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개교, 부산최초 여성교육기관
부산 기네스를 찾아라! ⑨부산진일신여학교
부산 3·1만세운동 주역 … 박차정·박순천 등 여성 명사 배출
- 내용
이파리가 파릇하다. 그리고 무성하다. 파릇하고 무성한 이파리가 봄바람에 간들대는 나무는 팽나무. 한 뿌리에서 났을 두 그루 팽나무가 학교 마당을 꽉 차게 한다. 이 자리에 학교가 들어선 게 100년이 넘었으니 나무 나이도 얼추 그 정도일 터. 100년에 이르는 숱한 날들을 나이테 켜켜이 간직하고 있을 나무는 파릇하고 무성한 이파리를 간들대며 부산 앞바다를 굽어본다.
부산진일신여학교는 부산최초 여성교육기관으로 부산시 기념물 제55호다. 부산최초 근대학교인 개성학교(부산상고와 개성고 전신)와 함께 1895년 개교했다.1905년 지금 자리로 옮겨
나무가 감싼 학교는 부산진일신여학교. 나무를 닮아 부산 앞바다를 굽어보고 부산 근대사를 굽어보는 2층 벽돌 건물이다. 이 학교를 거쳐 간 여학생들이 장차 부산을 대표하고 한국을 대표하는 명사가 됐으니 그들의 손때가 묻고 눈때가 묻은 붉은 벽돌 한 장 한 장은 마음을 경건하게 한다. 붉은 벽돌 한 장 한 장은 일제강점기 부산과 이 나라를 올곧게 지켜 내려고 했던 이들의 붉은 마음, 단심이기도 하다.
부산진일신여학교는 부산최초 여성교육기관. 부산시 기념물 제55호다. 부산최초 근대학교인 개성학교(부산상고와 개성고 전신)와 함께 1895년 개교했다. 1895년 10월15일 호주 장로교 선교회 여자전도부 소속 전도사들이 동구 좌천동 삼 칸짜리 초가에 설립했다. 초대 교장은 멘지스(Menzies) 선교사였고 3년 과정 소학교였다. 학생은 고아와 교인 자녀였다. 남성 중심 조선 역사에 있어서 여학교 설립은 한 시대에 획을 긋는 파격이었고 결단이었다.
파격과 결단은 이어졌다. 지금 자리에 단층 벽돌건물을 짓고 초가 학교를 옮긴 것. 생각해 보라. 허름한 초가집이 대부분이었을 당시 붉은 벽돌건물은 얼마나 웅장했을 것인지. 1905년 4월15일 새 건물로 옮긴 일신여학교는 수업연한 3년의 고등과를 1909년 8월 병설한다. 고등과 첫 졸업식은 1913년 3월31일에 있었다.
1940년 신사참배 거부로 강제 폐교
일신여학교 졸업생들은 곳곳에서 이름을 남겼다.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양한나, 의열단장 김원봉의 부인이자 그 자신 독립투사로서 생을 마감했던 박차정, 민주당 당수를 지낸 박순천 등이 일신여학교 출신이다. 고등과는 1925년 6월 동래구 복천동으로 이전해 동래여고 전신이 됐다.
일신여학교의 파격과 결단은 연이어 이어졌다. 단층 건물을 1931년 10월 2층 벽돌로 올린 것. 곧 지금 부산진일신여학교 교사다. 일본식 건물이 판을 치던 시대에 호주 선교사 주도로 지어진 본격 서양식 건물이라 역사적 건축학적 가치가 대단히 높다는 평가다. 부산에서 가장 오래 된 서양식 건물이다. 부산 최초 3 · 1만세운동 주역도 주경애 선생 등 일신여학교 여선생들과 여학생이었다. 3월11일 저녁식사를 마치고 저녁 9시께 좌천동 거리를 누비며 태극기 흔들며 만세를 외쳤다.
이들 여학생 의거는 동래고보 남학생을 자극해 3월13일 동래시장 3 · 1운동으로 이어졌다. 부산진일신여학교는 폐교되는 과정도 극적이었다. 신사참배를 거부해 1940년 4월1일 일제가 강제로 문을 닫은 것.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부산 정신의 한 전형이 부산진일신여학교였다.
- 작성자
- 부산이야기 2014년 5월호
- 작성일자
- 2014-05-12
- 자료출처
- 부산이라좋다
- 제호
- 첨부파일
-
- 부산이라좋다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