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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천년 세월 이어온 부산 땅 이름

해운대 ‘간비오산’ 이두식 표기 지금도 사용

내용

우리말은 있되 그 말을 적을 글이 없던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우리말을 한자의 음이나 새김을 따서 적었다. 그렇게 적은 것을 '이두(吏讀)'라 한다.

부산지역에는 이두형식으로 된 지명이 문헌으로 남아 있거나 현재도 쓰이는 곳이 여럿 있다.

거칠산군에서 '동래군'으로

부산지역이 신라에 예속된 것은 6세기경이다. 그 이전에는 거칠산국이라 한 소집단의 부족국가가 지금의 황령산 주위에서 독자 세력을 형성하며 살고 있었던 것 같다. 그 거칠산국은 신라에 예속되면서 거칠산군이 됐다. 여기서 말하는 거칠산국이나 거칠산군은 신라 쪽에서 보면, 신라의 남쪽 끝에서 끝까지 저항해 항복하지 않는 '거친(사나운) 부족'이란 뜻으로 붙인 이름으로 여겨진다.

한데 우리 글이 없을 때니 그 '거칠'을 한자의 음을 따서 居漆(거칠)로 썼다. 이것이 이두식이다. 그 뒤 신라 경덕왕은 757년 우리말로 된 지명을 모두 한자 이름으로 바꿨다. 그때 거칠산군은 東萊郡(동래군)이란 이름이 됐다. 그때의 거칠산은 지금의 荒嶺山(황령산)으로 보고 있다. 이 황령산은 거칠산의 거칠을 한자 거칠 '荒(황)'의 뜻인 새김을 땄다. 이도 이두식 표기다.

해운대 '간비오산'의 유래

해운대구의 주산인 장산에서 동백섬으로 뻗어내린 중간 봉우리를 옛날의 이두식 표기 그대로 지금도 '간비오산'이라 하고 있다. 조선시대 봉수대가 자리잡고 있어서 '봉대산'이라고도 한다. 이 산의 서쪽이 지금의 센텀시티다.

센텀시티가 바다였을 때 동쪽(지금의 해운대구 쪽)에는 지금의 재송동인 재송포에 큰 나루터가 있었다. 그와 함께 서쪽(지금의 수영구 쪽)인 민락동 쪽에도 津頭(진두)라는 큰 나루터가 있었다. 이 나루터는 국내의 해상 교통뿐 아니라 외국과의 교역도 컸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 말하려고 하는 간비오산은 재송동 쪽과 민락동 쪽 나루터를 내려다보고 있는 산이다. 그래서 그 산을 '큰 나루가 있는 산'이라고 이두식으로 쓰다보니 '干飛烏山(간비오산)'이 된 것이다.

간비오산의 干(간)은 신라 최고의 관직을 角干(각간)이라 한 그 干(간)이자 부족국가시대 부족의 수장을 干(간)이라 한 그 干(간)인데 대(大)의 뜻인 '크다'의 의미를 가졌다. 비오(飛烏)는 날 비(飛)의 '날'의 새김과 가마귀 오(烏)의 음인 '오'가 어울린 '날오'가 되고 '날오터나로터나루'가 된다. 말하자면 간비오산은 큰 나루가 있는 산이란 말이다.

수영 '판곶리', 아치섬과 '모지포'

지금의 수영구 민락동 아래짬으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마을을 '판곶리(板串里)'라 했다. 이 판곶리는 '널구지'를 이두어로 쓴 말로 지금도 그곳을 널구지라 하는 사람이 있다. 널구지의 '널'은 편편하고 넓은 판자를 말하고 '곶이'는 육지가 바다로 불쑥 내밀린 곳을 말한다. 그러니 지금의 민락동 끝자리는 널처럼 편편하면서 바다를 향해 내밀렸다 해서 널곶이라 했다.

이 널곶이를 이두식 한자 이름으로 바꾸자니 널 판(板)의 음인 판과 곶이 곶(串)의 음이 어울려 판곶리가 된 것이다. 영도에 있는 지금의 아치섬을 옛날에는 '곶이섬'이라 했다. '곶이'란 육지가 바다로 불쑥 내밀린 곳을 말한다. 아치섬은 영도 동삼동 바닷가에서 불쑥 내밀려 나와서 '곶이섬'이라 한 것이다. 고지섬을 이두식 한자음을 따서 쓴 게 '고지도(古智島)'다. 이 고지도는 옛 지도나 옛 문헌에서 자주 볼 수 있다. 한국해양대학교가 차지하고 있는 오늘의 아치섬은 아침이 가장 먼저 밝아온다 하여 조도(朝島)라고도 한다. 서구 암남동의 국립동물검역소 앞 바닷가를 모지포(毛知浦)라 한다. 모지포는 감천만에 통한다.

이곳은 이 주위에서 가장 먼저 사람이 산 흔적으로 신석기시대 패총이 있다. 이 지역 남쪽 갯가는 옛날부터 해산물이 많이 나서 오가는 사람이 많았다. 그 갯가가 지금은 감천포·서평포·다대포 등 한자 이름이 되어 있지만 모짓개라 한 모지포만은 옛 이름을 가지고 있다.

모짓개는 '맨 처음'이란 뜻이다. 형제자매 가운데 맨 먼저 태어난 사람을 '맏이'라 하는데 이 지역에서는 '모지'라 한다. 그러니 당시는 주위의 여러 포구보다 먼저 생겨 맏이(모지)란 이름을 가졌다. 그 '모짓개'를 이두식으로 쓰다보니 모지포(毛知浦)가 됐지만 그 모지(毛知)는 음을 땄을 뿐이다.

목장지대인 오해야항

조선시대의 부산에는 나라에서 경영하는 국마장으로 절영도목마장(현 영도), 석포목마장(현 대연동), 오해야항목마장(현 사하구) 세 곳이 있었다.

오해야항목장에는 793마리의 목마가 있었다고 1469년 편찬의 경상도소찬지리지가 기록하고 있다. 오해야항목장은 옛 지도는 지금의 남구 용당동에 적어놓은 것도 있고 사하구의 감천동지역에 기록한 것도 있다. 그러나 지리적 상황이나 오해야항 봉수대의 위치상으로 보면 사하구의 감천·괴정 지역에 있었다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이 오해야항을 오해야항(吾海也項)으로 썼다. 오해야는 옛글인 월인석보·두시언해·훈몽자회에서 볼 수 있는 '오회야' 또는 '오해양'으로 마구간을 말한다. 이 말은 뒷날 '외양간'으로 바뀌었다.

이두식으로 쓰자니 吾海也(오해야)가 됐고 목항(項)은 지나가는 길목을 말한다. 그러니 오해야항은 '외양간으로 가는 길목'이란 뜻이다.

송공삼거리는 '마비을이현'

서면에서 양정동 쪽 송공삼거리로 오르는 고개는 도로가 개설되면서 깎여내려 낮아졌지만 옛날에는 아주 가파른 고개였다. 이 고개를 옛 지도 또는 옛 문헌은 馬飛乙以峴(마비을이현) 또는 馬飛峴(마비현)으로 기록하고 있다.

1469년 편찬된 경상도속찬지리지에 의하면 석포(石浦) 목장이 있는데 그곳의 말을 232마리로 적고 있다. 석포는 지금의 남구 대연동 지역이다.

그런데 말은 놓아서 기르는 방목이라야 한다. 그렇게 방목으로 놓인 말이 황령산에서 풀을 뜯다가 황령산 능선으로서는 비교적 낮은 마비을이현 고개로 달아나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목장관리의 감목관이 와서 말의 수가 적은 것을 탓하면 이곳 사람은 저 고개로 날으듯이 달아났다고 했다. 그래서 말 마(馬)의 새김인 '말'과 날 비(飛)의 새김인 '날'이 어울리면서 새 을(乙)과 써 이(以)가 어미 '으는'이 되고 고개 현(峴)이 새김 '고개'가 되어 '말 날으는 고개'의 이두식 표기가 된 것이다.

작성자
부산이야기 2007년 1·2월호
작성일자
2013-09-03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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