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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제1550호 기획연재

전시유물 기증받으려 열달 쫓아다녔다

부산시정 현대사 숨은 얘기를 찾다 - 제3화 문화시설 짓고 가꿔 문화불모지 오명 벗다3

내용

동양고무 고 현수명 회장…고미술품 대거 박물관 기증
귀한 유물 싸게 사기 위해 7년 넘게 국보지정 막아
곡절 끝 1978년 박물관 개관

부산시립박물관 건립공사는 1975년 11월 시작했다. 여전히 전시할 유물은 한점도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다. 박물관만 지어주면 전시유물을 차질없이 확보하겠다고 큰소리 땅땅 쳤던 당시 김부환 부산시 문화계장도 묘안이 없었다. 그의 기억이다.

"당시 부산에서 고미술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던 분은 동양고무의 현수명 회장, 강덕인 치과 원장, 김위상 소아과 원장, 함항연 내과 원장 순이었어요.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이 분들이 소장한 문화재를 기증받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먼저 현 회장을 만나 큰절이라도 할 요량이었지만, 만날 방법이 없었다. 2주에 한번씩 동양고무를 찾아가 면담요청을 했으나 벽은 높았다. 처음엔 수위한테 거절당하고, 그 다음에는 총무과 직원에게 사정했으나 줄이 닿지 않았다. 8개월 동안이나 끈질기게 찾아다닌 끝에 겨우 만난 사람은 총무부장. 현 회장을 만날 기회를 만들어주지 않으면 1주일에 한번, 그것도 안되면 회장 출근시간에 회사 앞에서 차를 가로막겠다고 생떼를 썼다.

부산박물관은 1975년 11월 건립공사를 시작해 착공 3년만인 1978년 7월 개관했다. 박물관 전시유물은 고 현수명 동양고무 회장 등이 고미술품을 대거 기증하는 등 부산시민의 자발적인 참여가 큰 힘을 보탰다(사진은 부산박물관).

드디어 10개월 만에 총무부장으로부터 답변 하나를 얻어냈다. "우리 회장님 고미술품 처리는 성창합판의 정태성 회장님께 일임했으니, 앞으로는 정 회장님과 상의하라"는 것이었다. 귀가 번쩍 뜨였다. 당시 정 회장은 한국문화재보호협회 부산시 회장이었고, 김 계장은 그 협회 간사여서 아침저녁 쉽게 만날 수 있는 분이었다.

부산박물관 개관 기사를 실은 다이내믹 부산(부산시보) 1978년 7월 11일자 기사.

"당장 우암동에 있던 성창합판으로 달려갔지요. 그간의 경과를 말씀드리고, 정 회장님께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반 어리광, 반 협박을 해댔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희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현 회장께서는 '내가 가진 고미술품은 부산시립박물관이 준공되면 부산시에 기증해달라'는 유언을 미리 남기셨다는 것이었다. 기증을 약속한 고미술품 총액은 당시 시가로 21억원 정도였다.

"현 회장님도 그렇지만, 더 감사드리고 싶은 분은 그 아드님인 현승훈 화승그룹 회장님입니다. 기증약속은 했지만 문화재등록 때 선친 유언대로 고스란히 소장품을 넘겨줄지 반신반의했거든요. 아버님이 애지중지 하던 유품에 애착 가지 않는 아들이 누가 있겠습니다. 그런데도 현승훈 회장께서는 목록 그대로 기증해 주셨어요. 한번도 뵌 적은 없지만 지금이라도 고맙단 말씀을 전하고 싶네요. 만약 부산시가 박물관을 짓지 않았다면 그 귀한 소장 문화재가 어디에 가 있을까? 생각할수록 가슴이 찡합니다."

강덕인, 김위상, 함항연 선생이 소장하던 고미술품들은 끝내 부산시립박물관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 1978년 박물관이 준공됐다. 착공 3년 만이었다. 박물관 준공과 함께 박물관후원회를 구성했다. 초대위원장으로 재계원로 김지태 씨를 위촉했다. 김 계장은 박물관을 짓는 사이 과장으로 승진했다.

"김 과장, 나를 박물관 후원회장으로 위촉했으니, 뭔가 보탬이 되어야 하겠는데, 나는 소장한 고미술품이 없소. 좋은 것이 있으면 가격을 묻지 말고 추천해 주시오."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평소 부산을 떠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던 오재균 선생의 소장품 '금동보살입상'을 즉석에서 추천했다. 다만 비싼 것이라 입을 떼지 못하고 한참을 머뭇거리다 "일억 정도 호가한다"고 우물거렸다. 김 위원장께선 2~3일 뒤에 답을 주겠다며 자리를 떴다.

'금동보살입상'은 통일신라시대 불상으로 명품 중의 명품이었다. 소장자인 오 선생은 일찍이 1971년 부산시를 통해 문화재관리국에 국보지정 신청을 해둔 상태였다. 국보로 지정되면 값이 엄청나게 뛸 것이었다. 이 때문에 김 과장은 부산시가 이 작품을 사들일 때까지 국보지정 심의를 미루도록 노력하며 7년을 버티고 있었다. 오 선생도 대충 사정을 파악한 듯, 독촉 대신 "김 과장, 심의과정이 너무 길어" 하고 옆구리를 찔렀고, 김 과장은 "워낙 명품이어서 감정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 같다"며 얼버무리곤 했다.

김지태 씨는 약속한지 사흘 째 되던 날 전화를 걸어왔다. "김 과장, 알다시피 나는 기업하는 사람이요, 부르는 대로 다 줄 수는 없으니 30%를 깎아 보시오. 대신 회사 돈이 아니고, 내 개인 돈으로 지급한다고 말씀드려 주시게." 난감했다. 당시 가치로 2억 이상이라 해도 할말이 없는 명품인데다, 오 선생의 인품을 잘 알고 있던 터였다. 동구 수정동도서관 옆 오 선생 댁을 찾아가 녹차만 계속 마셔대자 눈치 빠른 선생께서 할 이야기를 하라고 재촉했다. 죄송하다는 말을 앞세워 김 회장의 말을 전했다.

묵묵부답이던 오 선생은 2~3일 뒤 시청으로 찾아왔다. "김 과장, 국보지정 신청한지 7년이 지나도록 답이 없는 것은 전무후무할 것이요. 그동안 노심초사한 김 과장 심정도 이해합니다. 내 형편이 좋으면 처음 만드는 시립박물관에 기증해도 괜찮은데…. 시에서 관심을 가져주는 것도 고맙고, 시립박물관에 정착하면 제자리를 찾는 것이고, 나도 보고 싶을 때 언제든지 가서 볼 수 있으니 흔쾌히 응하겠소."

후문이지만 당시 오 선생은 1억2천만원에 해당하는 부동산과 '금동보살입상'을 바꾸는 거래 직전에서 큰 용단을 내린 것이었다. 만약 박물관 준공이 한두달만 늦었어도 불상은 부산에 있지 못했을 것이다. '금동보살입상'은 기증을 받자마자 문화재관리국을 독촉해 국보 200호로 지정받았다. 박물관이 구입한 '영태2년명납석제호' 역시 국보 233호로 지정, 박물관 위상을 높여주었다. 이후에도 관심을 가진 많은 시민들이 귀중한 문화재를 박물관에 기증했다. 그때 박물관을 짓지 않았다면, 지금 부산시립박물관이 소유한 문화유산들은 어디에 있을까?

작성자
박재관
작성일자
2012-11-07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부산이라좋다 제1550호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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