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골목에 새겨진 이름들 – 부산 동구 ‘누나의 길’ 탐방기
- 내용

“또각또각, 또각또각. 이 길에서 여공의 시대는 시작되었다.”
부산 동구 조방앞 시장 인근의 어느 조용한 골목, 골목의 입구엔 검은색 백팩을 멘 소녀의 등 뒤로 동생을 업은 채 앞을 똑바로 응시하는 흑백 사진 한 장이 서 있다. 이곳은 ‘누나의 길’. 이름부터가 특별하다. 잊혀진 산업화 시대의 뒷골목이 아니라, 여성 노동의 역사를 고스란히 껴안고 있는, 우리의 누나들과 어머니들의 흔적을 따라 걷는 길이다.

이 길은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산업화의 그늘에서 동구 일대 봉제공장에서 일했던 여공들의 출퇴근길이었다. 당시 여성들에게 도시 노동자로서의 삶은 새로운 도전이자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책임이기도 했다. 특히 어린 시절부터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터로 향해야 했던 소녀들은 ‘어머니가 되기 전의 어머니’로, 누군가의 아내가 되기 전부터 이미 집안의 기둥이었다. “반장님, 시다 자리 하나 내주이소”라는 간절한 바람 속에서, 이 골목은 시대의 선망이자 현실의 투쟁이 깃든 노동의 거리였다.

골목을 따라 오르면 다양한 이야기 판넬들이 연이어 나온다. 한쪽엔 1960년대 야학 장면이 담긴 사진이 붙어 있고, ‘내 이름 처음 쓰게 해준 야학’이라는 문장이 따뜻하게 걸려 있다. 낮에는 공장에서, 밤에는 글을 배우던 여공들의 삶이 담겨 있다. 이름 석 자를 배우는 일이 한 사람의 삶을 되찾는 일이었음을, 이 짧은 문장이 증명해준다.


‘경제발전의 진정한 주역’이라는 문구 아래 펼쳐진 여공들의 작업장 사진은 그 자체로 시대의 증언이다. 아직도 반듯이 앉아 재봉틀을 돌리는 여공들의 얼굴에선 단정한 각오와 일상의 피로가 동시에 묻어난다.

골목의 끝자락, 어느 건물 벽엔 ‘진시장여공 주인공들’이란 이름으로 단체 사진이 붙어 있다. 이들이 입을 모아 말한다. “우리는 그때도 예뻤다”고. 외출복 한 벌을 사러 가기 위해 하루 종일 공장에서 일했던 기억, 점심시간에 웃으며 수다 떨던 기억, 누군가의 눈을 피해 몰래 한숨을 쉬던 기억.
그 모든 순간이, 이 골목의 담벼락에 조용히 깃들어 있었다.
‘누나의 길’은 단순한 역사 공간이 아니다. 이는 여성 노동과 도시 빈민의 삶, 교육의 갈증과 사회적 제약을 견디며 살아낸 사람들의 기록이자, 지금 우리를 있게 한 시대의 조각이다. 어쩌면 이 길을 걷는 일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또 다른 ‘누나’로 살아가는 누군가의 삶에 조용한 연대의 발걸음을 더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 부산 동구 김동우
- 작성자
- 김동우
- 작성일자
- 2026-01-12
- 자료출처
- 부산이라좋다
-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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