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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제1543호 기획연재

"밀레전 유치했는데 전시장이 없었다"

부산시정 현대사 숨은 얘기를 찾다 - 제3화·문화시설 짓고 가꿔 문화 불모지 오명 벗다 1

내용

"전시회 안 열어주면 불매운동"
문화계장이 신문사 사장 협박
전시 유치했으나 전시장 없어
경찰경비 속 은행 강당서 열어

'문화의 불모지.' 1980년대까지만 해도 부산을 이야기할 때 빠짐없이 붙어 다니던 치욕스런 수식어다. 문화시설이 없다시피 했고, 제대로 된 문화인을 찾아보기 어렵던 때였다. 오명이 붙어도 달리 대항할 말이 마뜩찮았다. 6·25 전쟁통에 밀려든 피란민이 정착하면서 부산은 당장 먹고 입고 자는 문제가 시급했다. 그 뒤끝에 문화를 들먹이는 건 호사스런 입발림이었다.

마땅한 공간이 없으니 다방이 대화의 광장이었다. 광복동·남포동 다방들이 그나마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이었다. 다방 벽면은 미술작품이 걸리는 유일한 전시공간이었다. 부산시의회 사무처장으로 정년퇴임한 김부환(73) 씨의 머리 속엔 1960~80년대 부산시 문화행정이나 문화시설, 예술계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살아있다.

그는 특별한 이력을 가졌다. 36년 7개월을 부산시에 재직하는 동안 13년을 문화관련 부서에서 일했다. 3분의 1이 넘는 세월이다. 1968년부터 1982년까지 문화계장을 3번 맡았고, 문화재과장을 2차례 지냈으며, 문화공보담당관을 거쳤다. 한 사람이 동일한 조직에서 같은 계장을 2번 맡는 경우도 없는 터에 문화계장을 3번씩이나 맡은 것은 부산시 생기고 처음이다.

1970년대 부산은 '문화의 불모지'란 오명을 달고 다녔다. 변변한 전시장이나 공연장 하나 없던 시절이었다. 사진은 1970년대 초 중구 중앙동 반도호텔 부근 국제극장 주변. 권투시합 홍보차량과 40계단문화관이 보인다). 이원홍 씨 제공.

그는 자칭 '고집통'이다. “제가 고집이 좀 셉니다. 고집을 꺾지 않으니 상사하고 곧잘 부닥칩니다. 미움을 받아 다른 부서로 쫓겨 가면, 시장님께서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시 불러다 앉히곤 했지요. 제가 아는 것이 없었는데, 그나마 제가 없으면 문화관련 일이 안 돌아갔던 모양입니다. 다른 부서로 '쫓겨났다가' 몇 달 만에 잡혀오고를 몇 번이나 반복했습니다.”

1972년 '문화의 불모지' 부산에 혁명적인 일이 일어났다. 프랑스 대표적 사실주의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전을 유치한 것이다. 앞뒤는 이렇다. 그해 조선일보가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장 프랑수아 밀레전을 덕수궁미술관에 유치했다. 밀레의 그 유명한 '이삭 줍는 여인들' '만종' '씨 뿌리는 사람' 같은 명화를 보기 위해 각처에서 사람들이 몰렸다.

당시 부산시 문화계장 김부환 씨는 언론이나 문화예술인들조차 입만 열었다하면 '부산은 문화의 불모지' 운운하는 소리가 듣기 싫었다. 밀레전을 부산에 유치해보자 욕심을 냈다. 골머리를 싸매도 방안이 떠오르지 않자 조선일보 사장실로 대뜸 전화를 걸었다.

“사장님, 부산에도 조선일보 독자가 많습니다. 서울까지 온 밀레전을 부산에서 여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부산전시를 하도록 해주십시오.” 조선일보 사장께선 기가 차는지 대답이 없었다. “사장님, 부산에는 조선일보 독자가 없는 줄 아십니까? 부산전시를 안하겠다면 조선일보 불매운동을 벌이겠습니다.” 자신의 말대로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부산시의 일개 문화계장이 겁 없이 달려든 것이었다. 이 사실이 알려져 조선일보 부산시 출입기자에게도 곤욕을 치렀다.

우여곡절 끝에 밀레전 부산유치가 성사됐다. 그 다음이 더 가당찮았다. 부산에 전시실이 없었다. 대한민국 제2도시 부산에 전시실은커녕 이와 비슷한 시설조차도 없었다. 궁리 끝에 '중앙동 외환은행 강당', '동주여상 강당', 부산데파트 2층 '부산은행 강당' 등 3개 안을 마련했다. 당시 주한 프랑스대사관의 앙리 대사가 직접 와서 현지답사를 벌였고, 부산은행 강당에서 전시회를 여는 것으로 결정을 지었다.

부산데파트. 1972년 부산데파트 2층 부산은행 강당에서 프랑스 거장 밀레전을 열었다.

문제는 끝이 아니었다. 부산까지 작품을 수송해 와야 하는데 보험료를 담당할 스폰서나 예산이 없었다. 그림 한점 가격이 천문학적인데 만약에 한점이라도 잃어버리거나 하면 부산시가 책임을 져야 할 형편이었다. 거장의 그림이라 국가간의 문제도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시장님께 매달렸습니다. 당시 박영수 시장께서 내무부 치안국장을 지냈기에 잘만 하면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혼나는 것은 그 다음 문제고, 일단 일이 급했거든요. 시장님, 치안국장의 협조를 얻어 서울시경과 고속도로 사이드카가 운반을 책임지도록 좀 해주십시오.”

박 시장께선 선뜻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덕수궁에서 작품을 싣고 출발한 차량을 고속도로 사이드카가 각 시도 경계에서 서로 인수인계하는 방식으로 부산에 무사히 도착시켜 주었다. 밀레의 대표작 30~40점이 모두 부산에 온 것이다. 전시는 한 달. 전시장은 부산시경이 24시간 밀착경비를 맡아주었다. 경찰이 전시장 경비를 맡아준 것도 전무후무할 일이었다.

김부환 씨는 당시 프랑스 앙리 대사에게서 2가지를 배웠다고 한다. 전시회 문제로 앙리 대사는 부산을 3번 방문했다. 2번째 방문했을 때 주한프랑스 대사관에서 연락이 왔다. 본국에서 급한 훈령이 왔으니 빨리 대사를 찾아달라는 것이었다. 그때가 밤 10시. 당시 부산엔 외국인이 투숙할만한 곳이라곤 '극동호텔' 뿐이어서 금방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숙박자 명단에 앙리 대사가 없었다.

부산시경 협조를 얻어 부산시내 전 숙박시설을 조사하던 중 새벽 4시쯤 해운대의 한 여인숙에서 대사를 찾아냈다. 한 나라의 대사가 초라하기 짝이 없는 여인숙에 있다는 게 기절초풍할 일이었지만 대사는 담담했다. “내가 몇 개국의 영사, 대사를 거쳤는데 한국의 여인숙처럼 훈훈한 인정을 베푸는 곳은 없었소. 발을 씻으라고 따뜻한 물을 세숫대야에 담아 주인이 직접 가져다주는 곳이 여기 말고 또 있겠소?” 그래서 그는 지방 여행이나 출장 때 꼭 여인숙을 이용한다는 것이었다.

부산데파트 부산은행 강당을 전시실로 정하자 앙리 대사는 직접 팔을 걷어붙였다. 창문 커튼은 어떻게 해서 빛을 차단하고, A작품은 크기에 따라 이곳에 걸고, 조명은 어떤 밝기로 해서 몇 도로 비스듬하게 비추도록 하라고 세세히 설명하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프랑스 대사만이 가진 문화적 소양일까? 우리나라는 저 정도 위치의 공무원이 저만한 교양을 가지고 있을까? 나도 저런 문화적 교양을 배워 부끄러움은 면해야 되겠다.' 그는 그날 이렇게 다짐했다고 한다.

작성자
박재관
작성일자
2012-09-19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부산이라좋다 제1543호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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