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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그저 술 한 잔 드리우며 세상이야기로 풀어가는 그림 세계

예술부산 ‘예인탐방’ ⑮ 한국미의 모색 故 박충검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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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부산|예인탐방
내용

그날도 여느 때처럼 회의와 행사에 지쳐, 잠시 쉬고자 연구실의 커튼을 내리고 불을 끄고 안락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엄습한 피곤이 잠으로 찾아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몸을 누이고 잠이 들려는 순간 한 통의 전화가 왔다. 박충검 교수님에 대한 원고청탁의 건이었다. 갑자기 잠이 달아나 버리고 차가운 바람이 내 가슴속에서 일어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기분이었다. 피곤은 잊혀진 채……. 교수님의 생각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살아생전 제대로 모시지 못한 아픔으로 죄책감을 느끼는 중의 일이라 바쁜 일정과 짧게 남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이 일은 꼭 수락을 해야만 하는 운명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운명…….

그 내용은 이러하다.

박충검 교수님은 나의 아버지 청초 이석우의 애제자이다. 부산 대신중학교 시절 만남을 시작으로 동아대학교에서도 배움을 이어갔고, 평생을 서로를 사랑하고 존경하던 사이였다. 그런 관계 사이에서 나 또한 박 교수님이 부산대학교에 강의를 나올 때의 제자이며, 평생 사랑해 주셨다. 그리고 교수님의 두 딸이 예고를 진학하면서 내가 담임을 맡는 인연을 가지게 되어 4대가 이어지는 것이다. 게다가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아버님에 대한 회고의 글을 박 교수님이 썼었는데, 이제 내가 교수님에 대한 글을 쓰게 된 것이다.

생애

박충검 교수님(1946~2005년)은 1946년 제주시 김녕에서 태어났다. 6살 때까지 제주에서 살다 부산으로 건너와 부산 영선초등학교를 졸업하였으며, 부산 대신중학교에 입학하였다. 대신중학교 1학년 때, 척추결핵을 앓게 되어 1년간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된다. 그 당시 병원에서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게 된 것이 그림의 세계로 들어서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대신중학교 시절 청초 이석우를 만나게 되고 깊은 사제지간의 연을 맺게 된 것이다. 중학교 때부터 그림을 시작하면서 뛰어난 재질을 보였고 당시 양달석 선생님과 김봉진 선생님이 재직 중이던 경남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때만 하더라도 경남상업고등학교는 미술로서 뛰어난 학교로 이름이 나 있어서 미술을 하는 학생들은 진학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여서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게 되는데, 조회 시 많은 상을 받아 교장선생님의 이름은 몰라도 박충검의 이름은 모르는 학생이 없을 정도였다고 당시 동창생들의 입소문이 남아있다. 그래서 부경고로 이름이 바뀐 지금에도 박 교수님이 고등학교 시절에 완성한 큰 그림이 교무실에 남아 있다고 전해진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동아대학으로 진학하고, 이때 사모님 정한숙 씨를 만나게 된다. 사모님의 미모가 뛰어나 박 교수님의 관심이 많았으나 당시 사모님 가문의 분위기상 이에 반응이 없자 1968년에 서라벌예대(지금의 중앙대학교)로 다시 진학하여 3년을 수료하였다. 그 후 해병대에 입대하여 병장으로 만기 전역하였다.

전역 후 서라벌예대로 가지 않고 다시 동아대로 편입하게 된다. 당시에 청초 이석우 선생님이 교수로 재직하였고, 이때에 사제지간의 신뢰가 더욱 두터워졌으며, 학생임에도 실력을 인정받아 박 교수님이 수업을 거의 도맡아 하다시피 하였다고 한다. 청호靑湖라는 호도 청초 선생님으로부터 받게 된다. 1975년 동아대학교 문리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1977년 계명대학교 대학원을 마쳤다. 그리고 활발한 미술활동을 통하여 지금 신라대학교의 전신인 부산여자대학교로 들어가 후학들을 양성하게 된다.

작품세계(한국미의 모색)

박충검 선생님이 개인전을 처음 연 곳은 1977년 부산 현대화랑(6. 16~6. 22)이었고, 대구백화점의 A화랑(6. 29~7. 4)에서 연이어 전시회를 열었다. 이 전시에서 그는 민화적인 소재, 예를 들어 호랑이, 까치, 십장생, 말, 고양이, 석가여래와 보살, 피리 부는 소녀와 새, 남매, 말과 누드 등을 통해 목가적이고 향토적인 자연을 그리고 있다. 이는 서구 미학에 가려 소홀했던 우리 것들을 재생하여, 한국적인 미를 찾으려는 것으로서, 민화풍의 작품들은 꾸며낸 것 같은 거짓이 없고, 우리 민족의 집단생리에서 비롯되는 토속성을 보여준다. 그것들은 독특한 화면 분위기에 의해서 우리들을 잃어버린 향수에로 이끌어준다. 당시는 민족적 미학에 대한 모색기로 향토적 소재나 민화적 소재, 혹은 목가적 소재로 표현하는 시대적 경향과 같이 하고 있으며, 현대 문명에 찌들어가는 인간적 본성과 사라져가는 자연적인 생태를 아쉬워하며 전원적인 삶, 목가적인 생활의 이상향을 꿈꾸었던 것이다.

문인화 유형의 작품들 중에서는 기명절지화나 소나무 아래의 배를 타고 가는 사공을 그린 것들이 많이 보인다. 활달한 필치와 과감한 나무의 데포르마시옹을 통하여 화면을 구성하고 있으며, 인물의 자세나 의습선의 표현과 꽃그림의 포치와 운필 방법은 몰골법을 주로 사용하였던 청초 선생님의 영향이 나타난다. 그러면서도 다른 박충검 교수님만의 특징은 아교를 사용한 발묵으로 소나무 잎을 둥글게 표현하고 선채후필법을 사용하여 나무의 근간을 그린 후 가필하여 나무의 형체를 나타내었다. 배경이나 나뭇잎, 그리고 나무에까지 아교의 번짐과 얼룩을 이용한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제3회 개인전에서 변화를 보이는데, 닥지나 옅은 갈색바탕 위에 한복저고리나 늘어진 천 속에 탈의 모습을 그리거나 탈춤 중에 어우러지는 한복저고리로 화면을 구성하는 방식을 채용하였다. 많은 선의 교차와 어우러진 탈춤의 율동은 언뜻 복잡해 보이지만 특정 부분을 여백으로 남기어 화면의 혼란성을 제거하고, 닥지의 점들이나 황토빛 갈색은 한국적 질감과 색상을 전달하여 주고 있다.

이로부터 11년이 지난 1993년 제4회 개인전은 작품의 새로운 전환기라고 할 수 있다. 좀더 원색적인 색채가 등장하고 자연의 여러 구성요소가 다시각적으로 병치되어 나타나고 있으며, 화면의 분리와 도상적 형태의 활용, 조각보 형식의 색동이나 오방색이 적극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소재로는 소나무나 연꽃, 바위와 산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것들은 갈색이나 백색, 검은 색의 바탕 위에 그려진 기하학적 산, 선묘의 물고기, 전통 창문, 소나무 등과 서로 어울려 하나의 통일적인 리듬을 만들어낸다.

이후 2000년대의 작품세계는 두터운 종이의 질감을 이용하고 평면이 아닌 부조적 입체감을 줌으로써 더욱 현대적인 감각을 구사하고 있다. 화면은 기존의 도식적인 동양 산수나 문양의 해체를 통해 기호적 부호와 암시로서 동양적 세계관을 표현, 장식적이면서도 은유적인 독특한 조형언어를 구현하고 있다.

하도河圖 시리즈는 선생님의 공간 해석을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작품들이다. 사각형은 땅을 상징하고 다시 그 속에 그려진 원형은 구름, 일월을 그려 넣은 것으로 보아 하늘을 상징하고 있다. 즉, 천지天地 운행, 자연의 순환, 시간의 변화를 리듬감 있게 표현하였으며, 요철의 화면을 통한 동양의 음양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화법을 찾는 일은 고행苦行이다. 화가들은 자신이 에너지를 쏟아부을 주제와 방식에 대해 신중하면서도 실험적이고 때로 학구적이면서 파격적으로 접근을 시도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많은 화가들이 전통과 현재를 고민한다. 전통은 자신의 세계와 연관을 짓는 시간의 맥이고 현재는 앞으로 만들어갈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추상과 구상의 구분을 떠나서 한국화의 현대성을 찾기 위해 일생 동안 노력하였다. 단지 재료로만 구분되거나 소재에 제한을 받는 한국화의 보수성을 혁신하고자 표현의 제약과 동과 서의 경계를 넘어,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이상의 세계를 자신의 시각과 조형언어로서 풀어낸 것이다.

에피소드

선생님은 참으로 깐깐한 선비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한치의 오차나 소홀함도 용서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작품을 할 때나 자신을 대할 때만의 모습이셨다. 타인이나 제자들에게는 관대함과 배려로서 한없는 정을 쌓으셨다. 그 예로 선생님은 보통 야외수업의 장으로서 자갈치시장을 선택하셨는데 자갈치시장에는 학생들에 앞서 당시 시간강사였던 나와 함께 30분 정도 먼저 도착하신다. 그러고는 시장의 한복판에 있는 아주 예스러운 다방으로 올라가셨다. 나는 시간이 남아 시간 때우려 차나 마시려고 들어가신 것으로만 생각했다. 차를 시키는데, 우리 차만이 아니라 마담과 종업원들의 차까지 몽땅 시켜주시는 것이다. 그러고는 마담을 불러 앞에 앉혔다. 소위 말하는 ‘히야까시’ 하시려나 했더니.., 선생님의 그 특유의 억양과 부드러운 음색으로 마담의 덕담을 늘어놓더니 “근데, 저, 부탁이 있는데요. 우리 딸애들이 주변에서 그림을 그리는데 급하면 이집 화장실을 좀 써도 될까요?” 하고 정중한 부탁을 드리는 것이다. 미리 차와 입심으로 인심을 얻어 놓았으니 거절을 할 리가 없다. 그때는 부산여대 시절이라 학생들이 모두 여학생들인 것이다. 여학생들의 야외스케치의 제일 고충이 화장실 문제인데 그것을 능숙하게 처리하시곤 학생들과 모이기로 한 장소로 가셔서 학생들에게 주의사항과 스케치에 대한 지시를 내리셨다. 그리곤 주변에 고래고기를 파는 포장마차로 들어가셨다. 이때만 하더라도 89년도라 포경이 금지되어 고래고기 한 접시의 값이 4~5만원이나 할 때이다. 스케치를 하다 피곤하여진 아이들이 들어올 때마다 주저 없이 고기를 시켜 주시니 나중에는 3~4십만 원이 훌쩍 넘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래도 아낌없이 제자들에게 더 사주시지 못해 안타까워하셨다. 제자들에 대한 배려와 꼼꼼함이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도 있다. 부산지하철 서면역과 덕천동역의 장식벽화 제작에 모 대학의 J교수님과 함께 당선이 된 적이 있다. 보통 벽화나 기념물 제작의 경우 혼자 제작하지는 못하고 제자들이 도움을 주게 된다. 하지만 작품을 설치하고 제작가의 이름을 남길 경우 교수나 작가의 이름만을 적는 것이 관례인데, 교수님께서는 그때 도움을 주었던 제자들의 이름까지도 일일이 같이 새겨 주셨던 것이다.

선생님은 제자에게 그림을 그림으로 가르치시지 않았다. 몸소 행동과 마음으로 전달을 원하셨다. 그 바쁘신 중에도 항상 제자들이 달려갈 때에는 마다하지 않으셨고 그리고 제자에게 깨우침을 줄 때에도 그저 불러서 술 한 잔 드리우며 세상이야기로 풀어 그림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느끼게 해주신 것이다.

마치면서

교수님은 가족들을 너무도 사랑하셨다. 그래서 둘째 딸이 아플 때에는 그렇게도 안타까워하셨고, 수많은 날들을 병원의 복도에서 밤을 지새우며 딸의 아픔을 같이하셨다. 그렇게 극진한 정성에도 불구하고 딸이 세상을 떠나자, 많은 일들과 추억을 남겨 놓고 너무도 갑작스럽게 떠나버리셨다. 아마도 먼 하늘나라에 막내딸을 혼자 둘 수 없어서 그렇게 일찍 가신 것일 게다. 지상의 숙제들은 우리에게 맡기시고…….

“청초 선생님이 조금만 더 오래 사셨어도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훨씬 쉬울 텐데…….” 라고 되뇌던 말씀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한데…….

어이해 청초 선생님과 같은 나이에 그렇게 일찍 떠나셨는지......

글 _ 이민한 / 부산대학교 미술학과 교수

작성자
예술부산 2010년 11/12월
작성일자
2012-07-10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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