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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은 배도 마음대로 못 타나”

조선사람 차별 심각… 배 이름에 담긴 일본의 침략 야망
이야기 한마당 - 관부연락선 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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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대한제국에서 철도부설권을 얻어낸 일본이 부산과 서울 사이의 경부선 철도를 부설하여 개통을 본 것은 1905년 1월이었다.

그 경부선과 일본의 철도를 연결하기 위해 일본의 시모노세키와 부산 사이를 연계하는 관부연락선을 정기적으로 취항한 것도 1905년 9월이었다.

1905년 등장 관부연락선

일본이 대한제국(당시의 국호)을 병탄(倂呑 : 1910년 한일합방)하기 위한 음모로 한국의 외교권을 무력을 앞세워 박탈한 을사조약(乙巳條約) 또한 1905년이었다.

1906년에는 서울과 신의주 사이의 경의선 철도를 부설하여 경부·경의선으로 한국을 관통케 하는 한편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러시아가 부설한 만주철도를 양여 받아 대륙침략의 길까지 열었다.

일본은 그렇게 형성한 철도를 그들 국내철도는 물론 우리나라의 경부·경의선과 중국의 만주철도까지 국유화하여 일본 정부의 철도원(뒤에는 철도성)이 관장했다. 그 국유화는 정부가 일관된 침략정책을 수행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일본 도쿄(東京)에서 산 기차표 한 장으로 일본 본토에서 관부연락선을 거쳐 한국을 통과하여 만주의 하얼빈까지 오갈 수 있었다. 관부연락선도 일본 철도성 소속이 되어 여객선이라 하지 않고 시모노세키인 하관(下關)과 부산 사이 철도를 연락하는 선박이라 하여 '관부연락선'이라 이름했다.

관부연락선에 붙여진 이름들

연락선이 그들이 꾀한 착취와 침략을 위한 인력과 물자를 수송하기 위한 뱃길이라는 것은 연락선에 붙여진 이름에서도 알 수 있다.

1905년 첫취항의 연락선 이름은 일기환(壹岐丸)이었고 2차 취항선은 대마환(對馬丸·1천600t)이었는데 그 배의 이름은 현해탄에 위치한 그들 섬의 이름을 땄다. 그러나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한 뒤의 1913년 취항한 배는 고려환(高麗丸·3천28t), 신라환(新羅丸·3천20t)으로 우리나라에 있었던 지난날 왕조명을 따고, 1922∼23년 취항의 배는 경복환(景福丸·3천620t), 덕수환(德壽丸·3천600t), 창경환(昌慶丸·3천620t) 등 서울에 있던 옛 궁성의 이름을 따서 그들이 가진 침략과 점거의 사실을 과시했다.

중국을 침략할 때인 1936∼37년 취항의 배에는 중국 흥안산맥의 이름을 딴 흥안환(興安丸·7천80t), 천산산맥을 딴 천산환(天山丸·7천907t), 곤륜산맥을 딴 곤륜환(崑崙丸·7천908t)으로 그 방향을 대륙의 산과 산맥의 이름을 배의 이름으로 삼았다. 그렇게 배의 이름을 그들이 말하는 국력의 진출방향으로 잡은 것은 국민적 기상을 고조시키려는 군국주의적 발상이었다.

한 많은 식민지 백성의 비애

연락선을 타고 일본에서 부산으로 오는 사람은 일본의 책략에 따라 우리나라와 대륙을 침략하려는 야망에의 일본인이었다. 그 반면 부산에서 일본으로 건너가는 사람은 우리의 노동자가 많았다. 1910년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제점유를 한 뒤는 일제가 토지조사라는 명목으로 국유지 또는 하천부지를 경작하고 있는 농민의 농지나 그 조사에 응하지 않은 토지는 국가에 환수되거나 일본이 식민지 정책으로 설립한 '동양척식주식회사'에 귀속됐다. 그 토지조사에 휘말려 농토를 잃은 농민은 일본으로 건너가 날품팔이라도 해야 하겠다고 연락선을 탄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1923년 9월 1일 일본에서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이 일어났다. 그 지진으로 일본국민이 동요하자 일본 위정자는 수습책으로 조선사람이 이 혼란을 타서 '불을 지른다', '우물에 독약을 풀었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했다. 그 여파로 재일동포의 수난과 함께 일본도항이 금지됐다. 그러나 그들은 대지진 후의 복구가 필요했다. 일본정부는 1923년 12월 우리나라 사람을 거주지 경찰서에서 발행하는 도항증이 있으면 받아들인다는 것이었다. 일본인은 도항증 없이 자유로이 오갔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나라 사람과 일본사람의 생김새가 비슷하여 그 구별이 어려웠다.

관부연락선과 민족적 차별

도항증제도가 생기고 맨 먼저 생겨난 말이 '센징'이었다. 부두 개찰구에서 도항증 없이 연락선을 타려는 우리나라 사람을 단속하는 일본경찰이 '조선인'이라는 일본말 '조오센징'을 줄여 '센징'이라 했다. 말하자면 "당신은 도항증을 가져야 하는 조선사람이 아니냐"는 뜻이었다. 그렇게 개찰구에서 경관이 일컫던 '센징'이라는 말은 뒷날 우리나라 사람을 얕잡아보는 비하(卑下)의 말이 되어갔다.

도항증을 가지지 않은 우리나라 사람을 색출하기 위해서는 일본경찰이 '37원(圓)' '94전(錢)' 같은 숫자를 써서 그것을 일본말로 읽어보라는 같잖은 짓거리도 했다. 어느 일본인은 조선사람으로 오인되어 경관과 실랑이가 벌어졌는데 그 아들이 '오도오쌍(아버지라는 일본말)' 하고 달려드는 바람에 진짜 일본사람으로 확인되는 난센스도 있었다.

조선사람 차별 심각… 배 이름에 담긴 일본의 침략 야망

일제 말기 일본의 S대학 법과를 다니던 K씨는 그들에게 시원스런 앙갚음을 한 바도 있었다. 그 때의 일본 유학생은 학생증을 제시하면 승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학생에 대해서는 그들이 말하는 불온 사상자 색출을 위한 사복경찰의 눈이 날카로웠다. K씨는 남보다 좀 험상궂다고 할 그 얼굴 바탕 때문인지 오고가는 방학 때마다 소지품 검색으로 곤욕을 치렀다. 부아가 날 만도 했다. 그는 "이번에는 …" 하고 가져갈 트렁크에 구린내와 고린내가 지독한 옷가지와 내복 양말 수건 따위를 가득 넣었다.

부산에서 내릴 때였다. 그는 짐짓 수상한 행동을 가장 했다. 아닌 게 아니라 경찰이 트렁크를 뒤졌다. 트렁크 안에서 구린내와 고린내가 진통했다. 때에 절인 내복에서는 이가 득실거렸다. 경관이 "아, 이 고린내 지린내" 하고 하나하나 잡히는 대로 내던졌다. 내던져진 그 아래는 바다였다. 바다에 내던져진 옷가지는 거둘 수도 없었다.

한 유학생의 통쾌한 복수

그 때의 경찰은 생사여탈권이라도 가진 양 안하무인의 거만이었다. K씨는 잘 걸렸다 싶었다. 그가 가진 법률지식을 총동원하여 공권력을 빙자한 민간인 사물(私物) 탈취(奪取)로 그 경관을 부산검찰국에 고발했다. 고발자 K씨는 고향의 어머니는 돌아오는 아들의 옷가지를 빨고 깁고 하며 손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요 보람인데 낙과 보람을 탈취 당했다는 것이었다.

탈취한 옷가지와 꼭 같은 것으로 변상하는 동시에 위자료 얼마를 내라는 것이었다. K씨는 친구집에 머물면서 형사사건에 해당하는 이 사건을 즉시 처리하라 독촉했다. 마침내는 부산검사국에 근무하는 대학 선배가 중재로 나섰다. 그 중재는 그렇게 버려진 것은 피의자가 신품으로 변상하겠다는 것이었다. K씨는 선후배의 의리가 난처해졌다. 경찰관이 마련해 온 양말 팬티 내복 양복까지 새것으로 되돌려 받아 산뜻한 신사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처럼 우리나라 사람들을 울린 관부연락선은 40년 간 이어오다가 1945년 8월 15일 우리의 광복과 함께 막을 내렸다.

작성자
부산이야기 2006년 1·2월호
작성일자
2013-08-02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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