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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병원→음식점→장교숙소→치안대→예식장

이야기 한마당 - 초량 백제병원

내용

초량의 부산본역 앞 중앙로를 건넌 자리에 초량외국인상가라는 아치형 간판이 있는 그 골목에서 북쪽으로 난 두 번째 골목을 따라 오른쪽으로 100m쯤 간 자리에 낡은 벽돌 4층집이 있다. 지금은 아래층 입구에 슈퍼마켓, 국수집 들이 있고 간판은 관음정사 천도원 등과 함께 갖가지 상사와 유통업체의 이름이 있다.

대지 407㎡의 이 집은 일본 오가야마의전(岡山醫專)을 나온 강서구 명지동 출신 최용해(崔鏞海)가 부산에서, 1930년 우리나라 민간인 최초로, 종합병원인 백제병원(百濟病院)을 열었던 집이다. 그 당시는 5층집으로 초량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고층건물로 부산부립병원, 철도병원과 함께 3대(大) 병원으로 불리었다.

민간인 최초 종합병원 '백제병원'

최용해는 일본에서 공부할 때의 애인인 오호이소(大磯)란 일본여자와 결혼하여 초량의 목조건물에서 1922년 병원을 개업했으나 그에 만족하지 않고 본인의 재산과 일본에 있는 장인의 도움, 동양척식회사의 돈을 빌어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을 세웠던 것이다

그는 대인관계가 원만했고, 병원 진료진으로 독일인 의사와 일본인 의사를 초빙하여 진료계의 신망뿐 아니라 일반 진료계에서도 명성이 높았다.

그는 호사가적(好事家的) 성격으로 라디오가 막 들어왔을 그때 라디오 조립 기술까지 익혀 스피커를 통해 이웃 주민들에게 들려주고 인근 초등학교를 돌며 라디오가 가진 신기함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그가 저지른 호사가로서의 큰 실수는 부산경찰서 간부의 주선으로 행려병자(行旅病者)의 시체 1구를 인수하여 해골표본을 만들어 5층 병실에 보관한 일이었다.

이 일로 "저 병원에서는 사람의 가죽과 살을 벗긴 해골을 보관하고 있다", "그 해골은 그 병원에서 죽은 사람이란다" 하는 말이 퍼졌다.

그러한 말이 여론으로 들끓자 손님이 뚝 끊어지고 경찰의 심문까지 받게 되었다. 그렇게 된 것은 한국인의 개인병원이 번창한데 대한 일본인의 시기와 함께, 한국입장에서는 일본인 여자를 아내로 삼고 있는데 대한 거부감도 있었다.

그 해골은 허가를 받지 않은 인체표본이 되어 인권을 모독한 것도 사실이었다.
 

백제병원장 최용해의 야반도주

비등한 여론에 손님이 끊기고 병원경영이 어려워진데다 집을 짓느라 빌린 부채의 독촉이 심했다. 그 곤경을 이기지 못한 그는 1932년 가족과 야간도주하다시피 부산을 떠나 처가가 있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의 나이 39세 때였다.

그가 자취를 감추자 채권자인 동양척식회사가 중국인 양모민(楊牟民)에게 그 5층집을 공매입찰로 팔아 빚을 회수했다.

양모민은 백제병원에다 봉래각(蓬萊閣)이란 중국요리집을 차렸다. 1930년대 중반인 이 무렵에는 초량에 봉래기생조합이 성황을 이룰 때였다. 금만가(金滿家)와 기생의 출입으로 봉래각이 때맞은 호황을 이루면서 중국요리를 좋아하는 일반 손님인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 들도 많이 찾아들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격렬해지자 일본이 중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터라 중국인 양모민은 일본인 세력에 견뎌낼 재간이 없어 1942년 봉래각을 처분하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봉래각이 문을 닫자 그것을 기다리고 있기나 한듯 부산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아까쯔끼부대(曉部隊)가 접수하여 장교숙소로 삼았다.

1945년 광복을 보자 일본학병으로 갔던 한국인이 돌아와 남아 있는 일본군 아까쯔끼부대 장교와 총격전까지 벌여 일본장교를 쫓아냈다.
 

중국집·치안대 사무실·예식장으로

일본장교를 쫓아내자 광복 후의 혼란을 다스리기 위해 형성된 학병출신이 주축이 된 치안대가 이 곳을 근거지로 치안대 사무실을 삼았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개인에게 불하되어 3층이 신세계예식장이 되었다. 그 때의 신식결혼은 공회당이나 학교를 빌어 했는데 전문 예식장이 생기자 이 또한 성황을 이뤘다.

1972년에는 예식장에 화재가 일어나 3·4·5층은 내부가 불타 5층은 철거하고 3·4층은 개조하여 탁구장, 당구장으로 쓰고 있으나 1·2층은 옛 그대로의 구조에 벽과 문과 계단도 완전하여 여러 업체가 들어 있다.

오늘날 갖가지 용도의 업체가 들어와 있는 초랑2동 467번지의 이 건물은 73년을 지내는 동안 한국인 종합병원에서, 중국인의 중국요리점으로, 일본인 장교 숙소로, 우리의 치안대 사무실로, 결혼예식장으로, 부산이 가진 역사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작성자
부산이야기 2003년 9·10월호
작성일자
2013-04-23
자료출처
다이내믹부산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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