게 중년의 사내, 그리고 50대 아저씨까지도 함께 자리를 하게 되었다.

우리가 만들었던 단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또 오늘 영화제에서 보았던 영화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했다. 낯선 세 사람도 그 영화를 본 듯했고, 우리가 하는 이야기를 재밌게 들어주었다. 한참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새벽의 추위가 느껴지자 사내가 좀 더 편하게 이야기하자며 작은 실내포차로 자리를 옮겼다.

“정말 영화를 좋아하는 청년들이네. 영화는 계속 할 건가?” 50대 아저씨가 우리들에게 물었지만 우리 중 누구도 그렇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냥 서로 눈치보기만 바빴다. “취직… 때문에?” 우리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는 이해한다는 표정, 그러면서도 안타까운 표정이었다.

50대 아저씨는 영화감독이 꿈이었다고 했다. 70년대 부모님은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셨고 겨우 큰아들인 아저씨를 대학까지 보냈는데 영화를 한다니까 아버님이 반대하셨단다. 어쩔 수 없이 영화에 대한 꿈을 포기하고 회사에 취직했고, 임원까지 승진했다가 퇴사하고 인도네시아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아직도 영화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하고 시간이 되면 영화제를 관람하러 다닌다고 했다. 부산국제영화제는 2회부터 빠지지 않고 관람하러 온다는 이야기였다. “현실과 타협하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가끔은 자기 꿈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도 필요해. 하지만 현실과 타협해도 만만한 것은 아니지. 그리고 자신이 꾸었던 꿈을 나처럼 이렇게라도 계속 돌아보는 것도 필요하고.” 아저씨의 마지막 말이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열차에서 친구들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결국 우리들은 모두 현실과 타협하는 사람이 될까? 적어도 나는 그런 사람이 될 것 같았다. 그 뒤로 여전히 친구들은 도서관에서 지친 모습으로 만났고 한 명씩 취업이 되었다며 기쁜 얼굴로 도서관을 나섰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저씨의 말 때문이었을까, 그 다섯 명중 한 녀석은 취업준비생이라는 꼬리표를 던져버리고 졸업과 동시에 영화판으로 뛰어들었다. 그 친구는 10년을 꿈을 향해 달려왔고 곧 입봉 감독이 되어서 영화 크랭크인을 앞두고 있다.

매년 가을이 되면 가슴속 깊은 곳에 숨겨둔 영화에 대한 열정과 함께 10년 전 친구들과 함께 여행했던 부산국제영화제가 떠오른다. 그때 만났던 그 아저씨처럼 현실과 타협해서 아등바등 살아가며 꿈은 꿈대로 남겨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고 생각해본다. 모두가 꿈을 향해 달려가며 살 수는 없을테니 말이다. 10년간 영화판에서 고생한 친구를 보며 난 그렇게 꿈에 매진할 용기는 없었노라고 솔직히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친구의 입봉을 더 순수하게 축하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때 그 아저씨의 말씀처럼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스무살에 꾸었던 꿈은 진짜 꿈이 되어버렸지만 부산에 갈 일이 있거나, 가족들과 부산영화제 관람을 갈 때면 늘 가슴이 설레고 그때의 청년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를 꿈꾸었던 내게 부산이 주는 추억의 선물이다.

작성자
이호권
작성일자
2013-11-25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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