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산 ‘애국지사 강근호 길’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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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해운대에 위치한 해운대장산 공원에서 애국지사 강근호 길(이하 애국지사)을 걷기 위해서다. 길은 가파른 오르막 시멘트포장길이다. 산 마니아들은 모두 돌아간다. 필자만이 이 길을 택한다.
애국지사의 이력은 이렇다. 아명은 강난성이다. 이명은 강화린, 강화인이다. 1898년 11월 3일 북한 함경남도 정평군에서 부친 강형석과 모친 신해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16년 만주(현 중국)로 망명한다. 1920년 초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다.
북로군정서사관연성소 구대장과 교관을 역임한 청산리전투에 참가한분이다. 청산리전투라 하면 북로군정서 사령관 김좌진 장군과 개인회고록을 남긴 철기 이범석 연성대장을 제외하면 널리 알려진 전사는 없다. 청산리 전역에서 직접 총을 들고 조국독립을 위해 여러 전투에 참전했던 650여명에 달하는 무장독립군의 활약상은 아직도 묻혀있다. 애국지사도 650명 중 한명이다.
애국지사의 조국광복투쟁은 지난 2002년 그의 진기 ‘만주벌의 이름 없는 전사들’이 출간하면서 비로소 세상에 알려진다. 독립 후 애국지사의 나이 52세 때 1949년 육군사관학교(비정규) 제8기 4차로 입학하여 소위 계급장을 달고 한국전쟁 임무를 다하고 1956년 육군 중령으로 전역한다.
부산으로 이주한 애국지사는 부산영도구 영선동에 정착한다. 1960년 향년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 젊은 부인 이정희 여사에게 ‘내 자식들이 성장하면 청산리전투에서 산화한 독립군을 위해서 작은 돌비석이라도 하나 세워주기 바란다,’ 라는 말씀을 유언으로 남긴 분이다.
부인은 1932년 충남대덕군에서 이시영 부통령의 손자 이상룡의 차녀로 태어났다. 대동여고 5학년재학 중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전쟁 중 소녀는 대구로 피난한다. 1950년 7월 학도의용군에 자원입대한다. 8월에 왜관 제2보충대 파견되어 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자, 그해 12월 1일 여군 제2기로 자원입대한다. 국군 제1군단소속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여군용사가 된다.
이곳 모정원은 당시 여사가 생활의 근거지로 삼아온 곳이다. ‘자식을 그리고 어머니의 애틋한 심정을 생각나게 하는 동산’이란 뜻으로 이름 짓고 365일 뜰을 가꾸고 지키면서 찾아오는 사람에게 ‘애국 혼’을 넣어준 여장부로 여생을 보내셨다.
이 길을 올라가면서 한국전쟁 때 만약에 김일성에게 조국을 넘겼다면 현재 필자는 어떻게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한다. 필자는 한국전쟁을 피난살이 혼자 한 사람이다. 피난보따리를 옮기러 어른들이 이동하는 사이에 포탄이 떨어졌다. 순간 해어진 것이 한 달 만에 울산에서 가족상봉을 했다. 피난생활은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을 한다.
- 작성자
- 황복원/이야기 리포터
- 작성일자
- 2016-10-05
- 자료출처
- 부산이라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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