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목숨은 누구나 소중한 것이여!
아미동 젊은이와 왜관 왜인들
- 내용
- 부산에 왜관이 설치된 것은 조선조인 1407년이었다. 왜관이란 왜인(당시는 일본인을 왜인이라 했다)들이 장사할 물건을 가지고 와서 이곳에서 팔고, 이 곳의 물건을 사들여 가는 상행위로 요즘의 '무역'과도 같은 것이었다. - 그 왜관은 부산에서 지금의 부산진시장 부근, 그리고 동구 수정동의 고관으로 옮겨졌다가 1678년에는 용두산 주위가 되는 지금의 동광동, 광복동, 신창동 쪽으로 옮겨졌다. 
 - 일본인 거주지 왜관 - 이때의 용두산 주위는 지금처럼 바다가 매립되기 전으로 깎아지른 듯한 산비탈로 사람이 살지 않았다. 그렇게 바닷가 외진 곳인 산비탈을 깎아 왜관을 세운 것은 왜관에 머물 왜인과 우리나라 사람의 접촉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 그 왜관은 33만㎢나 되었는데 둘레에는 담을 둘러 왜인이 함부로 왜관 밖으로 나오지 못하면서 장사인 상행위는 왜관 안에서 하도록 되어 있었다. 왜관 안의 왜인이 담 밖으로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왜관 밖이 되는 복병산(伏兵山 : 현 남성여고가 있고, 옛 부산기상대가 있었던 산)에 우리 군사가 왜관 왜인을 지키기 위해 복병막(伏兵幕)을 두었는데 그 복병막이 여섯 군데나 되었다. - 그렇게 우리 군사가 지키는데도 왜관 안의 왜인들이 왜관 가까이에 있는 우리 주거지까지 개인 또는 집단으로 숨어들어 비밀리에 장사를 한다든가, 여자를 희롱한다든가, 집에 들어 물건을 훔친다든가, 닭 같은 가금류를 잡아간다든가 하는 민폐를 끼쳤다. - 그때 왜관과 우리나라 사람이 가장 가깝게 산 곳은 지금의 부평동 지역에 몇 집 있었는데 그곳으로 왜관 왜인들이 작당으로 침입하여 민폐를 끼치는 경우가 있었다. - 그곳은 왜관 서쪽이 되어 복병막과 왜관의 수문(守門)이 멀어 경계가 허술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동래부에서는 한일 간의 마찰을 없애기 위해 부평동에 살던 사람을 지금의 아미동 쪽으로 이주를 시켰다. - 그런 뒤 아미동에 이사를 갔던 젊은이는 왜관의 왜인들만 보면 집단으로 돌을 던져 한사코 싸웠다. 아미동 젊은이는 집단이었고 왜관 왜인들도 집단인 경우가 많아 험악한 상황을 보이기도 했다. - 이 이야기는 왜관의 조선어 통역인 오다이쿠고로오(小田幾五郞)가 쓴 '초량화집(草梁話集)'에 나오는 이야기고 보면 1700년대 후반으로 여겨진다. 
 - 나라의 말(馬) 길러내던 국마장 '영도' - 그러했던 조선조 때 지금의 영도(影島)는 절영도(絶影島)라 하여 나라에서 말을 길러내는 국마장(國馬場)이 되어 있었다. - 조선조 때는 말의 수요가 많았다. 전쟁터의 전쟁마당에 쓰는 전마(戰馬), 사람이 타는 승마(乘馬), 역(驛)에 두어 역과 역으로 공문을 전달하고 정부 관리의 출장 때 정부 관리가 탈 수 있게 제공해 주는 역마(驛馬), 짐을 운반하는데 쓰는 역마(役馬) 등 쓰임새가 많았다. - 그렇게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말은 주로 제주도 강화도 거제도 완도 돌산도 절영도 같은 섬에서 길렀다. - 말은 묶어서 기르는 것이 아니고 놓아서 기르는 방목(放牧)이어야 하는데 육지에서 기르면 달아나기 때문에 주위가 바다로 달아날 수 없는 섬에서 길러졌다. - 지금의 영도도 조선시대에는 이름 있는 국마장이었다. - 이 국마장으로는 해마다 정부의 목자(牧子)가 와서 말에 등급을 매겨 낙인을 찍어 두었다가 정부의 필요에 따라 서울로 끌고 갔다. 그런데 어느 해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절영도의 말을 육지로 실어내어야 할 일이 있었다. 그게 서울로 끌고 갈 말이었을 것이다. 그 때 아미동 젊은이가 그 말을 배에 싣고 내리는 일을 맡았다. 
 - 사람과 말 생명 구한 대마도 청년 - 그렇게 배에 싣는 자리는 영도의, 지금의 봉래동 옛 나루터였을 것이고 육지에 내려야 할 자리는 지금의 중앙동의 영도대교와 부산대교 사이의 옛 나루터였을 것이다. - 그런데 배가 바다 한중간에서 뒤집혀 말과 사람이 물 속으로 곤두박질치는 사고가 일어났다. 이쪽 육지에 가까운 쪽이 바로 그 때 있었던 왜관이었다. 왜관 왜인들이 보니 사람과 말이 물 속에서 뒤섞여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 왜관 왜인들은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왜인들은 대마도 섬에서 온 젊은이가 대부분이었다. 바다일에 익숙했다. - 왜인들이 바다로 달려 내려 사람은 물론 말까지 말끔히 구해냈다. 그때로부터 아미동 젊은이는 왜관 왜인도 쓰일 데가 있다고, 그 때 만일 저네들이 아니었음 사람과 말이 어쩔번 했느냐고, 그 이후부터는 돌멩이 내던지는 싸움이 없어졌다고 한다.   
- 작성자
- 부산이야기 2003년 11·12월호
- 작성일자
- 2013-04-30
- 자료출처
- 부산이라좋다
- 제호
-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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