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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개항기 부산은 객주업 전성시대

하단·엄궁·구포 물물 중심지… 소금·김·미역 거래 풍성
이야기 한마당 - 부산의 객주업

내용

조선시대 후기에 발달한 상업으로 객주업(客主業)이 있다. '객주업'이란 한 지역에서 생산한 물품을 다량으로 모아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서 파는 장사꾼을 말한다.

팔려는 지역에서 판매를 위탁하고, 객주의 사랑방에 머물면서 물건이 팔릴 때까지 기다리다가 매매가 이뤄지면 객주는 화주(貨主)에게서 팔아준 수고비인 구전(口錢 : 구문(口文)이라고도 함)을 받는 일종의 매매중개업자를 일컫는다.

부산 객주업 중심지 하단·초량

지금으로 보면 여관업과 무역업을 겸한 것 같은 객주업이 부산에서 가장 번창한 것은 부산개항기(1876∼1910)였다. 그 중심지는 하단(지금의 사하구)과 초량(지금의 동구)이다.

하단과 초량이 중심지가 된 것은 하단은 낙동강의 수운으로 물자운반이 편했고 초량은 해상운송으로 광범위한 유통망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단과 엄궁 지역에서는 명지(지금의 강서구) 바닷가에서 생산된 천일염인 소금과 바다에서 난 어패류와 김 파래 미역 같은 해조류를 모아 배로 낙동강 물길을 따라 삼랑진 창녕 고령 왜관 구미 상주 등지로 오르면 그 곳의 객주업이 받아들이고, 그 곳 객주업이 모은 농산물(주로 곡물)과 공산품이 배에 실려 하단과 엄궁의 객주에게로 돌아왔다.

그러한 물품교역으로 1880년대의 하단에는 크고 작은 객주업이 수십 군데나 됐다. 1883년에는 하단의 객주업자들이 영업권 보장을 위해 동계사(同契社)를 조직했다. 1893년에는 하단 엄궁상회사가 동래부에 등록하여 영업권을 보장받았다.

그러나 낙동강의 토사가 하단포와 을숙도 주위 강을 메워 뱃길이 어렵게 되자 낙동강의 수운 중심지는 상류인 구포로 옮겨지고 객주업도 자리를 구포로 옮겼다.

바다 이용한 초량 객주업

바다의 수운을 이용한 원거리 물품거래도 1880년대 크게 일어났다. 그 중심지는 초량(지금의 동구)이었다.

초량에는 소규모 객주업자가 개항 이전부터 있었지만 개항을 하자 그 규모를 확대하면서 일본 무역상에 대항하게 됐다. 그 대항이란 일본 상인들이 우리 생산자들과 직거래를 하는데서 오는 매매가격의 문란을 막고 우리 상권을 확보하면서 민족자본을 육성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객주끼리의 모임인 조합을 조직하여 그 조합이 관(정부 또는 동래부)의 비호를 받고, 관은 조합운영을 통제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형성된 것이 1889년 조직된 '부산객주상법회사'였다. 이 상법회사에 참가한 객주는 동래부가 선정한 44명이었다. 상법회사가 조직됨으로써 종전에 흔히 볼 수 있던 화주와 객주 사이의 소개료인 구문제(口文制)가 없어지고 매매의 실거래와 세금제로 바뀌었다.

이 때부터 객주업자들은 동래부에 영업세를 냈다. 그 영업세는 동래부에 설치된 대포를 관리 조종하는 별포병(別砲兵) 200명의 월급인 삭료(朔料)에 충당됐다.

부산보다 2년과 5년 늦게 원산과 인천이 개항하자 부산의 객주업자들은 원산과 인천으로 옮겨가서 부산에서 쌓은 경험으로 폭넓은 상거래를 했다. 그 같은 예로는 초량출신으로 초량에서 객주업을 한 정치국(鄭致國)이 있다.

객주 영업세로 군인 급여 지급

그는 1890년대에 인천으로 이주하여 금융업을 하면서 부산의 유지들과 부산에 주소와 선적을 둔 협동기선회사를 설립하여 기선으로 원거리 대량 운송을 했다.

그러한 운송으로 함경도의 명태와 건어, 강원도의 목재와 미역, 전라도의 곡물, 의령의 종이, 개성의 인삼들이 부산으로 들어와서 각 지역으로 나가거나 외국상대의 무역으로 바뀌었다. 그 반면 부산으로 온 선박은 개화의 개화상품과 각 지역에서 모여든 지역 상품을 받아들여 국내 각 지역으로 옮겨졌다.

1900년에는 초량객주조합원들이 중심이 되어 함경도에서 오는 명태를 보관하기 위해 초량에 부산으로서는 맨 처음인 창고를 세웠다. 그것이 지금까지 창고업을 하고 있는 '남선창고'다.

개항기인 1889년 초량객주가 중심이 되어 설립한 부산객주상법회사는 1895년에는 부산상무소(商務所), 1899년에는 부산상무회사, 1901년에는 부산항객주회의소, 1904년에는 동래상업회의소가 됐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제로 점유하자 부산선인(鮮人)상업회의소(1914년)가 되어 오늘날의 부산상공회의소의 전신이 됐다.

초량객주조합은 초량에 사립야간학교를 세웠다가 초량사립상업학교로 발전시켰다. 1915년에는 초량에 기생조합인 봉래권번을 세웠다. 이같이 초량객주조합은 개화기 부산의 숙박업 금융업 무역업 운송업을 일으키는 근간이 됐다.

남선창고와 동래 대포산 유래

앞서 1889년 조직된 부산객주상법회사의 영업세는 동래부에 설치된 별포병의 월급인 삭료에 충당됐다고 했다. 그 이야기가 나온 김에 동래의 마안산(馬鞍山)을 대포산(大砲山)이라 하는 유래를 말해 두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마안산이란 지금의 동래구 복천동고분군이 있는 산으로 그 능선이 '말의 안장처럼 휘어졌다' 하여 말 '마(馬)', 안장 '안(鞍)'의 마안산이란 이름을 가졌다. 이 산은 오늘의 부산광역시를 동래부라 했던 조선시대는 동래부사청이 마안산 아래에 있어서 동래부의 주산이라 했다.

그런데 부산은 지금도 그렇지만 옛 동래부 시대는 나라의 최남단이 되어 국방의 요지였다. 그래서 동래부읍성이 둘리워진 안쪽이 동래부의 중심지역이 되고 내려다보이는 마안산에 외적의 침노를 막기 위해 대포가 비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1882년 임오군란 이후는 지방의 군사권마저 위축되어 지방 병사들에게 지급할 제반 비용이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동래부가 부산객주상법회사에서 징수한 영업세를 마안산에 비치한 대포를 조종하는 별포병의 월급으로 충당한 것이다.

대포산, 한국전쟁과는 무관한 이름

그렇게 마안산에 대포가 비치되어 있던 곳이 지금의 복천동고분군 자리라는 이야기와 그 위쪽으로 지금 3·1운동기념탑이 세워져 있는 능선이라는 두 갈래 이야기가 있다.

마안산에 그렇게 대포가 설치되어 있고 별포병이 날마다 오르내리다 보니 주위 주민들은 마안산을 대포산이라 하게 된 것이다. 실제가 그랬다. 마안산은 동래부지나 여러 지도에 기록돼 있는 공식 이름이지만 부르기도 어렵거니와 기억하기도 어려운 이름이었다.

그러나 대포산은 실제 대포가 그 산에 있을 뿐 아니라 모두가 아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쉬웠다. 그래서 마안산보다 대포산이 널리 알려진 것이다. 그런데 대포산의 유래를 말한 이제까지의 기록을 보면 6·25 한국전쟁 때 미군이 그 산에 대포를 비치해서 그리 말하게 됐다고 한 것이 많다. 그건 아니다.

대포산이란 말은 6·25한국전쟁 이전부터의 이름이다. 조선말에 우리 정부(어쩌면 동래부일 수도 있음)가 대포를 설치하고 별포병이 오르내린 그 때부터 부르게 된 이름이다.

작성자
부산이야기 2007년 9·10월호
작성일자
2013-10-11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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