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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제1547호 기획연재

“부산박물관 지을 때 유물 한점 없었다”

부산시정 현대사 숨은 얘기를 찾다- 제3화·문화시설 짓고 가꿔 문화 불모지 오명 벗다2

내용

1970년대초 부산은 화랑이나 공연장, 미술관, 박물관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다. 부산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서울을 제외한 전국이 비슷한 수준이었다. 먹고 살기 빠듯했으니 문화는 뒷전이었다. 그랬던 부산에 천만뜻밖에도 문화계가 아닌 기업인의 입에서 박물관 건립요구가 불쑥 나왔다.

부산시의회 사무처장으로 정년퇴임한 김부환(73) 씨의 기억이다. 김 처장은 1970년 수출진흥과 6급 주사였다. 국가 지상목표인 수출 100억 달러 달성을 위해 전 국력을 쏟아 붓던 때였다. 당시 최두열 부산시장은 수출업체 사장들과 매달 수출진흥 조찬회를 열고, 애로사항을 들었다. 지금은 허물어져 주차장이 되어버린 광복동 입구 동양관광호텔이 조찬간담회 장소였다.

어느 날 조찬모임에서 당시 조선견직 김영구 사장이 시장께 한 건의는 참으로 생뚱맞았다. "시장님, 수출진흥을 위해 수도료·전기료를 깎아주시고, 저희 기업인들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허나 수출진흥을 진정 생각하신다면 먼저 박물관을 지어 주십시오."

1970년대 초 부산은 박물관 건립 꿈조차 꾸지 못했다. 뜻밖에도 수출진흥을 위해 박물관을 지어 달라는 기업인의 건의가 논의의 물꼬를 텄다. 부산박물관은 부산대 본관과 유엔묘지 정문을 설계한 김중업 선생이 당초 설계를 맡을 계획이었으나 중앙정부 압력으로 설계자가 바뀌었다(큰 사진은 부산박물관 전경).

이게 무슨 소린가? 수출진흥을 위해 박물관을 지어달라니. 시장 이하 공무원들은 물론, 기업인들조차 이 양반이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는가 싶어 서로 얼굴만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김 사장의 말이 이어졌다.

"시장님, 부산은 물론 대한민국은 수출 아니면 살아남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수출상품을 만드는 기술은 시간이 흐르면 평준화되고 맙니다. 그때 경쟁에서 가장 치열한 부분은 디자인일 것입니다. 상품의 디자인이 수출의 관건을 차지할 때가 곧 올 것입니다."

조선견직김 사장의 이야기는 이랬다. 부산에는 미술대학 하나 없고, 박물관·미술관도 없다. 파리 런던 뉴욕 도쿄 같은 선진국 대도시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박물관·미술관에서 미적 안목과 디자인 감각을 배우고 익힌다. 그곳에서 자란 아이들과 문화의 불모지에서 자란 부산아이들이 장차 예술적인 감각에서 경쟁이 되겠는가. 그러니 수출진흥을 위해 박물관을 세우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요지의 건의는 그러나 엉뚱한 소리로 끝나고 말았다. 귀담아 듣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김부환 씨는 그날 그 이야기가 가슴 깊이 박혔다고 한다. 그러나 어쩌랴. 아무 힘도 없는 6급 공무원이 그 거창한 일을 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로부터 4년쯤이 흐른 1974년, 김부환 씨가 문화계장으로 있을 때 부산대 공대교수로 재직 중이던 선배가 찾아왔다.

"김 계장, 기막힌 일이 있는데, 대학에 있는 우리로서는 할 수가 없다. 그러니 자네가 맡아주었으면 하네. 일본 오사카 공대에서 부산의 도시계획 도면을 요청해서 보내주었더니 반송이 되어 왔네. 그 이유는 계획도면에 박물관, 미술관이 모조리 빠져 있으니 엉터리라고, 삽입해서 다시 보내달라는 것이네."

말을 듣고 보니 기가 막혔다. 박영수 시장께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박물관 건립의 필요성을 말씀드리기 시작했다. 부산일보를 찾아가 언론 홍보도 부탁했다. 당시 부산일보 문화부장은 송재근 씨. 그에게 떼를 썼더니 부산일보는 '세계의 박물관' 시리즈를 시작했다. 분위기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부산박물관 전시실.

지성이면감천일까. 아니면 자신의 말대로 줄기차게 밀어붙인 '똥고집' 덕이었을까. 박영수 시장은 6억5천만원의 예산으로 3년 만에 부산시립박물관(현재의 부산박물관)을 짓는다는 결정을 내렸다. 예산도 그렇지만, 더 큰 문제는 전시유물 확보였다. 유물을 확보한 뒤 건물을 짓는 것이 원칙인데, 확보한 유물은 단 한점도 없었다. 전시유물 한점 없이 박물관을 짓겠다는 발상이나, 착공을 한 예는 박물관 역사에서 부산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터였다.

전시유물이 없으니 전시장 설계부터 뒤따르는 문제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시장께서 유물을 어떻게 확보할 것이냐고 묻는데 대답할 말이 있어야지요. 그러나 얼버무렸다가는 박물관 건립 승낙을 하지 않을 것이기에 자신있게 둘러대었습니다. 시장님, 건물만 지어 주신다면 제가 부산시의 배경을 가지고 준공할 때까지 유물을 확보하겠습니다. 국립박물관과 대학박물관, 소장가의 협조를 얻으면 전시유물은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답은 드렸지만 일개 부산시 문화계장이 무슨 수로 진열장을 채울 유물을 확보할 수 있다는 말인가. 고생의 시작은 여기부터였다. 당시 국립박물관장이던 최순우 선생께 협조를 구했다. 최 관장께선 부산박물관 유물확보에 적극 협조하겠다며 격려를 해주었다. 전국 최초로 지방자치단체가 건립하는 박물관이라 그 의미가 크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적으로 그에 의존할 수도, 의존해서도 안 될 상황이었다.

박물관건립소식이 알려지자 자천타천 박물관 설계를 맡겠다는 사람이 연줄을 대기 시작했다. 김부환 씨는 부산을 상징할 수 있고, 박물관 건물 그 자체를 보기 위해 부산을 찾을만한 멋진 건물을 지을 수 있는 사람으로 르코르뷔지에 문하에서 수학한 김중업 선생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는 부산대 본관(현재 인문관)과 유엔묘지 정문을 설계해 부산과 인연이 있는 분으로 당시 프랑스 파리에 체재 중이었다. 몇 차례나 당부를 하고 매달린 끝에 승낙이 떨어졌다. 부산시가 자신이 계획한 작품에 손대지 않고 100% 자기 안대로 해준다면 귀국해서 박물관 설계를 하겠다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 시장께 보고를 드리고 설계자를 확정하려는 순간 중앙정부로부터 외압이 들이닥쳤다. 전혀 생각지 못한 사람을 설계자로 내정, 박물관 본관을 설계토록 한 것이었다. 그것이 지금의 부산박물관이다. 그 바람에 3만3천㎡ 부지에 본관은 당시 시대상황을 반영하듯 권위적인 건물이 되었고, 5천㎡의 연면적에 전시실 1천157㎡이라는 초라한 건물이 되고 말았다. 부산이 더 나은 박물관 건물을 가질 운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작성자
박재관
작성일자
2012-10-17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부산이라좋다 제1547호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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