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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이야기리포트

증산왜성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 지휘소

부산여행 '증산왜성' 숨은 이야기

내용

오늘날 부산동구 증산에 있는 ‘범천증산성’은 부산이라는 지명이 유래한 곳이다. 조선초기부터 왜구에 적극적인 대비를 하기 위해서 증산정상에 만들어진 군사적 요충이 부산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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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 아래에 있는 ‘자성대’ 는 진성의 아들성이다. 이곳은 원래 증산을 둘러싸고 첨사영이 있었던 곳이다. 한때는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도 이곳에 있었다. 그래서 수군첨사영성이라고도 한다. 또한 왜군은 이성의 이름을 일본식 ‘소서성’이라고 불렀다. 위치적 조건으로 임진왜란 때는 최초의 전쟁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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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윗쪽은 일본 대마도가 선명하게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왜성을 축조한다. 성을 이용하는 편의성 때문에 조선 후기는 자성대가 부산진성의 역할을 대신하면서 기능을 상실한다. 임진왜란 이전의 부산진성은 지금의 금성고등학교 뒤 구릉일대에 있었다. 당시는 지금의 정공단 아래쪽은 바닷길로 열려 있었다, 라는 ‘신중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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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592년(선조25)의 임진왜란 때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까웠기 때문에 첫 전투지가 되어 성안의 군, 관, 민이 전투에 참여했지만 중과부족으로 부산진성은 무너지고 말았다. 이때 쌓은 부산왜성은 일본기록에 ‘부산포성’으로 불렀다. 그해 4월 부산 정발첨사와 함께 본성인 부산진성이 함락된 후 일본장수인 모리 데루모토와 히데모토 부자가 본래의 우리나라 성을 허물고 일본식의 성으로 고처 쌓았다. 이때 일본식 이름으로 범천증산성은 고바야가와 라고 불렀다.
 

임진왜란 때 부산지역은 일본군병력의 충원과 물자의 보급과 관리 풍신수길의 본진인 나고야성과의 연결 등 전선에서 가장 중요한 교두보로서의 위치를 차지한다. 범천증산성은 임진왜란 때 남해안에 축성된 18개의 왜성 가운데 가장 먼저 축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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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1976년, 1998년 등 세 차례에 걸쳐 한일공동으로 지표조사에서 성의 훼손은 심하지만 당시 왜성의 규모를 짐작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조사결과 해발 130m의 산을 깎아 남북으로 520m, 동서 최대 폭 약 190m의 본성을 만들고 외곽 동쪽은 제2성과 제3성이 높이 5m정도의 차이로 석축 1,200m, 높이 5.3m~6.3m라고 적었다. 성은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다. 성 정상 아래는 동구구민들의 체력단련으로 이용한다. 제2성은 동구 어르신들의 게이트볼 장으로 만들었다. 제3성은 현재 공원 입구이다. 동구 시민도서관이 들어서면서 대부분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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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진성은 부산도시철도 1호선 좌천역 3반출구로 나와서 뒷골목에 있는 정공단을 참배하고 담을 타고 올라가면 부산진교회를 만난다. 앞을 지나 부산일신여학교를 방문하고 앞 도로 벽에 3.1독립선언문을 읽어보고 도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성으로 올라가는 경사 형 모노레일을 만난다. 타고 올라가면 된다.

작성자
황복원/이야기 리포터
작성일자
2016-07-11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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