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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옷 한 벌로 한겨울 보낸 정승, 황희

길에서 청렴을 만나다 ⑨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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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렴|
내용
바르고 외로운 일이 아니면 행하지 않고, 높은 관직에 있으면서도 꼿꼿하고 청빈한 조선 초의 명재상 황희.

황희는 백성을 아끼는 마음으로 일평생 청빈하게 살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황희를 아꼈던 세종은 어느 날, 황희가 정승이 되었음에도 쓰러져가는 초가에서 담장도 없이 살아 마당이 더럽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세종은 비밀리에 공조판서를 불러 그의 집 주변에 몰래 담장을 쌓으라고 지시했다. 공조판서는 건축업자 여러 명을 모아 비가 오는 밤 시간을 맞추어 황희의 집으로 갔다. 그러고는 서둘러 집 둘레에 담장을 쌓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한쪽의 담장이 무너지면서 황희가 방문을 열었다.

공조판서가 자초지종을 말하자 황희는 “백성들 가운데에는 가난하게 담장 없이 사는 사람들이 많다”며 세종에게 명을 거두어 달라고 청하였다. 이런 그의 청렴함에 세종과 다른 신료들은 크게 감복했다.

반구정(伴鷗亭)은 황희가 관직에서 물러나 갈매기를 벗 삼아 여생을 보내던 곳이다.

“제가 어찌 비단옷을 입겠습니까?”

그의 검소함을 보여주는 일화는 또 있다. 진눈깨비가 내리는 어느 겨울날, 퇴궐한 황희가 부인에게 말했다.

“부인, 서둘러 옷을 뜯어서 빨아주시오. 밤새 말리고 꿰매면 내일 아침 입궐할 때 입을 수 있을 것이오.”

영의정을 지내고 있었지만 황희의 겨울옷은 하나였다. 부인에게 옷을 벗어준 황희는 속옷차림으로 책을 뒤적이고 있었다. 그때 속히 입궐하라는 임금의 명이 내려졌다. 황희의 부인이 당황해하며 말했다.

“대감, 큰일 났습니다. 무얼 입고 입궐하신단 말입니까?”

황희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하는 수 없소. 그 솜을 이리 주시오.”
“솜이라니요?”
“바지저고리를 뜯어 빨았으면 솜이라도 있지 않겠소?”
“대감도 참 딱하십니다. 어느 안전이라고 글쎄, 솜만 입고 입궐하시겠단 말씀입니까?”
“어명이니 입궐하지 않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벌거벗은 채 관복만 걸칠 수는 없잖소.”

황희는 부인이 가져온 솜을 몸에 둘렀다. 실과 바늘로 솜을 얼기설기 잇고는 그 위에 관복을 덧입고 입궐했다.

국민권익위원회 청렴교육 자료.

그날 밤 세종은 영의정 이하 중신들을 불러놓고 경상도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칠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그런 세종의 눈에 황희의 관복 밑으로 비죽이 나온 하얀 것이 보였다. 세종은 양털인 줄 알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것 참 이상하다. 청렴하고 검소하기로 소문난 황 정승이 양털로 옷을 해 입다니….’

세종은 회의가 끝난 후 황희를 불러 물었다.

“과인이 듣기로 경의 청렴결백이야말로 타의 귀감이 되며 하늘에까지 전해졌다는데 어찌 오늘은 양털옷을 입으셨소?”

당황한 황희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가까스로 대답을 했다.

“전하, 이것은 양털이 아니오라 솜입니다.”
“솜이라니? 왜 솜을 걸치고 다니시오?”

황희의 이야기를 들은 세종은 놀란 기색으로 황희의 옷 밑으로 빠져 나온 솜을 만져 보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영상, 일국의 영상이 청렴한 것도 분수가 있지요! 여봐라! 영상 대감에게 당장 비단 열필을 내리도록 하라!”

황희는 정색하며 “전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방금 내리신 어명은 거두어 주시옵소서. 지금 이 나라 백성들은 계속된 흉년으로 인하여 헐벗고 굶주리는 자가 많사옵니다. 이런 때에 어찌 영상인 신의 몸에 비단을 걸치리까? 솜옷 한 벌로 과분하오니, 이 점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이에 세종이 “오! 과연 경다운 말이오. 과인이 용포를 걸치고 있음이 부끄럽소이다” 답하고 명을 거두었다고 한다.  

조선 초기의 명재상이며 대표적인 청백리인 황희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여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 영당이다.

굶주린 백성들, 황희의 정성에 감복

황희는 고려 말인 공민왕 12년(1363) 개성에서 태어나 14세에 관리로서 첫 발을 내딛었다. 27세에 문과에 합격하면서 본격적인 벼슬길에 올랐고, 조선 개국 이후 태조, 태종, 세종을 연이어 섬기며 조선 초 태평성대를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세종 6년(1424) 황희가 강원도관찰사로 나갔을 때의 일이다. 당시 강원도 지방에는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삶이 매우 곤궁했다. 황희는 정성을 다해 백성들을 흉년의 고통에서 구제했고, 이 소식을 들은 세종은 크게 기뻐하며 그를 청백리에 표창했다. 백성들 역시 선정을 베푼 황희를 잊지 못했다. 황희가 임기를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가자 백성들은 그의 은덕을 기리며 그가 행차를 멈추었던 곳에 대를 쌓아 ‘소공대(召公臺)’라 불렀다.

강원도 삼척에 있는 소공대비 비각. 황희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관동지방 백성들이 세운 것이다.

 

작성자
김정희
작성일자
2012-07-24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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