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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음악만 있으면 행복하다… 아무것도 필요없다”

예술부산 ‘예인탐방’ 17. 부산 실내악과 관현악의 밑거름이 되신 고故 김진문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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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선생님을 회고하며

처음에 『예술부산』에서 선생님에 대한 원고 청탁을 받고 나는 순간 머리가 하얗게 되고, 얼굴이 붉어졌다. 선생님을 그동안 너무 잊고 지냈다는 자책감과 더 많은 사제의 정을 나누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신 지도 벌써 1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고 선생님에 대한 생각을 조금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작년 바이올린 독주회를 준비하면서 ‘스승과 제자’라는 타이틀로 바이올린 소나타 Frank와 Lekeu의 곡을 연주하였다. 사제지간인 두 사람을 조명하며  내 앞에 굵직한 발자국을 남기신 선생님과 내가 이끌어가야 할 제자들에 대한 깊은 생각을 가졌었다.

내가 7살 때 바이올린을 시작하면서 선생님과 사제의 연은 시작되었다. 음악을 무척 사랑하셨던 아버지, 그래서 광복동에 Ace tone이라는 오디오회사를 만드신 아버지의 덕분으로 바이올린을 시작하였다. 그 당시 선생님은 부산 시향의 악장으로서 명성을 높이고 있을 때였다.  

내가 중학교를 서울 예원학교로 진학하면서 선생님과의 수업은 끊겼지만 방학 때 귀향하면 아버지와 함께 선생님을 찾아뵙곤 했다. 아버지와 친구처럼 지냈던 사이라 허물없이 뵙곤 했었는데 아버지가 아프시고,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선생님과의 연락이 끊겼다.

그 후 서울예고, 서울대학교를 거쳐 빈 유학을 마치고 91년 부산 동의대학교에 부임하면서 선생님의 근황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동안 좋아하셨던 술, 담배 그리고  예민한 성격 탓이었는지 약간의 수전증 증세도 있으셨고 말년에는 늘 음악을 들으시며 TV로 Video로 음악회를 보시면서 묵묵히 음악인으로서 자부심과 열정을 나타내 보이셨다.

부산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하시고, 제자를 아끼고 음악에 헌신했던 선생님! 이제 선생님에 대해 소개를 해야 할 것 같다.

선생님에 대하여

선생님은(1929~1995년) 경남 남지에서 양조장을 경영하시는, 그곳의 유지셨던 아버지 김정호 님의 차남으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셨다. 그 마을에 남지중학교를 기증할 정도였다고 한다. 어릴 때 남지에서 자전거를 타다 둑에서 떨어져서 다리를 심하게 다쳐 당시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는 말에 일본에 가서 수술을 받게 되었는데 그때 삼촌이 바이올린을 사줬다고 한다. 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음악가는 딴따라라 하고 배고프고 천한 직업이라 해서 아버지와 집안의 반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아버지가 바이올린을 못하게 하시려고 여러 번 악기를 부숴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의 바이올린에 대한 집념은 더욱 깊어갔다.

진주중학을 거쳐 1946년 4학년 때에 마산중학교(6년제)로 편입했다. 1947년에는 서울예대(현 서울음대) 제1회 음악콩쿠르가 개최되었는데 그 콩쿠르에서 예상을 뛰어넘고 1등 없는 2위로 수석 입상하게 됨으로 서울 생활이 시작된다. 그러나 6·25 발발로 남지에 침입한 인민군에 의해 가족들이 살해되는 비운 속에 학업을 중단(2년 수료)하고 고향으로 내려가게 된다. 가업이었던 양조장과 그 앞에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은 그의 적성에 맞지 않아 늘 힘들어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양조장을 팔고 꿈을 안고 부산으로 오게 된다. 부산에서 생계를 위해 다른 사업에 손대시기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허영철 악단에서 바이올린 주자로 일을 하게 된다. 그 당시 유명했던 이미자 반주도 하고 그쪽 사람들과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하지만 늘 클래식에 대한 갈망과 꿈을 가지고 계셨다. 그 당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없음과 독학의 한계를 절감하며 오로지 연습에 매진하였다.

사배종구, 제갈삼 선생님과 함께.

드디어 1957년 4월 25일 미화당음악실에서 오태균 님이 지휘하는 부산실내악단 반주에 의한 멘델스존 바이올린협주곡과 제갈삼 님의 피아노 반주로 베토벤 소나타 제5번<스프링 소나타Spring sonata>를 가지고 제1회 독주회를 가졌다. 1962년 12월 7일 드디어 부산시민의 소망이였던 부산시립교향악단이 창단되면서 초대 악장을 맡아서 1980년 제140회 정기연주회까지 약 20년간 활동을 하셨다.

1964년 6월 21일에는 부산 초유의 [부산피아노트리오]를 결성하여 멘델스존 피아노 트리오 D단조를 연주함으로 당시에 큰 주목을 받았다. 또한 [부산현악4중주단]을 결성해서 65년부터 69년까지 5회에 걸쳐 활발한 실내악 활동을 펼쳤다.

1972년 10월에는 부산음악협회에서 주는 부산의 문화상을 수상함으로써 선생님의 음악 활동의 절정기를 맞는다. 1971년 11월 29일 제2회 독주회를 가졌고, 그때 부산 초연으로 프랑크 바이올린 소나타를 연주했다. 1972년에는 제3회 독주회를 여는 동시에 지방순회 연주회를 가졌다.

1974년부터는 부산대학교 사범대학에 음악교육과가 신설됨에 따라 강사로 출강하시기도 했다. 1988년 3월에는 그동안 쉬고 있던 부산피아노트리오 제6회 연주회를 열었다.

선생님에게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연주 활동뿐만 아니라 많은 영재들을 지도하고 길러내셨다는 점이다. 경원대 김광군, 대진대 김복현, 전 국민대 교수로 있다가 현재 스위스에 거주하고 있는 이광호, 프랑스 피에느 블레르가 지휘하는 현대음악전문 오케스트라의 제1바이올린 강혜선, 목원대 교수 김영상, 부산에서는 동의대 백재진(필자)과 고신대 오충근이 있다. 교수가 아닌 음악인들을 합하면 더 많을 거라 생각된다.

1995년 12월 4일 지병으로 65세 나이로 아쉽게 고인이 되셨다.

선생님에 대한 나의 마음

선생님에 대한 글을 쓰면서 가장 안타깝게 느낀 것은 선생님 시절 배움에 대한 고픔은 풍요로운 우리 세대와 더 밑의 세대는 감당할 수 없는 고픔이었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스승도 없이 거의 독학으로 그 시대에 바이올린을 시작했고, 부모님의 반대로 인해 늘 중단되었었고, 길이 아닌 다른 일을 통한 선생님의 삶은 또 다른 고통이였다. 그 이후엔 음악가로서 생계를 꾸려 나가기 위해 클래식이 아닌 악단의 생활도 했었고 가정을 꾸리면서 살 때는 그토록 가고 싶었던 배움의 길, 유학의 길을 접어야 했던 선생님!

늘 배움에 목말라 하시며 유학의 한을 가슴속에 간직하셨던 선생님, 부산시향이 탄생하고 너무 좋아하셨고, 무대에서 연주하는 것을 행복해 하시면서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난 음악만 있으면 행복하다. 아무것도 필요없다.” 하시면서 늘 연습하시던 선생님. 어쩌면 그래서 명성과 실력에 비해 사회성이 부족했을 수도 있었으리라. 가까운 지인들과 늘 음악에 대해 얘기하면서 음악적 교감을 나누셨던 선생님. 음악의 불모지였던 부산에 영재교육의 바람을 불러일으키시고 60년대 바이올린 붐을 일으키신 선생님. 부산피아노트리오와 부산현악4중주, 프랜드실내악단 등을 창단하시고 부산시향 악장으로 부산의 실내악의 바람과 관현악의 밑거름을 이루셨던 선생님, 지금 제가 알고 있는 바이올린에 대한 원리와 소리에 대한 이해를 선생님과 얘기하면서 나눌 수 있다면 참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봅니다.

무심했던 제자를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고 이젠 편히 쉬시기를......

이번 김진문 선생님을 회고하며, 나 스스로 옛 음악인들이 얼마나 음악에 대한 열정과 집념이 대단했는지에 대해 느끼며 새삼 존경을 표하고 싶다.

천한 직업이고 딴따라라는 그 사회적 벽을 넘기 위하여, 또한 가치적 강을 건너기 위하여 얼마나 힘드셨을까! 이런 분들의 밑거름으로 현재 우리가 있고 후배와 젊은 음악도들이 있음을.....

“선생님!

선생님의 빈자리를 조금이나마 제가 메울 수 있다면 생각하다가 선생님이 창단하신 부산피아노트리오를 선생님 대신 제가 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과 절친하셨던 동료이신 첼로 배종구 선생님과 중학교 은사이시며 절친한 음악의 동반자이신 제갈삼 선생님과 함께 선생님이 해 놓으신 제6회까지의 음악회를 제7회(2009. 7. 1), 제8회(2010. 11. 3)까지 이어 왔습니다. 선생님의 음악적 유품들은 제가 재직하고 있는 동의대학교에 기증되어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습니다. 잘 지켜봐 주시고 평안한 안식을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선생님의 뜻을 받들어 음악 속에서 늘 행복해 하며 저 또한 배움이 필요한 영재들을 가르치며 선생님이 걸으신 음악가의 길을  묵묵히 가겠습니다.”

글 백재진/동의대 교수

작성자
예술부산 2011년 1/2월호
작성일자
2012-07-24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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