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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제1562호 기획연재

문화회관, 동명목재 아픔이 낳은 큰 선물

제3화 문화시설 짓고 가꿔 문화불모지 오명 벗다 ⑥

내용
1988년 개관한 부산문화회관은 25년이 흐른 지금 부산문화의 산실로 우뚝 섰다. 부산문화회관은 동명목재 환수 재산 65억원을 발판으로 지어졌다. 영국 테임스강변 국립극장을 모델로 했다(사진은 부산문화회관 전경).

동명목재 환수 재산 65억 발판

영국 테임스강변 국립극장 모델

한나절 기획, 국보위 결재 받아

개관 25년, 부산문화 산실 우뚝

 

오늘날 부산문화회관이 없었더라면, 부산은 문화적으로 얼마나 삭막할까. 상상도 못할 문화충격일 게 뻔하다. 부산문화회관을 짓기까지 웃지 못 할 뒷이야기가 많다. 사회·정치적으로 가슴 저미는 사연, 공직자간 갈등관계도 스며 있다.

1980년 초 ‘전두환 군사정권’이 부산 경제계에 안긴 가장 큰 상처는 동명목재 해체와 국제상사 공중분해였다. 동명목재가 악덕 부실기업으로 몰리면서 부산시에 떨어진 돈이 있었다. 고 강석진 회장의 부인 고고화 여사의 재산 65억원이었다.

당시 부산시장은 손재식 씨. 손 시장은 이 돈을 부산시민을 위해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라고 사회과장 S씨에게 지시하며, 문화재과장에겐 부산문화회관 건립방안도 수립해 올 것을 통보토록 했다. 그러나 S과장은 문화재과장에게 시장의 방침을 전달하지 않았다. 사회과 소관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욕심이 앞선 까닭이었다. 부산시로선 시민을 위한 그럴듯한 사업 하나를 만들어 다음날 오후 4시까지로 정해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전두환 상임위원장의 결재를 받아야만 했다. 하루 만에 사업계획을 세워 다음날 결재를 끝내야 하는 ‘무자비’한 일정이었다.

S과장은 자신의 소관업무와 관련한 11가지 사업안을 만들어 밤 9시쯤 시장에게 보고를 시작했다. 손 시장은 그러나 S과장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지시한 문화회관 건립안이 빠졌기 때문이었다. 문화회관 건립계획서를 세워오라는 재 지시가 떨어졌다. 사회과의 11가지 안은 당연히 무산이 되었다. 당시 부산시 문화재과장은 김부환 씨. 그는 이때까지도 이런 정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서슬 퍼런 국보위 결재시간이 정해져 있는데도, 문화회관 계획서를 세워오라는 시장의 지시를 전달하지 않은 터였다.

국보위 결재를 받아야 하는 다음날, 아침 7시쯤 김 과장 집으로 다급한 전화가 한통 걸려왔다. S과장이었다. 시장 결재를 받지 못한 앞날 밤 9시에만 전화를 줬어도 좋았을 것을, 하룻밤을 거른 뒤 너스레를 떨었다.

“김 과장, 큰일 났어. 오늘 오후 4시로 국보위 결재시간이 정해져 있는데 문화회관 건립계획서를 작성해 보고하라는 시장님 지시가 있으니, 빨리 만들어 보고 드리라고….” 정말 황당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김 과장은 전화를 받는 즉시 시청으로 출근하면서 차안에서 계획안을 구상해 나갔다. 김부환 씨의 이야기다.

“사실, 언젠가 부산에 문화회관을 지을 경우를 예상하고 차근차근 자료를 수집하고 있었습니다. 가장 힘이 되어준 것이 종합예술 건축잡지인 ‘공간’이었어요. ‘공간’은 1966년 11월 창간 때부터 애독했는데 문화예술 분야 중 건축 쪽에 눈을 키워 주었습니다. 특히 세계에서 2천명 이상을 수용하는 종합문화예술 공연장 30곳을 소개한 특집기사는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는 부산에서 그런 공연장을 계획할 때 참고하기 위해 기사의 필요한 부분을 메모해두고, 기사를 스크랩하고 있었다. 만약 그러한 준비가 없었다면 문화회관 건립계획을 한나절 만에 세운다는 것은 애시당초 꿈도 꿀 수 없을 터였다. 최소한 자료조사에만 1주일 이상은 걸려야 할 것이었다. 사회과에서 그걸 염두에 두고 자기들은 계획서가 완료되어 바로 가져갈 수 있지만, 문화재과에서 촉박한 시간에 자료를 만들지 못할 터이니 결국은 자기들 안이 국보위로 갈 것이라 믿고 있었다.

김 과장은 출근하자마자 바로 스크랩해 둔 메모를 찾아 계획안을 만들기 시작했다. 모델은 영국 테임스강변에 있는 영국 국립극장. 15년의 철두철미한 시공과정을 통해 준공,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인상적인 국립극장이었다. 400석 규모 소극장은 아이들이 만화영화, 혹은 소품을 즐길 수 있는 어린이극장으로, 800석 전후의 중극장은 개인의 발표, 혹은 연극 전용으로, 1천500석 전후의 대극장은 오페라나 심포니를 공연할 수 있는 곳으로 조성하겠다는 안을 만들었다. 평범한 시민이 온 가족과 함께 예술의 향기를 누리는 아주 이상적인 극장이 기본안의 틀이었다.

순간적으로 안이 잡히지 않은 것은 대극장 무대의 크기와 객석 수였다. 독일이 통일 이후 쓰겠다는 계획아래 짓다가 통일의 어려움을 알고 축소한 베를린 오페라하우스의 경우 1천800석의 좌석을 보유하고 있었다. 무대가 객석보다 더 크고, 완벽한 음향시설을 갖춰 어떤 공연도 소화시킬 수 있는 이상적인 무대였다. 그러나 부산문화회관의 모델로 삼기에는 마뜩찮았다.

“무대에 대해서는 국내에 전문가가 없었고, 있다 하더라도 자문을 받을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궁여지책으로 300명 정도가 무대에서 연기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확정했습니다.”

좌석은 무조건 많아야 한다는 관념이 지배하던 시기였으나 훗날 관리문제를 생각하고, 관람인원을 고려해 1천500석을 적정수준으로 판단했다. 다음은 예산 문제. 아무리 낮추고 낮춰도 최소 120억원 이상이 들 것이란 계산이 나왔다. 그러나 시비가 60억원 이상 소요되면 당시 재정형편상 시장 결재조차 받기 어려울 것이란 판단이 들었다. 고심 끝에 '고고화 재산' 65억원에 시비 31억원을 더해 96억원으로 조정안을 마련했다. 안을 만들고 나니 오전 10시가 넘었다. 결재가 문제였다. 국장-부시장-시장 순으로 결재를 받아야 하는데, 부시장이 자리에 없었다.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은 L부시장이 초도순시차 신평에 나가 있었다. 아침도 거르고 오전 11시 30분쯤 현장으로 쫓아가 부시장 결재를, 점심시간을 미루고 기다리고 계시던 시장께 결재를 받은 시간이 오후 1시쯤이었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다’는 말을 이때처럼 실감나게 느껴본 적이 없었다. S과장은 오후 2시 비행기로 상경, 간신히 시간을 맞춰 오후 4시 국보위 결재를 받아왔다. 그것이 부산문화회관 건립의 시발점이었다.

작성자
박재관
작성일자
2013-01-30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부산이라좋다 제1562호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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