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년간의 침묵을 깨다
관동대지진유족 발족회 일제강제동원역사관
- 내용
그들에게 이름이 있었고,
가족이 있었고,
고향이 있었다는 것,
누구와 어떻게 살아 왔는가를 보여주는
가족의 역사를 그려야만
그들의 존재를 말할 수 있을 겁니다.
_ 오충공 감독
1923년 관동대지진 조선인대학살 희생자 유족회 발족식 및 기자회견이 8월 30일 일제강제동원역사관에서 있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이 사건의 피해자 가족이 목소리를 낸 것이다.
오충공 감독의'1923제노사이드 93년의 침묵(가제)'의 예고편이 상영되었다. 영화 '박열'에서도 조명되었지만, 관동대지진은 일제강제식민지 시절 일본에서 대지진으로 인한 참사로 인한 일본국민의 분노를 일본정부에서 '조선인이 우물에 독에 탔다'는 유언비어의 퍼트려 6600여명의 조선인이 자경단의 일본도와 죽창등으로 살육당한 비극적 사건이다.
9월 1일 일본 도쿄 등 관동지역에 진도 7.9의 대지진이 발생했다. 지진에 이은 화재와 엄청난 피해에 놀란 일본 정부는 엉뚱하게 조선인을 적으로 몰았다. 민심이 흉흉해지고 일반인들 사이에 불신이 싹트자 내무성에서 계엄령을 선포하여 지역의 치안유지에 최선을 다할 것을 지시한다. 조선인들의 방화와 폭탄에 의한 테러, 강도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린다. 계엄군들은 조선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무참히 학살하였으며 6600여명의 희상자를 낳았다. 사실을 은폐한 지 93년이 지난 지금도 일본정부에서는 사실상 침묵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올해 5월 12일 최고의사결정회의인 각의에서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과 중국인 학살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명할 예정이 없다”는 입장을 채택했다. 국내에서는 진상 규명 노력이 정부보다 민간 차원에서 이뤄져왔다. 관동대학살 사건을 국내에 처음 알린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이었다. 관동대학살이 일어난 지 석 달 뒤인 1923년 12월 독립신문은 일본 유학생들의 조사 결과를 인용해 관동대학살로 희생된 조선인 수가 6661명이라고 보도했다.
유족회의 조씨 등 7분은 자신의 선친대의 사건들을 조용히 떠올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나의 가족이 그곳에 있었다고 증언했다. 일본인들 중에 이 사건과 관련한 시대적 통분을 느낀 3분이 참석하여, 일본을 대신해 사과한다는 양심적 증언의 시간을 가졌다.
재일동포 여가수가 윤동주의 서시 등을 노랫말에 담아 부르고, 일본인 기타리스트가 반주를 하여 한일간 회복과 화합의 작은 상징을 만들었다. 유족들은 시대가 만든 이 비극에 대해 광기의 민중과 방관하는 일본정부가 어떻게 무참한 살륙의 현장을 만들어 내었는지 토로하였다.
종교계와 시민단체 등이 이를 이슈화하고 있으나, 아직 정부적 차원에서는 아무런 진상규명이나 대응책이 없어 아쉬움을 드러내었다. 침묵의 93년 아니 94년째를 맞는 관동대지진 피해자 유족들의 진실이 치유와 회복으로 밝혀지기를 바랄 뿐이다.
- 작성자
- 김광영
- 작성일자
- 2017-09-12
- 자료출처
- 부산이라좋다
-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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