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어사 남쪽 산등 ‘남산동’
부산의 지명 유래 - 금정구의 동명
- 내용
- 오늘날의 금정구는 동래도호부 시대에는 동래부 북면(北面)이 된다. 동래부지(1740년 발간)에 의하면 북면에는 부곡리(釜谷里) 선동(仙洞) 두구리(豆口里) 작장리(鵲掌里) 소산리(蘇山里) 남산리(南山里) 구세리(仇世里) 장전리(長箭里) 산성리(山城里)로 되어 있다. 1868년에도 북면에는 변동이 없다. - 구한말의 1904년에는 금양동(錦陽洞) 기찰동(機察洞) 현동(賢洞) 하정동(河亭洞) 신천동(伸川洞) 부내동(敷內洞) 태두동(太荳洞) 중리동(中里洞) 죽전동(竹田洞) 송정동(送亭洞) 노포리(老圃里) 청룡동(靑龍洞) 두실리(斗實里) 등 세분화된 동리명이 생기면서 종전의 두구리(豆口里)가 두구동(杜邱洞)으로, 소산리(蘇山里)가 소정리(蘇亭里)로 구세리(仇世里)가 구서동(久瑞洞)으로 표기가 바뀌고 종전의 선동, 작장동, 장전동, 산성리는 그대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 과거의 북면인 현재의 금정구는 금사동 금성동 남산동 노포동 두구동 부곡동 서동 선동 오륜동 장전동 청룡동 회동동이다. - 이 가운데 금사동(錦絲洞)은 조선시대에는 동상면(東上面)에 속한 지역으로 자연마을인 금천(錦川)마을과 사천(絲川 : 실내)마을이 일제 초기에 합쳐지면서 그 첫 글자를 따서 동명 '금사'라 한 것이다. - 금성동(金城洞)은 금정산성 안의 마을이 되어 산성리(山城里)라 하다가 일제 초기에 금정산성의 '금'과 '성'을 따서 금성동이 됐다. - 구서동(久瑞洞)은 본래는 구세리(仇世里)라 했는데 중국 당나라의 장공예(張公藝)는 9대(代)가 한집에 살아 집안이 화목했다는 '구세동거(九世同居)'에서 왔다는 말이 있다. 또 하나는 굿판, 굿터에서 온 말로 이 마을 위의 금정산에 가물 때 비오기를 비는 기우소(祈雨所)인 번우암(飜雨岩)이 있어 구세(仇世)라 했다가 뜻이 좋은 한자 구서(久瑞)로 바꾸었다고 한다. - 남산동(南山洞)은 '범어사의 남쪽 산등'이란 뜻으로 남산동이 되었다고 한다. - 노포동(老圃洞)은 작장리(鵲掌里)와 소산리(蘇山里)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노포동의 노포란 '농사를 잘 짓는 농부'를 뜻한다. 이곳에는 농토가 풍부한데도 원인이 있을 것이다. - 두구동(杜邱洞)은 두구리(豆口里)로 썼던 마을이다. 부내리(敷內里) 태두리(太荳里) 중리(中里) 죽전리(竹田里) 송정리(送亭里)라 한 그 마을이 모두 두구동에 속하게 됐는데 처음의 두구리는 이름이 속되다 하여 조선말에 두구동(杜邱洞)으로 바꾸었다. - 부곡동(釜谷洞)은 금양동(錦陽洞) 기찰동(機察洞)이 금곡동에 속하게 되었다. 부곡동이란 이름은 '가마실'을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부곡동에서 서동(書洞)으로 넘어가는 산 모양이 가마솥 모양이 되어 그리 말한 것으로 본다. 
- 작성자
- 부산이야기 2003년 9·10월호
- 작성일자
- 2013-04-23
- 자료출처
- 부산이라좋다
-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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