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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캔버스 위에 '우리민족'을 그리다

예술부산 ‘예인탐방’ 20. 고故 김대륜 선생님

내용

“소화제 하나 묵고 가자.”

1987년 봄, 선생은 학교 앞 약국에 들르고 싶어 하셨다. 당시 선생의 집은 장전동, 필자는 부곡동이었기 때문에 다 떨어진 ‘포니’ 승용차를 갖고 있었던 필자가 곧잘 선생 댁을 거쳐 함께 출근하고 할 때였다.

가끔 소화제를 찾으시던 선생의 그 하소연은 머지않아 그가 대학(현 신라대학교의 전신이었던 부산여자대학) 학장이 되어 업무를 수행하던 중에 췌장암으로까지 진행된 위중한 경고였지만, 그때는 당신 자신마저도 그저 단순한 위장장애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1988년 6월 부산대학병원에서 췌장암 확진을 받고 수술을 위하여 서울대학병원으로 가시면서 “별 일이야 있겠나... 갔다 오께.” 애써 웃음 지으시며 필자를 향해  하신 이 말씀과 아쉬운 듯 지으신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수술을 마치고 내려오신 선생은 자택에서 2개월여 투병생활을 하시다가 그해 10월 25일에 수많은 미술인들과 학교의 전 교직원들의 애도 속에 유명을 달리하셨다.

 

선생은 1934년 부산 충무동에서 태어나서 부산고를 거쳐 1957년에 서울미대 회화과를 졸업했다. 부산고등학교, 부산개성중학교 등에서 1965년까지 교사를 하시다가 진주교육대학의 교수로 5년을 보내신 후, 1969년 후반 부산여자대학이 4년제로 승격되면서 발탁되어 오셔서 미술학과장, 교무과장, 학생처장, 교무처장 등의 주요 보직을 거쳐 1987년에 대학의 학장(지금의 총장)까지 되신 분이다.

선생을 가까이 해 본 사람이라면 그의 조용하고 온화하며 부드러운 성품, 바른 생각, 너그러운 인품, 모든 사람들을 품에 안고도 남을 포용력과 큰 스케일의 기획력, 남다른 행정능력, 게다가 대담한 특유의 추진력까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면서 전형적인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인물이라는 결론을 어렵지 않게 내리게 된다. 선생 특유의 외유내강성은 미술협회의 지부장을 연거푸 두 번에 걸쳐 하고 미술전공 교수로서는 드물게 한 대학의 최고 수장이 된 것만으로도 족히 가늠이 되지만, 지금도 그를 애석해하며 흠모하는 이가 적지 않음 역시 그의 인품과 능력의 출중함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바가 된다는 생각이다.

 

필자가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1977년 어느 날 KBS TV가 현대조각 작품 소개를 위하여 출연 요청이 있었을 때였는데, 선생이 작품의 해설가로 나오셨던 인연으로 서였다. 곧이어 필자는 부산여대의 강사가 되었고 2년 뒤 공채과정을 거쳐 전임강사가 되면서부터 선생이 유명을 달리 하실 때까지 가장 가까이에서 존경과 사랑을 주고받는 사이였던 것이 사실이다.

필자의 전임강사 시절만 돌이켜 보더라도 당시 오형근 학장을 비롯한 선배 교수들은 선생을 중심으로 교분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테니스장에서건 술집에서건 그가 빠지는 일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아마도 선생의 온화함과 긍정적인 성품이 자연스럽게 교분 사회의 중심 역할을 한 때문이었을 것이리라.

그때까지만 해도 선생은 그의 그런 위치 때문에, 작품을 해야겠다는 말씀은 자주 하셨지만 생각일 뿐, 캔버스 앞에는 거의 앉을 시간을 갖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현실이었다.

그러던 선생이 1979년 3월에 부산데파트 3층의 현대화랑에서 개인전을 갖기로 한 것이었다. 선생의 개인전 날짜는 3월 28일부터였는데, 2월말까지는 생각만 가다듬으셨는지 한 달 정도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야 연구실에 간이침대까지 들여 놓으시면서 “지금부터 작품 끝낼 때까지 아무도 안 만날 테니 협조를 부탁합니다.” 하시고는 작업에 들어가셨다. 하지만 쉴 새 없이 연구실 문을 두드리는 동료 교수들 때문에 꽤 고생을 하신 끝에 간신히 전시준비를 마칠 수 있었던 어려움이 있기도 하였다.

선생은 부산여대에 부임하자마자 만 7년을 학과장으로 있으면서 전국순회교내전을 개최하는 등 의욕적인 학과 운영을 통해 단숨에 미술학과가 대학의 간판학과가 되게 하였을 뿐 아니라 선생이 교무과장(현 교무처장)으로 계셨던 1979년에는 미술학과 80명, 공예학과 40명, 디자인학과 40명의 정원으로 한강 이남에서 가장 많은 미술학도를 수용하는 대학이 될 수 있게도 하였다.

당시와 관련하여 2004년에 발간된 「신라대학교50년사」는 다음과 같이 선생에 대하여 피력하고 있다. “다시 학과장에 보임된 김대륜 교수는 증강된 부산여대 미술계열 교수진으로 부산과 대구에서 첫 부산여대교수미전을 여는 한편, 교내전을 시민회관 1, 2층에 걸쳐 펼쳐 보인 것도 이 해부터였고, 교내체육대회를 3년 연속 우승하며 석권한 것도 이 무렵부터였으니 교내외적으로 미술학과의 기개가 한껏 돋보이는 시기였다.”

그랬었다. 선생은 항상 온화한 웃음의 소유자였지만 이미 대학 시절부터 알려진 주먹 실력과 술 실력에 걸맞는 대담한 공격적 기획력으로 무장이 잘된 인물이었던 것이다.

선생이 1983년 미협을 맡을 무렵 만해도 부산미협은 그저 한국미협부산지부의 역할이 고작이던 때여서 1975년에 당시 김창배 예총지부장이 박영수 부산시장을 움직여 그 태두를 보게 된 부산미술전람회(지금의 부산미술대전)를 제외하고는 거의 행사가 없었다. 선생이 맡으면서 미협은 예총과의 관계 정립은 물론, 부산시의 문예진흥기금마련초대전 등을 주관하면서 부산시의 행정력과 유기적인 관계를 성립시키며 획기적인 발전 역량을 키우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영호남 갈등이 표면화되던 1983년에 전남미협지부장과 의기투합을 해서 영·호남 교류전(1983년/광주, 1986년/부산)을 일구어 낸 것이나 1987년에는 부산시에서 6백만 원의 거금(?)을 지원받아 제1회 바다미술제를 시작한 것 하며, 1985년에는 열악한 재정 때문에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여러 사람이 말렸던 계간지 『부산미술』을 3번이나 발행하는 강행군도 서슴지 않으셨다.(당시 사무국장으로서 강력하게 반대의사를 굽히지 않았던 필자를 손병철로 교체하면서까지 집념을 보이셨던 『부산미술』은 그 뒤 선생의 자비까지 투입하다 못해 1986년 12월에 발행된 3호를 끝으로 폐간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참으로 대단한 분이셨다는 생각을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에도 지울 수가 없으니 선생과 나와의 인연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선생이 가시고 꼭 10년 뒤인 1997년, 윤석천 금정구청장이 필자에게 “김대륜 교수의 그림비를 세우는 것이 어떻겠느냐.”며 먼저 제안해 왔다. 윤석천 금정구청장은 선생이 미협을 맡고 계시던 당시에 부산시 문화계장으로서 그와 호흡을 맞추며 적극 도와주었던 인물로서 이후 필자와도 가까이 지내던 사이였다. 필자는 선생을 향한 그의 진심을 읽을 수 있었다. 장소와 재료비나 경비는 윤 청장이 해결하고 조형적 문제는 필자가 맡기로 하였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1998년 2월 16일 유가족과 친지는 물론 많은 미술계 인사들이 모인 범어사 밑 금정산 자락에서 ‘金大倫그림碑’가 윤 청장과 가족에 의해 제막되었다.

이제 이 글은 그 그림비의 비문에서 윤 청장이 선생을 추모한 다음으로써 끝내고자 한다.

 

“김대륜 선생은 1934년 4월 23일 부산에서 태어난 화가로서 그의 그림은 주로 민화적 소재를 데포름하여 전개시키거나 캔버스 위에 원초적인 인간상념의 형상을  소박하게 표현해 우리민족의 정서를 가장 간결하고 설득력 있게 표현한 화가로 평가할 만한 인물이다.

선생은 부산여자대학(현 신라대) 미술학과 교수로 지내다가 한국미술협회 제19·20대 부산지부장을 역임하기도 하고 부산여자대학의 제7대 학장으로 지역미술계와 교육계에 크게 기여를 하다가 1988년 향년 55세의 한창 나이에 타계하셨다. 계간지 『부산미술』 발간과 ‘영호남미술인교류전’, ‘바다미술제’, ‘문예기금조성초대전’ 등은 미술계에 남긴 선생의 족적이다.

여기 선생의 그림과 더불어 인간 김대륜의 따듯한 인품 그리고 그의 업적을 기리는 뜻에서 이 비를 세운다.  1997년 12월 31일 금정구청장”

 

글_ 권달술/전 신라대 미술학과 교수, 조각가

작성자
예술부산 2011년 7/8월호
작성일자
2012-08-14
자료출처
다이내믹부산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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