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크게 부는 포구 ‘대평동’
부산의 남쪽 항구 ‘남항동’… 옛 이름은 ‘석말추’
부산의 지명 유래 - 동삼동 대평동 남항동 대교동
- 내용
동삼동(東三洞)은 본래의 상리(上里 : 웃서발<上西跋>), 중리(中里 : 검정바우<黑岩>), 하리(下里 : 아래서발<下西跋>)의 3개 자연마을이 합쳐진 마을이다.
영도의 동(東)쪽 삼(三)개 마을이 하나의 동(洞)을 이루었다 하여 일제강점기 동산정(東山町)이라 부르던 이름을 1947년 우리 이름으로 고칠 때 본래의 이름 동삼동으로 되돌렸다.
대평동(大平洞)은 원래는 '바람이 이는 포구'라고 풍발포(風發浦)라 불러왔다. 이 풍발포는 한자음으로 발음하기 어렵고 생소한 느낌이 있어 대풍포(大風浦)라고도 했다. 대풍포는 바람이 크게 부는 포구라는 뜻이었다.
이 대풍포는 또 바람에 대비하여 배를 대피(待避) 시키는 포구라 하여 기다릴 대(待)의 대풍포(待風浦)로 쓰기도 했다.
광복 이후인 1947년 일제강점기의 이름 갑정(岬町)을 우리말 이름으로 고칠 때 대풍(大風)의 풍을 평(平)으로 바꾸어 대평동이라 했다. 풍을 평으로 바꾼 것은 파도와 바람이 잔잔하기를 바라는 염원에서의 일이었다.
남항동(南港洞)은 마을 이름이 붙여지지 않았을 때는 석말추(石末湫)라 했다.
석말추의 석말(石末)은 '돌끝'이란 뜻이고 추(湫)는 '늪추'로 '늪'이란 뜻이다. 이 지역 앞바다에 큰돌이 있어서 썰물 때는 돌끝이 조금 보였다가 밀물 때는 보이지 않아서 그런 이름을 가졌다.
1947년 일제강점기의 일본식 이름 석견정(汐見町)을 우리 이름으로 고칠 때 부산의 남쪽 항구인 남항을 끼고 있다고 남항동이라 했다.
대교동(大橋洞)은 그 대부분(약 60%)이 영도대교가 가설될 때 바다가 매축돼 이루어진 곳이다.
일제강점기인 1934년 영도대교가 개통되자 지명으로 대교통(大橋通) 1, 2, 3, 4, 5 정목(町目)의 명칭이 생겨났는데 대교통 1, 2, 3 정목은 오늘날의 중앙동쪽이고 4, 5 정목은 바다를 건넌 영도 쪽이었다.
광복후인 1947년에는 영도 쪽인 대교통 4, 5 정목을 대교동(大橋洞) 4, 5가(街)로 고쳤다. 1982년에는 대교동 1, 2가로 고쳤다.
- 작성자
- 부산이야기 2002년 11·12월호
- 작성일자
- 2013-04-02
- 자료출처
- 부산이라좋다
-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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