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국채보상운동 기획전시
- 내용
- 구한말 격랑의 시대, 국권을 상실한 암울한 터널, 그 속에서도 민족혼을 지키고자 한 선조들의 고결한 정신이 있었다. 한국 최초의 국민운동으로 평민에서 상공인, 기생, 거지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였다.
1904년 강제로 체결된 한일의정서, 대한제국에 사회기반시설을 만든다며 도로 등에 대한 시설비 부담을 강요하였다. 이에 4차례에 걸친 화폐 및 부채정리, 수리 토목공사의 명목으로 1.150만원을 차관한다. 이 국채에 이자가 더해져 국채는 1,300만원이 되었고, 이는 당시 대한제국 1년 예산과 맞먹는 규모였다.
1907년 서상돈은 대구광문사특별회에서 연설한다.
“국채 1,300만원은 국가의 존망이 달린 일이니 갚으면, 나라가 존(存)하고, 못갚으면 망(亡)하는 것이니 국민의 힘으로 이를 갚아 국토와 국권을 보존합시다!”
군민대회에 모인 사람들은 경북국채보상도총회를 결성, 41개군 모두 수합소를 설치,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 30개의 보상소가 설치되면서 국채보상운동은 시작된다. 3개월만에 2천만 조선민족의 국민운동으로 들불처럼 번진다.
부산에서는 촤천리에서 여성들이 <부산항좌천리감선의연부인회>를 조직한다. 그리하여 이 운동에 먼저 참여한다.
취지서에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남자만 국토에 사는 것이 아니라 여자도 생명보체하는 것이 일반이라. 충군애국지심이 어찌 남녀가 다르리오...”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랐던 이 운동은 일제의 탄압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하지만, 이 정신이 1919년 3.1운동, 1920년 물산장려운동 등 독립운동으로 이어져가는 정신적 토양이 되었다. IMF때 금모이기 운동으로 외환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던 움직임 또한 위기를 당한 때 함께 살고자 했던 그 정신이 이어져 온 것이라 하겠다.
10월6일부터 11월30까지 56일간 일제강제동원역사관 4층 기획전시실에서 국채보상운동기록물을 만나볼 수 있다. 카툰을 통해 아이들과 어른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판넬과 책자도 발간했다.
201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의 첫발을 내딛은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식민지 수탈의 일제강제동원 기록물을 남겨 후세에 더 이상 이런 안타까운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 작성자
- 김광영/이야기 리포터
- 작성일자
- 2016-10-20
- 자료출처
- 부산이라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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