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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이야기리포트

성곽의 기억이 머무는 자리, 부산진성공원

도심 속에 남은 방어의 흔적과 옛 의식의 길을 따라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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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구에는 은근 가볍게 산책할만한 공간이 더러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지금 소개해드릴 부산진성공원이다. 부산진성공원은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4호로 일본군이 임진왜란 당시 점령 후 쌓은 일본식 석성으로 이후 조선 수군이 다시 탈환해 본부로 사용하였으며, 지금의 부산진성은 1740년대에 축주된 조선 후기의 성곽이다. 당시 부산진성은 왜적의 침입을 막는 중요한 방어 거점이었고, 성 안에는 승가정, 영가대, 최영장군 사당 등이 자리하고 있겠다.


일제강점기와 도시화 과정을 거치면서 대부분의 성벽을 사라졌으나 일부 구간이 현재 부산진성공원 일원에 남아 복원 및 정비되어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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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부산진성 서문 성곽우주석'으로 발길을 옮겼다. 두 개의 돌기둥이 단단하고 묵직하게 서 있는 게 보이는데 임진왜란 이후 조성된 이 돌기둥에는 바로 '나라의 서쪽 문을 굳게 지켜라'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한반도의 동남단을 지키는 요새였던 부산의 전략적 의미를 압축하듯 오랜 세월에도 흐릿하지 않은 글씨는 여전히 그 시절의 긴장감을 품고 있다.


맑은 날씨를 벗삼아 안으로 이동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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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많은 주민들이 찾는 이유는 단연 이곳이 산책하는 데 있어 최적의 컨디션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높은 산까지 향하는 게 부담스럽다면 적당한 고도를 자랑하는 이곳을 마치 둘레길 걷듯이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건강을 챙기는 최적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함께 조성된 황톳길 역시 그러한 선택에 신뢰를 불어넣어주겠다. 나는 부담스러웠기에 이곳을 직접 맨발로 걷는 선택을 하지 못했지만 기회가 된다면 언제든 이에 동참할 생각이 있으니 때를 기다려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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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거진 나무 틈으로 돌아다니는 것이 무료하다면 공원 곳곳에 설치된 운동기구를 이용해보는 것도 이곳을 즐기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비교적 주말 낮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더 많은 어르신들이 운동기구를 이용해 건강을 챙기고 있는 모습이 많이 보였는데 나 또한 이제는 건강에 신경써야할 때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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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한 켠에는 '영가대'가 자리잡고 있다. 최근 영가대 본터를 방문해 그 정기를 느꼈었는데 이렇게 멀지 않은 곳에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영가대는 조선통신사가 일본으로 떠나기 전 제를 지내던 장소로, 한일 교류의 중요한 지점이었다. 안내문에는 1614년 순천부사 권반이 처음 영가대를 설치했으며 이후 통신사 일행의 출발 의례가 이어졌다는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물론 이 건물은 2003년 복원된 것이기는 하지만 이 터에 이렇게 서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긴 역사의 맥락이 몸으로 밀려오는 듯 했다. 바다를 향해 떠났던 사절단의 발걸음이 잠시 겹쳐지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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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최영 장군의 말씀 받들자'


어렸을 적 자주 부르곤 했던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속 가사다. 당시 최영 장군이 정확히 어떤 인물인지는 몰랐으나 이 가사가 기억에 남았던 만큼 그 존함 만큼은 머리에 새기고 있었는데 이렇게 멀지 않은 곳에 그의 유산을 기리는 공간을 마주하게 되었다.


고려 말 왜구 토벌로 유명한 충신 최영 장군은 특히 부산 일대에서도 왜구의 침입을 막으며 큰 공을 세운 바 있는데 이곳 '최영장군 사당​'은 그러한 공적을 기리기 위해 주민들이 정성스레 세운 공간으로, 매년 음력 5월 5일에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조용한 산책길 속에서 뜻밖에 헌충 공간을 만나자 부산이 가진 층위 깊은 역사가 더욱 가깝게 느껴졌다.


심지어 어떤 어르신께서 이곳을 지나가면서 잠시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며 가벼운 합장을 하는 모습까지 봐서 그런지는 몰라도 마음이 더욱 충만해지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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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둘러둘러 공원에서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니 다시금 눈에 띄는 건물 한 채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이는 이름하야 '승가정'이다.


안내문을 읽어보니 1842년 수군절도사 이희봉이 처음 건립한 정자로 일제강점기 때 한 차례 사라졌다가 이후 1974년에 다시 복원되었다고 한다.

 

이곳까지 올라오니 도시가 한눈에 들어왔다. 바람이 조금 차가웠지만 성 위를 지키던 장수들의 시야는 이런 느낌이었을까 싶어 잠시 서서 풍경을 바라보았다. 안내문에 적힌 부산진의 정자 가운데 가장 높다 하여 승가정이라 불렀다는 설명이 자연스레 이해되는 순간이었다.사진10



그 옆에 우뚝 선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기도 했는데 이는 '천장군 기념비'라고 한다.


명나라 장수였던 천만리를 기리는 비로 왜 조선의 장수가 아닌 명나라 장수를? 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는 임진왜란 때 그의 아들과 함께 조선에 출정하여 평양 · 곽산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으며, 1597년 정유재란 때도 울산 싸움에 참전해 큰 공을 세운 인물이라고 한다.


명군이 회군할 때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끝까지 머물러 귀화하였으며, 조정은 그 공적을 기리며 화산군에 봉하고 충장공의 시호를 내렸다고 한다. 승가정과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 철거된 이후 1947년에 다시 세웠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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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진성공원은 ‘볼거리’라기보다 ‘읽히는 공간’이었다.

성곽의 돌 하나, 기둥 하나, 이름 하나마다 부산의 방어사, 교류사, 시민들의 기억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잠깐의 산책이었지만, 부산이 왜 오랜 세월 항구도시를 넘어 ‘전략적 요충지’였는지 몸으로 이해할 수 있는 탐방이었다. 도심 속 역사를 조용히 마주하고 싶을 때, 부산진성공원은 그 자체로 훌륭한 답이 되어주었다.





작성자
임주완
작성일자
2025-11-25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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