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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이야기리포트

청렴바위 기장죽성 <어사암>

암행어사와 월매의 이야기스토리

내용

역사적으로 돌이켜 보면 인류사에 명멸했던 국가 중 장수한 나라로는 로마제국(2000년)오스만튀르크(600년)조선왕조(500년)를 꼽는다이런국가들이 장수한 비결은 세나라 모두 사회적으로 튼실한 도덕적 견제장치인 청렴제도를 정착시켰다는 점이다 


표지

죽성 두모포 풍어제터 어사암(御使巖) 


기장 죽성리에 조선시대 청렴암행어사인 이도재와 관련된 어사암(御使巖)이 있어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암행어사 하면 조선 영조 때의 박문수가 유명하지만부산 기장에도 꽤 유명한 어사가 있었으니 그가 이도재(李道宰·1848~1909)암행어사는 조선시대 임금의 특명을 받아 지방 정치의 잘잘못과 백성의 사정을 비밀리에 살펴서 부정 관리를 징계하던 관리로서어사 박문수가 탐관오리를 적발하고 백성을 구제한 정의파 어사의 표본이라면이도재는 암행어사이되 관기와의 민생-보은 스토리가 따라 붙어 흥미를 더해준다


어사암 모듬
이도재(李道宰) 어사암


기장읍 죽성리 일원의 문화 유적을 보면 신라토성을 비롯하여 바로 인접한 곳에 1510년에 축성된 두모포진성과 임진왜란의 상흔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1593년에 축성된 죽성리 왜성과 이곳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였던 국수당어사 이도재의 사연이 깃든 어사암그리고 황학대,죽성리 해송,죽성성당등이 동해 일출과 함께 바닷가의 아름다움을 더욱 고조시켜 주고 있다.


어사암주변 문화유적

어사암 주변 죽성왜성, 죽성성당, 해송, 국수당, 황학대 등  

 

이러한 죽성리 일원은 역사와 문화의 현장이 아직도 잘 남아있는 기장의 대표적인 문화유적 집단산포지이기도 하다.

이 가운데 어사 이도재(李道宰)와 기생 월매(月每)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어사암(御使巖)은 그 당시의 사연을 머금은 채 지금도 바위에 그 설화가 깃들여 있는 곳이다.


어사암과 죽성성당0
 

도재와 어사암,죽성성당

 

기장읍 죽성리 두호마을 남쪽에 있는 옛날의 매바위를 지금은 어사암(御使巖)이라 부루고 있는데,1894년(고종 20년)에 지금의 일광면 문동 소재의 해창(海倉)에서 곡식을 실은 조운선이 부산포에 있는 창고까지 운반하던 중에 이곳 앞 바다에서 격심한 풍랑을 만나 그만 침몰되었다.

그 당시의 기장은 오랫동안 심한 가뭄으로 어촌 주민들의 생활은 그야말로 초근목피의 삶이었으므로이 지역에 주민들은 비록 짠물이 섞인 곡식이라도 건져서 허기진 배를 채우고 말았다이 사건으로 인하여 현청에서는 일부 주민들을 옥에 가두기도 하였고매질을 당하는 가혹한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으며심지어 목숨을 잃기까지도 하였다조정에서는 이 사건을 알고 이도재를 어사로 기장현에 파견하여 진상조사를 하게 되었는데어사가 사실조사에 착수하자 이곳 어촌 주민들이 평소 친분이 있던 관기(官妓월매로 하여금 주민들의 어려운 사정을 간곡히 청하게 하고관아에서는 가혹행위로 분실된 곡식의 량이 많은 것처럼 꾸며서 수탈하였다는 등 어사가 주민의 사정을 헤아려 줄 수 있도록 그동안의 처사를 진정과 함께 설득을 하게 하었다.

 

그리하여 어사는 현장조사와 함께 그간의 사건 내용을 상세하게 확인하고는 감옥에 있는 주민들을 방면하게 하였고 이곳 어민들은 무사하게 되었으며그 자리에 오언절구 20자의 한시(漢詩)를 지어 어사암이라는 제목으로 남기게 되었다.

'하늘이 텅 비어 보이는 것이 없는데(天空更無物)/ 사나운 파도는 시인을 위해 춤을 춘다(海鬪難爲詩)/구만리 밖 멀리 떠 있는(環球九萬里)/ 한조각의 배는 언제 돌아오려나(一葦可航之)'싯귀는 비 바람에 마멸되어 지워졌으나 시흥은 고스란히 남아 후세의 마음을 흔든다그후 주민들은 이도재의 은덕에 대한 보답으로 매바위에 '어사암(御使岩)' '기월매(妓月每)'라는 글자를 새겼고 '이도재 생사단'을 세워 오랫동안 축원 제사까지 올렸다


수사이공도생생사단
이도재 생사단(기장읍성 기장초등학교 공덕비군 위치) 


어사와 관기쉽게 어울리지 않는 이같은 조합이 어사암 스토리의 차별성이다어진 어사가 슬기로운 기생의 미인계에 넘어가 정의를 실현했으니 이 또한 지혜가 아닌가 싶다.


기장공덕비군(생사단)
이도재 생사단(기장군공덕비군) 

   

이 일로 인하여 매바위를 어사바위 즉 어사암이라 부르게 되었으며그 후 세월이 흘러 글이 마모가 되자 이곳 주민들이 이도재와 월매의 인정을 잊지 못하여 어사암이라 새겼던 바위에다 이도재(李道宰)라는 이름과 기월매(妓月每)라는 이름을 세로로 새롭게 새기게 되었고 그동안 각자 바위의 글은 파도가 밀려와 해식풍화작용으로 마모가 많이 진행되었으나 육안으로 충분히 볼 수 있는 상태이다.

 

이도재(李道宰 :재1848~1909)는 격동기 말에 살았던 인물로 자는 성일(聖一 ), 호는 심재(心齋)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전봉준을 생포하였으며 군부대신과 학부대신 등 요직을 두루 거쳐서 시종원경이 되었다.

 

또 이 어사암 주변의 크고 작은 바위들은 옛날에 미역을 나라에 진상하기 위해 기장미역을 생산한 곳으로 지금도 이곳 주민들은 미역기세작업을 하고 있으며기장의 자연산 미역의 우수성을 알리고그 전통을 이어나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기장읍 죽성리 일원의 무한한 부가가치가 있는 역사의 현장을 이제부터라도 잘 관리하고 재창조하였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과거에 대한 것을 쉽게 잊어버리는 요즈음에 우리의 역사와 청렴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되새겨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어사암2
두모포 풍어제터 어사암과 드림세트장(죽성성당)


국제투명성 기구에 따르면 한 국가의 부패인식지수(CPI)가 1점 올라가면 국내총생산(GDP)은  0.5% 평균소득은 4%까지 늘어날 수 있다고 한다청렴성과 도덕성이 높을 수록 개인 경쟁력 또한 높아진다는 것이다이제 공직자는 물론 우리 시민들도 청렴이 개인의 문제가 아닌 국가경쟁력의 가장 중요한 중심축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청탁금지법이 시행된지 수년이 흘렀다오늘날 우리가 시급히 갖추어야 할 자산은 경제적인부군사적인 힘문화적인 품격보다도 바로 '청렴'이다청렴은 이모든 경쟁력의 궁극적 원천이기 때문이다. '청렴은 국가발전의 원동력!!'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는 말이다. 청렴은 곧 훈련이고, 과정이고, 노력이고, 결과라는 생각을 해본다

 

김동균(金東均)

작성자
김동균
작성일자
2024-08-10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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