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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이야기리포트

조선시대 ‘동래독진대아문’ 제자리 잡다

내용

부산광역시동래구 명륜동 112번 길 61(수안동)에 위치한 '동래독진대아문'(이하 관아문)은 조선시대 후기관아를 출입하던 관문이다. 건립은 1626년(인조4)으로 문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홑처마 솟을지붕이다. 부산광역시지정 유형문화재 제5호(1972년6월26일)로 지정되었다. 삼문 형식의 흔치 않은 관아문이다.

이 관아문은 동래부의 동헌인 충신 당을 건립할 때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정한다. 그 후 1700년(숙종 26)과 1870년(고종 7)에 중수되었다. 원래는 동래부사청동헌의 입구에 있었다. 1930년 경 시가지 정비에 따라 철거되어 금강공원 내 등산로입구로 옮겨 세웠다. 2014년 8월 옛 자리인 현재자리로 다시 옮겨 짓는 중이다.

관아문은 1655년(효종 6)에 동래부의 군사권이 경상좌병영 휘하 경주진영에서 독립하여 '동래독진'으로 떨어지게 되었음을 알리는 '東萊獨鎭大衙門(동래독진대아문)'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원형의 낮은 초석 위에 가는 두리기둥을 세우고 가운데 칸의 기둥 위에만 초익공을 쌓았다. 서까래가 노출된 연등천장이다. 사방이 개방되어 문짝은 달려 있지 않다. 규모는 작지만 삼문형식의 흔하지 않은 관아문으로 추정한다.

현재 부산광역시지정 기념물 제 60호로 지정된 '동래부동헌'(이하 동헌)은 조선시대 수령의 집무공간으로 일명 '아헌'이라고 한다. 객사 다음으로 중요한 관아시설로 '이청', '무청', '향청' 등 각종 건물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동래는 일본과 가까워서 일찍부터 전략요충지이며, 군사 접경지역으로 읍성과 관아가 설치했다.

동헌경내 배치도는 '충신당'과 좌웅, '연심당', '독경당', 바깥대문이었던 '망미루', 외 삼문인 '동래독진대아문'등 많은 관아 건물들이 부속된 것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충심당과', '연심당'을 제외한 건물들은 철거한다. 당시 위상을 느낌으로 만나볼 수 있으며 동래부사의 우렁찬 불호령이 쩡쩡 울리는 역사의 현장이다.

동헌 잔디마당에는 부사 역임한 석물위폐 넷 위가 모셔져 있다. 충신당은 조선시대 동래부사가 공적인 업무를 보던 곳이다. 1636년(인조 14) 부사 정량필이 창건하였으며, 1711년(숙종 37)부사 이정신이 '충신당'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일제강점기시대 때는 동래군 청사로, 1973년 동래군이 양산군으로 편입된 후 양산군보건소 동부지소로 사용했다. 현제 부산지방에 남아있는 조선시대 단일건물 중 규모가 가장 크고 유일한 동헌건물로서 조선후기 전형적인 관아건축 양식을 짐작한다.

망미루는 1742년(영조 18) 동래부사 김석일이 동래부 청사인 동헌 앞에 세운 문루이다. 옛날 항양으로부터 부임해온 어느 부사가 임금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서 누각을 망미루라고 라고 불렀다는 설이 있다. 1919년 동래의 3.1운동은 이 누각에서 만세 삼창으로 시작됐다, 라고 한다.

교통편
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에 내려서 7번 출구로 올라가서 앞으로 150m 쯤 도보로 가면 첫 왼쪽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이길을 따라 300m쯤 가면 동래시장이 보이며, 오른쪽 기와지붕을 만날 수 있다. 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된다.

작성자
황복원/부비 리포터
작성일자
2015-11-27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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