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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공간 통역관리 최고 권력자

통역관 횡포 극심… 라디오 샀다 통역 잘못으로 징역 20년
이야기 한마당 - 미군정 3년 부산 풍경

내용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연합군에 무조건적인 항복을 선언한다. 이에 따라 우리는 35년에 걸친 일본 제국주의 사슬에서 벗어나면서 독립이 보장된다.

그러나 일본의 항복 7일 전인 8월 8일 소련이 대일(對日) 전쟁에 참전하여 만주에서 북한지역으로 병력을 투입, 진격하게 되고 이에 미국은 일본이 항복하자 북위 38도선 이북은 소련이, 이남은 미국이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분담할 것을 제의함으로써 양군의 군사분계선이 38도선으로 책정된다.
 

미국 군정의 배경

그 같은 과정을 거치는 가운데 미국 극동 사령부는 9월 7일 남한에 군정을 실시할 것을 선포하고 9월 9일 미 24군단이 진주하여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킨 뒤 9월 10일 남한의 군정장관에 미 극동군의 '아놀드' 소장을 임명한다. 일본의 패망과 함께 우리는 곧바로 자주독립국이 되리라 생각했지만 점령지 군부가 점령지에 시행하는 군정이 시행된 것이다.

이러한 조치는 38선을 경계로 하여 북으로 소련 공산주의 세력의 군정이 획책되고 있어 그에 대비한 자유민주주의 미군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 당시 부산은 경상남도 관할 아래였고 경상남도의 도청은 부산의 남부민동에 있었다. 경상남도 내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기 위해 미군 24군단 제6사단이 부산으로 진주한 것은 일본이 항복한 지 1개월 뒤인 9월 16일이었다.

미군진주로 부산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요새사령부는 9월 17일 무장해제되고 9월 20일에는 미군정 경상남도지사 '해리스' 준장이 부산의 철도호텔에서 군정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경상남도 산하의 부산부는 부윤(府尹:오늘날의 시장)으로 '존 P·H 케리' 소령이 임명되고, 케리 소령을 보좌하는 비서겸 총무장에 한국인 2세 다니엘 문 대위가 임명된다.

우리 실정 어두웠던 미군정

군정을 실시한 미군은 우리 실정에 너무 어두웠다. 그래서 한국인 지사와 부윤과 참모진을 두었다. 한국인 지사에는 김병규(金秉圭:처음은 내무부장이었다가 1946년 1월 한국인 지사가 됨)를 임명하고 경찰부장, 재무부장, 농산부장 들을 두고 부산부에는 총무 서무 내무 학무 경리 등 각 과장을 두었고, 부윤에는 양성봉(梁聖奉:처음은 총무과장이었다가 1946년 1월 한국인 부윤이 됨)을 임명했다.

그렇게 한국인이 임명된 부서 위에는 고문이란 이름으로 미국인을 임명하고 해리스 미군지사는 "모든 행정은 각 부의 미군 고문관의 최종결재를 마쳐야 효력이 발생한다"고 했다. 그러니 우리나라 행정부서의 부장, 과장 위에 미군 고문관이 있어서 공문에는 고문관을 위해 영문해석을 붙여야 했다. 이 영문해석과 양측 행정관의 의사소통을 위해 우리나라 통역관을 별도로 두었다.

그러나 역사와 전통과 문화를 달리하면서 정치와 행정에 어두운 군인인 그들이었다. 이해가 부족했다. 상호간의 갈등이 빚어졌다. 이 미군정은 1948년 8월 15일 한국정부가 수립될 때까지의 짧은 3년 간이었다 해도 여러 가지 시행착오가 일어났다.

오해가 빚은 여러 사건들

미군정의 첫 일이 각 지역의 지방관인 군수·부윤을 임명하는 일이었는데 미군지사와 한국인 지사 그리고 민간인 사이의 연대가 부족해서 한 고을에 군수 또는 부윤이 두세 사람이나 나와 어느 쪽이 진짜인지를 판가름하는 웃지 못할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일제 때의 순사가 부윤에 등용되는 일이 생겨나기도 했다.

1947년 3월 1일 충무동광장에서 있었던 3·1절 기념식 때는 경관이 쏜 총에 6명의 양민이 사망하고 9명이 부상한 일이 있었다. 이 같은 일은 지역치안의 특수성에 대처하지 못한 미군정의 과오였다. 이러한 일의 발생을 막기 위해 미국측은 통역을 채용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당시의 일제는 영어를 사용하는 미국과 영국에 대한 전쟁으로 영어를 적성어라 하여 지극히 기피했기 때문에 영어를 오늘날처럼 잘 구사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미군정청은 신문광고를 내어 3차에 걸쳐 100명을 선발하여 관공소 요소요소에 배치했다. 하지만 그런 통역도 신통치 않아 미제(美製) 라디오 1대를 샀다가 미군정재판에 걸린 사람이 통역 잘못으로 20년 징역을 선고받은 경우도 있었다.

통역정치의 폐단

그 당시 통역의 역할은 매우 컸다. 예를 들면 일본군이 패망한 뒤 우리는 자치적으로 치안대를 조직했다. 그때의 치안부사령관에 최갑판(崔甲判)이 임명됐다. 최갑판은 우리 치안대원을 지휘하여 일본인이 일본으로 가져가려는 일본인 재산을 압류했다. 그 반면 일본인도 자치적으로 그들의 권익을 위해 일본인 세와까이[世話會]를 조직했다.

그 세와까이가 우리 치안대가 일본인 재산을 압류하는 일을 미군정포고령 위반으로 미군정청에 고발했다. 그 고발로 최갑판이 미군정재판을 받게 됐다.

재판정은 지금의 서구 토성초등학교였고 재판장은 미군정지사 해리스 준장이었다.

그 재판에 한국인 검사는 엉뚱하게도 최갑판을 3년형의 징역을 요구했다. 재판장은 통역관 우덕준(禹德俊)에게 변론을 하게 했다. 우덕준은 우리 치안대의 행동은 군정력이 미치지 못하고 있을 때 미군을 돕는 일을 했다는 사실과 일본인의 재산형성 과정과 그 재산 반출의 부당성을 소상히 밝혔다.

그러자 해리스 지사는 최갑판을 무협의의 무죄로 선고하는 한편 군정청 경상남도 경찰국 보안과장으로 임명하여 정식으로 치안 일선에서 일하게 했다.

압류재산 가로채기 다반사

통역이란 기회를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운 통역관도 적지 않았다. 예를 들면 앞에서 말한 치안대는 일본으로 반출하려는 일본인 재산과 경부선철도로 내려오는 철수 일본인의 귀중품들을 압수하여 부두창고와 철도창고에 가득 채워 놓았다. 그러자 미군이 진주했다. 치안대는 그 창고의 물품과 함께 창고 열쇠를 미군에게 인계했다.

그런데 통역이 미군에게 술과 여자를 제공하는 미인계(美人計)를 써서 그 압수품을 빼돌려 사복을 채운 바도 있었고 미군정의 미군을 감언이설로 회유하여 일본인이 남기고 간 재산을 가로채기도 했다.

이 같은 통역관의 비리는 우리나라 사람으로 행정을 맡고 있던 고위관리가 단속을 해야 했지만 이해력이 부족한 미군과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줏대 없는 통역을 다스릴 길이 없었다. 그때의 상황은 동래출신이던 경상남도 한국인지사 김병규씨가 지사를 1년도 못 채우고 그만두면서 한 말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도지사 이임식 자리에서 "지난날은 일본말 배워야 행세한다고 일본말 배웠는데 이제는 또 미국말 알아야 도지사 노릇하게 됐으니 이 어찌 한심하지 않는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뼈아픈 말인가.

작성자
부산이야기 2005년 11·12월호
작성일자
2013-07-29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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