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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이야기리포트

오대육효와 천만리장군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내용

부산시 동구 범일동 부산진 지성에 가면 진남대 바로 옆에 천만리 장군 유적비가 있다. 왜 이 곳에 유적비가 있는지 들여다보면 천만리 장군은 1592년 임진왜란때 명나라에서 황제의 명을 받아 총수사 이여송과 더불어 조병영양사 겸 총독장으로서 두 아들 천상·천희와 철기군 2만 명을 데려와 평양, 곽산, 동래 등지에서 명나라군이 승리를 거두는 데 기여했다. 정유재란 때는 울산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웠다가 두 아들과 함께 조선에 남아 우리나라 '천씨'의 조상이 된다.

조선 조정에서는 천만리의 전공을 치하하여 자헌대부의 벼슬을 내리고 화산군에 봉했다. 숙종 임금 때는 왜란 평정의 은혜를 잊지 못하여 명나라 황제를 추모하기 위한 대보단을 궁중에 설치하고, 천만리 장군도 함께 향사하도록 했다. 순종 임금 때는 천만리에게 '충장'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유적비를 부산진 지성에 세우고 매년 관과 민이 제사를 지냈으나, 일제강점기 때 유적비가 철거되고 제사도 금지되었다. 한때 왜인들에 의해 매몰되었던 유적비를 1947년 후손들이 되찾아 다시 이 곳에 세웠다.

또한 부산박물관 기증전시실에 가면 5대를 대물림한 효행한 영양천씨 석대동파 '오대육효 고문서, 동면상단풍헌약정서목, 천성태의 효행'을 기증한 '천장률'씨의 고문서를 볼 수 있다. 이 문서에는 천성태의 지극한 효성에 감동하여 밤마다 호랑이가 여막에 와 호위하고 암수 두 마리 쥐가 곁에 머물 정도로 효행이 지극하며 후손들에게 이어져 내려온 '오대육효'가 시작되었음을 알려 준다. 이역만리에서 떠나와 임진왜란때 왜군을 물리치고 국내에 정착하여 '천씨' 조상이 되고 '오대육효'의 효행까지 물려준 천마리장군에게 지구촌 다문화사회에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작성자
김홍표/부비 리포터
작성일자
2015-12-17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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