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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에 온 정신이 팔려있는 사람

예술부산 ‘예인탐방’ ⑭ 농재 박후상 선생의 서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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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유년시절 서당에서 붓을 잡은 이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오직 서예에만 집착한 부산의 서예가가 있다. 우석 김봉근 선생과 김양동 선생으로부터 서예와 전각을 배워 청출어람靑出於藍한 농재農齋 박후상朴厚相 선생이다. 서당 서예에서부터 오늘까지의 서예인생 약 65년을 하루같이 서예 천착에 보낸 것이다. 물론 대학 졸업 후 한때 기업을 경영하기도 하였으나 결코 서예를 멀리하지 않았다.

필자가 [농재 서예원]을 방문했을 때 직감적으로 느낀 점이 있다. ‘서예에 온 정신이 팔려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136㎡의 서실에 마련한 작업실에는 전각재료, 서예재료가 어지럽게 쌓여 있고, 좀처럼 개방하지 않는 각자刻字 작업실은 더 복잡하여 넘어지면 일어날 틈도 없어 보였다. 이들 광경은 바로 서예와 한평생을 함께하고 있는 농재의 현재 모습이며, 여기에 그의 서예를 소개하게 됨은 늦었지만 다행으로 생각한다.

농재의 긴 서예인생으로 볼 때 동양예술 전부에 걸쳐 일가견을 가질 수 있었겠지만 오직 한문서예, 전각, 각자에만 집중하였다. 그 경지로 보면 공자가 「위정편」에서 말한 각종 비평을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이순耳順을 지나, 서예에서의 종심從心을 바라보는 경지에 올랐다할 것이다. 생각하는 대로 글을 쓰고 각을 해도 어느 것 하나 과불이 없는 경지를 말한다. 이 이상 또 무엇이 있으랴! 서예, 전각, 각자의 3꼭지에 올랐으니 이를 말하면 서예 삼절을 이루었고, 그 깊이와 넓이는 누구도 다다를 수 없을 만큼 깊고 넓다. 이것은 농재의 서예이력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 중에 몇 가지만 골라본다.

1982년 부산미술대전 서예부분 금상 수상, 대한민국미술대전 서예부분 우수상, 1998년부터 2004년까지 매년 국제각자연맹전에 참여 및 운영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물론 각종 서예관련 운영/심사위원장, 회장, 지회장 등의 역임은 50여 건에 달하며, 이 사이 서예작품 발표 건수는 헤아리기 조차 힘들다. 이러한 서예공적을 인정받아 국무총리 표창장(제132172호), 부산광역시장 표창장(3590호) 등을 받았으며, 일흔이 넘었음에도 현재 국제각자연맹이사, 한국서각협회자문위원, 한국전각학회이사,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작가, 부산미술대전 초대작가, (사)부산서예비엔날레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더욱 왕성하게 부산서단 발전을 위해 현장에서 굵은 땀을 흘리고 있다.

특히 부산서단의 발전을 위한 선생님의 업적은 전무하고 후무할 것이다. 국내외적으로 부산의 예술 위상을 더 높인 (사)부산서예비엔날레에서의 활약은 말할 것 없고, 부산미협서예분과 위원장으로 6년간 재직하는 동안 부산시전에 전각부문을 개설하는 등 부산서단의 발전에 이바지한 업적은 지대하다. 보통 사람은 생각할 수 없는 많고도 높은 업적은 서예에 관한 농재의 열정을 대변해준다 할 것이다.

농재의 서예를 보자. 앞에서 언급했듯이 서예인생 65년을 바라보는 기나긴 기간 동안 서예와 더불어 생활하였고, 특히 청장년기에는 서예에 온 열정을 다해 집중하였으니 그의 서예가 남달리 넓고 깊을 수밖에 없다.

농재는 전예해행초에 모두 능하다. 도판의 전서는 1998년 제24회 부산미술대전 서예부문 초대작가 출품작으로 본문은 전서체이고 행초로 낙관하였다. 농재의 대표작 중의 하나라 할 것이다. 농재는 특히 해서에 능하나 행초서도 마찬가지로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을 정점에 올랐다. 도판의 해서는 1986년 부산미술대전 수상작가 초대전의 작품이다. 농재는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정말 명命을 알았고, 명을 세운 것이다.

농재 서실에 갈 때마다 느끼는 점이지만 이들 글씨를 볼 때 언제나 느끼는 바가 있다. 볼수록 무엇인가 새로운 느낌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좋은 서예라 할 때, 농재의 서예가 바로 그것이다. 농재의 예술과 인품과 마음을 읽을 수 있다. 하나의 경지를 이룬 농재의 예술혼이 울려옴을 느낄 수 있다. 조용한 마음으로 깊이 보고 있으면 작품 역시 조용하다. 그리고 근엄하면서도 고아한 위풍, 어딘가 마음을 달래주는 느낌을 준다. 그것은 지극 정성으로 불심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들려오는 풍경소리의 여운과 같다 할 것이다. 그리고 가슴속 깊게 메아리로 이어진다. 이것은 아마도 농재의 서예학습 과정에서 얻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마술사의 손을 얻고자 함이 아니라 부처의 마음을 얻고자 하는 자세의 정필筆正로 서예의 도道에 이르고자 한 결과이리라. 그래서인가 농재의 서예를 보면 서예학습 요령을 말해 주는 것 같다. 서예는 손끝의 연습에서 얻을 수 있는 기술적 기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랜 수련 끝에 얻어지는 인격, 고아한 정신적 경지가 더욱 감동적인 서예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려 준다.  

농재의 서예인생, 범인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긴 고난의 세월이었을 것이다. 서예로 수도修道한 세월이 길고 길었기에 오늘의 농재 서예에 도달한 것이고, 그 과거가 어떠했는가가 서예에 그대로 나타나보인다.

농재의 서예를 보면 또 말해 주는 것이 있다. 서예의 깊이는 기교보다는 고아한 인품에서 오는 것임을 말한다. 운필의 묘는 연습에서 얻어질 수 있으나, 글씨에서 풍겨 나오는 운韻의 높이는 마음의 단련으로부터 얻어지는 인품이 더하여 질 때 비로소 서예의 미가 깊어지기 때문이다. 사실, 고래로부터 그 사람의 외적 산물인 서예와 그 사람의 인품을 결부시켜 생각하고자 하는 관습에서 ‘심정필정心正筆正’, ‘서심화書心畵’, ‘서상기인書像其人’, ‘서여기인書如其人’으로 보고자 하였는데, 농재의 서예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확인해 준다.

길고 긴 수련기간을 통해 이룩된 농재의 서예를 다른 말로 하면, 먼저 유가적儒家的 예술성이 돋보인다 할 것이다. 그래서인가 후덕함이 풍김은 서예에 그의 마음을 실을 수 있는 경지에 달한 것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묵기墨氣가 맑다. 작품 어느 것 하나 농재의 정신이 실려 있지 않은 것이 없다. 그래서 더욱 깊은 감명을 주며, 이것은 그동안의 길고도 깊은 수련을 대변한다 할 것이다.

이러한 느낌은 농재는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동적動的 예술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유가적인 정적靜的 예술을 추구하였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정의 예술작용은 예술로써 인간의 불안정한 감정을 침전시키고 안정시켜 인간의 선한 마음을 발동시키는 순작용順作用을 한다. 그러나 정의 예술성은 쉼 없는 수양 중에서 물욕이 사라지고 천리 및 천기가 활발하여 질 때 비로소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관능적인 쾌감이 아니라 차원이 높은 담담한 마음의 즐거움인 것인데, 농재는 이러한 정靜의 예술을 추구한 것이고, 마침내 이룩한 것이다. 그래서 농재의 서예는 글의 뜻만이 아니라 농재의 그 인품을 대하듯 하는 느낌을 주는 것이리라.

서예의 길은 어느 학문보다 길고도 험하다. 시작하는 사람은 많아도 한 사람의 이름을 내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래서 서예의 시작은 있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고도 한다.

때때로 더 없이 영화롭지만 외로움과 험준함도 많은 것이 서예의 길이다. 이러한 서예의 길을 일생 동안 열정적으로 걸어온 농재이다. 인간의 노력을 다한 후에야 나타날 수 있는 서예의 경지는 어떠한 것일까? 아마 농재는 이제 그 길을 찾고 있으리라.

소년 문장은 있어도 소년 명필은 없다는 말이 있다. 서예는 급히 달려서 되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다른 학문도 크게 다를 바 없지만 서예야 말로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는 표현이 적합한 분야이다. 서학도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이나 온고지신溫故知新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들 권학문을 말하기는 쉽다. 누구나 말할 수는 있어도 자기가 실천하기는 정말 어렵다. 농재는 태산 위의 태산 오르기보다 더 힘겨운 이 과정을 통과하였다.  

끝으로, 농재는 학부에 전공한 영문학을 던지고 서당에서 시작한 서예에 몰두하여 오늘에 이르렀고, 언제부터인가 부산서단의 거인으로 성장하였다. 그의 작품뿐만 아니라 부산서단의 발전을 위한 농재의 노력은 후대에 길이길이 남을 것이다.

오후규 / 부경대학교 교수

작성자
예술부산 2010년 11/12월호
작성일자
2012-07-03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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