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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단색회화의 거장,허황 선생

예술부산 ‘예인탐방’ 25. 허황 선생

내용

허황 선생의 작업장은 광안리 해수욕장 입구 시티은행 3층에 있다. 필자가 보기에 대략 60여 평으로 보인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150호 상당의 큰 화판들이 벽에 기대어 작업을 기다리고 있었고, 바닥에는 100호 크기의 캔버스가 수십 점, 30호 상당의 캔버스 역시 수십 점 놓여 있었다. 익히 선생의 작품 성향을 알고 있었기는 했으나 작업실에서 본 작품은 캔버스인지, 흰색으로 밑칠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필자가 보기에는 흰 캔버스에 흰 물감으로 덧칠하였고 부분 적으로 엷은 파랑색이 보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10분, 20분이 지나면서 그림에는 핑크빛이 선명도를 더했다. 흰 캔버스에 흰 물감만 칠한 것이 아니었다. 보면 볼수록 밑면에 있는 깊은 색들이 배어나온다. 선생께서는 이것을 루미너스 특성이라고 한다. 밑에 먼저 칠한 색이 몇 주, 몇 달 동안 위로 우러나오는 특성이라고 한다. 이것이 다름 아닌 물감의 특성이다. 이 물감은 스스로 자신의 빛을 발하는 것이다.

선생께서 바닥에 놓인 이 그림을 두 달 동안 지켜보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조금씩 조금씩 발하는 루미너스 물감은 몇 주 몇 달이 지나면서 자신의 색을 보이고 있었다. 발하는 정도를 조절, 아니 억제하기 위하여 캔버스 위에 수십 번이고 흰색을 칠하는 것이다. 한 번, 두 번, 여러 번 칠함에 따라 발색 정도가 다르다. 루미너스 물감이 스스로 색빛을 조절한다. 물론 루미너스 특성이 그림의 전부는 아니다. 천연의 돌가루에 특수 본드를 섞어 만든 안료를 이용해 두터운 원, 사각형 모형이 화면의 일부를 근엄하게 차지한다. 얼핏 보기에 선생의 그림에 가장 시선이 먼저, 그리고 많이 가는 곳이다. 어찌 보면 선생의 그림은 이것만 보인다고 할 수도 있다. 물론 이 위에도 수십 번의 흰색이 덮쳐 있다. 그래서 선생은 반복의 미학자다.

선생은 15년 이상 이 재료를 사용해 왔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재료의 성질을 잘 알고 있다. 사실 선생의 작품은 이 재료의 성질이 잘 드러났느냐의 여부에 따라 작업의 성패가 좌우되기 때문에 재료의 성질은 그의 작품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다.

이런 선생의 그림에서는 단 하나의 단점이 있다. 아무리 사진을 잘 찍어도 인쇄되어 나오는 그림은 흰색밖에 보이지 않는다. 루미너스 특성이 살아나지 않는다. 그래서 일본의 한 평론가 겸 기획자가 “허 선생의 그림은 사진도 믿지 마세요. 인쇄도 믿지 마세요. 허 선생의 그림을 보고 싶은 사람은 전시장으로 오세요.”라고 했다고 한다.

선생은 부산의 토박이다. 부산 수정초등학교와 개성중학교를 거쳐 동아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 때에는 김대륜, 성백주, 김수석 선생께, 고등학교 시절에는 이석우, 이영일 선생께, 입시 시절은 미술학원에서 송혜수 선생께 배우는 등 부산의 많은 저명 화가에게 그림을 배웠다. 홍익대학교와 대학원을 마치고 서울에서 화실을 운영하다가 다시 고향 부산으로 돌아왔다. 부산으로 돌아올 무렵은 그가 이미 미술계의 스타가 된 시기였다. 이제는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제1회 ‘앙데팡당전’에서 선생께서 국가상을 받았다는 사실을. 흰색 바탕에 베개 모양의 이미지가 어렴풋이 남아있는 150호 3점을 출품했다. 이후에 선생의 그림에 등장하는 사각형은 대부분 베개 모양이거나 베개에서 연상된 것이라고 한다. 당시 선생의 나이 20대 중반이었다. 선생과 절친한 화우畵友로 지내는 이우환 선생과의 인연도 이 앙데팡당전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 전시에 이어 선생을 한국현대미술가와 단색회화의 거장으로 만든 전시가 있었다면, 1975년 동경에서 열렸던 한국 현대회화의 국적성과 정체성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켰던 ‘다섯 개의 백색’전에 초대된 이후부터다. 선생의 작품은 ‘단색 평면회화’의 한 유형으로 단골처럼 거론되어 왔다. 이전에는 세계 미술의 한 동향을 보여주는 전시였다면, 이 전시가 한국미술을 새롭게 보는 계기가 된 국제전이며 한국형 전시라 할 수 있었다.

이 당시가 선생께서 신라대학교(옛 부산여자대학교)에 강의를 나갈 때였다. 부산에 정착하면서 단색회화의 거장은 부산을 예술의 거장 도시로 만들려고 많이 노력했다. 부산비엔날레 운영위원장, 부산시립미술관 관장직 등을 통해 새로운 예술의 도시로 도약하게 했다.

그러나 바닥에 놓인 크고 작은 그림 수십 점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선생은 열성적으로 작업을 하는 작가다. 이제는, 이제는이라는 표현이 맞는 말일 것이다. 이전에는 신라대학교 교수, 부산미술협회 이사장, 부산국제아트페스티벌 운영위원장, 부산비엔날레 운영위원장, 부산시립미술관 관장이었기 때문이다. 정말 필자가 만난 선생은 작가였다. 매일같이 하루에 7~8시간씩 작업을 하는 작가다. 작업장 한 켠 책꽂이에 칸칸이 꽂혀있는 책처럼 그림들이 한 방 가득 꽂혀 있었다. 오늘도 필자와 인터뷰 뒤에는 지인의 전시가 있어 전시장에 갈 예정이라고 했다. 다른 작가들과의 만남으로 작가와의 애정을 가지며 미술계의 동향을 듣기도 들려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미술관 관장도 미술협회 이사장도 아닌, 물론 교수와 제자도 아닌 작가와 작가와의 피드백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미술인로서 사는 미술적 삶의 열정이다.

전술하였듯이 선생은 부산의 미술 발전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 이로 인해 부산에 남다른 애정도 가지고 있을 것이며, 하고픈 얘기도 많을 것이다. 얼마 전 신라대학교를 정년퇴임하셨으니 교수가 아닌 작가로서 앞으로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와 선생께서 부산의 젊은 작가에게 하고픈 말씀이 있다면? 필자의 질문에 자신은 젊은 작가와는 너무나 다른 작업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전에는 손의 역할을 바탕으로 아이디어, 이념을 중시하는 시대였다. 선생도 그런 시대의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나 현재의 젊은 작가들은 작가의 정신성, 미학보다는 기술에 의존하는 경향이 심하지 않나 하는 우려를 제기했다. 한국의 고질병처럼 ‘빨리 빨리’가 젊은 작가들에게 빨리 유명 작가가 되게 한다. 너무 이른 명성은 작가를 고독으로 몰고 갈 수 있다는 뜻이다.

반면 어려운 작가에겐 힘을 줄 수 있는 여건이 필요하다고 피력했다. 중국의 798같이, 광주가 문화도시로 선정되어 정부의 후원을 받듯이, 부산 역시 부산만을 위한 새로운 대안이 필요하다. 헤이리처럼 집단 창작촌으로 종합예술공간을 만들거나, 인천의 아트플랫폼과 같은 문화의 존이 활성화가 되어야 젊은 작가들이 작업을 할 수 있는 여건과 분위기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제는 지방과 중앙과의 문화 격차는 없어지고 있다. 학력과 그림의 질과도 상관이 없다. 개천에서 용이 나기는 어렵다. 그러나 용이 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필자는 받아들였다. 이를 위해서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 문화적 격차와 학력보다는 그림에 승부수를 띄우는,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노력과 노력을 받쳐줄 수 있는 사회, 문화적 여건이 필요하다.

선생은 이제 작업을 하고 싶다고 한다. 그리고 작품을 남기고 싶어 한다. 지금까지 개인전의 반 이상인 20여 회를 일본에서 가진 바 있지만, 앞으로도 가능하다면 해외에서 전시를 가지고 싶어 한다. 나이 때문에 오랫동안 해외에서 작업하기는 어렵고 2~3개월 정도 해외에서 작업을 하면서 전시를 하는 방식인 레지던시 프로그램과 같은 후원 프로그램이 있다면 좋겠다고 한다.

부산 시민들에게 모나리자를 가까이에서 보여주기 위해 부산시립박물관에서 모나리자 그림을 대여한다면 보험료만 약 1,300억 한다고 한다. 모나리자를 보고픈 사람은 프랑스까지 와야 하며 그것도 루브르박물관까지 오라는 말이다. 허 선생의 그림은 인쇄도 사진도 믿을 수 없다. 보고 싶은 사람은 직접 그림을 보기 위해 부산까지 와야 볼 수 있는, 모나리자와 같은 문화상품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글_구본호 / 부산대 강사

작성자
예술부산 2012년 1월호
작성일자
2012-10-16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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