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바로가기

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전승과 창조, 승전무에서 피어난 원향지무

예술부산 ‘예인탐방’⑩ - 전통예술인 원향遠香 엄옥자 선생

관련검색어
예술부산|예인탐방
내용

스침과 만남, 집과 사람

중요무형문화재 21호 승전무의 예능보유자로서 현 국립부산국악원의 예술감독으로 재직하고 계시는 엄옥자 선생을 뵈었다. 때마침 선생은 문화부 행사가 있어 서울을 다니러 오시고 필자는 서울서 부산으로 내려가려던 차였다. 그 하루의 빛 드는 오전이었고, 선생이 머물던 개포동 여동생분의 자택에서였다. 예정대로라면 부산진구 연지동에 위치한 국악원에서의 인터뷰 약속이었다.

국립부산국악원은 부산·영남지역의 전통공연예술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설립된 문화예술기관으로 2008년도에 개원했다. 연혁을 살펴보면 국립국악원의 시초는 서울의 장충동 시기를 거쳐 현재 서초동 우면산 자락의 청사로 자리 잡기 이전에, 1951년 해방 후의 부산에서 먼저 개원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수도권으로 집중된 문화예술기관들이 지역적으로 특성화되면서 전북 남원시에 92년도 국립민속국악원이, 전남 진도군에 2004년도 국립남도국악원이 개원했고, 현재 부산영남 국악인들의 집이 된 국립부산국악원은 2008년도에 개원하게 되었다. 역사의 무대 속에 그 집과 사람들의 자취를 남기는 새 살림이 시작된 것이다.

또 예정대로라면 엄옥자 선생은 부산대학교의 체육교육학과 교수로 명예퇴직하면서 고향인 통영에 가 계셨을 것이다. 전통춤 이수자이자 전수자로서 교육계에 종사해왔던 시기를 접고 고향 통영으로 내려가 선생이 발굴 계승한 통영의 승전무에 대한 연구와 보급에 대한 작업을 계속하실 계획이었다. 그러나 길을 걷는 것은 사람이지만 길을 내는 것은 신이라고 했던가. 선생이 오늘의 국악원에 몸담게 된 것은 집과 사람, 몸과 춤의 인연과 숙명으로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을 것이다. 승전무와 원향무의 보급에 집중하려던 선생에게는 이제 무용단 예술감독과 더불어 경남부산 문화재 위원이라는 공인의 신분으로서 비단 삶의 발판이었던 통영뿐 아니라 더 널리 우리 춤의 진동이 오래도록, 우리 삶과 세계 속에 폭넓게 자리할 수 있도록 가교 역할을 해야 하는 소명이 주어졌다.

춤과 향기, 원향춤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사는 집이 그 사람을 닮듯이, 선생의 몸 자체는 춤자락을 고스란히 입은 듯하다. 그만큼 선생의 춤 인생에 드러난 신적인 부르심의 여정은 꽤나 선명하다. 육십 반의 인생이 춤으로 연주되는 가운데 퍼지는 향기는 몸의 역사로 머금게 되고, 몸에서 몸으로 전수되는 춤의 특성이야말로 머무름과 사라짐의 반복을 통해서 오래도록 시공간적으로 멀리 퍼지는 향기 그 자체 같다. 선생의 호인 ‘원향’은 이렇게 삶을 채색하는 신비로서의 춤을 가까이서 지켜본 지금의 남편이 지어준 것으로, 은은한 향을 멀리까지 전하라는 뜻이 담겨있다.

선생의 호를 딴 [원향춤연구회]는 선생이 부산대 교수 시절 한국춤의 맥과 정체성을 확립하고, 후진양성을 목적으로 2002년 3월에 발족한 우리춤 연구회다. 이미 85년도에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체육학과 졸업생인 일선 중고등학교 무용 체육교사들이 주축이 되어 [연무회]가 결속되면서 승전무를 비롯한 본인의 춤을 전수해왔다. 이후 91년에는 [엄옥자 한국민속무용단]이 발족되어 국내외적인 춤 공연을 주도해왔는데 《한국 명무명인전》을 비롯한 백여 회의 국내공연과 일본, 미국, 인도네시아, 홍콩, 러시아, 캐나다, 프랑스, 이태리, 스페인, 중국, 폴란드, 우크라이나, 헝가리, 벨기에, 브라질 등 세계민속무용 페스티벌에 참가하여 우리춤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감당해 왔다.

한편 국립부산국악원 무용단은 2008년 10월 부산국악원 개원 이후 여러 차례 공연을 했지만 지난해 12월의 첫 정기공연은 자못 주목을 받았었다. 부산국악원 연악당에서 첫 정기공연인 《영남 춤에 돛을 달고…》를 무대에 올리며 무용단이 선택한 방향성은 ‘영남 춤의 계승과 발굴’ 이었다. 무용단은 공연에서 승전무(중요무형문화재 제21호), 살풀이(대구시무형문화재 제9호), 동래학춤(부산시무형문화재 제3호), 동래한량춤(부산시무형문화재 제14호), 밀양백중놀이-오북춤·범부춤 중요무형문화재 제68호), 통영교방진춤, 여섯 작품을 선보였다.

승전무는 엄옥자 예술감독이 발굴·계승한 경남 통영의 독보적인 춤으로, 조선시대 통영에 삼도수군통제영이 설치된 이후 구한말의 영문에 예속되어 있던 교방청의 기녀가 추던 춤이다. 통영지방에 토착화된 향토색 짙은 민속무용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우아하고 고결한 무태와 춤가락에 외적 형식미와 내적 흥취성이라는 짜임새와 전통성을 가졌다. 또 통영교방진춤은 엄옥자 감독이 새로이 발굴하여 처음 무대에 올린 것이다. 엄옥자 명인이 통영교방의 노기였던 이국희에게 배운 진춤을 바탕으로 통영승전무의 우아한 자태와 섬세하고 아름다운 기교와 영남지역에 흐르는 춤맥의 진수를 집대성하여 독창적인 춤사위로 엮은 것인데 흥과 멋, 태를 고루 갖춘 생명력 넘치는 멋스런 춤으로 소개되었다.

특히 계승해야 할 춤의 무대화와 대본화 작업을 통해서 선생은 그동안 명인들로부터 도제식으로 계승되어왔던 전통춤을 자료화시켜 맥을 이어가겠다는 부산국악원 무용단의 향후 비전과 과제를 시사했다. 한편 원향춤 연구회는 지난해 같은 곳 연악당에서 2009 열린춤판으로 《전통춤이음전》을 펼쳐 노장과 중견이 함께하는 특별한 무대를 마련한 바 있는데, 선생의 딸인 변지연 씨와 함께한 ‘원향지무’의 그야말로 귀한 무대를 선보였다. 시간의 낙차를 통해 전수되는 승전무는 원향을 덧입고 우리 춤의 독특한 미학을 구현한 것이다.

또 [원향춤연구회]와 관련한 선생의 작업은 대표적인 3대 살풀이춤인 이매방류 살풀이춤, 한영숙류 살풀이춤, 김숙자류 도살풀이춤을 모두 전수받아 자신의 춤사위만으로 구성된‘원향 살풀이춤’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또 승전무와 진춤을 바탕으로 원향의 생명력 넘치는 ‘원향지무’를 탄생시켰고 뱃놀이하며 궁녀들이 추던 통영의 춤 ‘배따라기’와 ‘진춤’을 발굴할 예정이다.

승전무, 고향 통영

명무들로 전해져 내려오는 소중한 춤을 스승에게서 배우며 각자 갈고 닦은 기량과 멋으로 채색되고 분향되는 춤의 세계에서 춤은 단지 가르쳐지는 것이 아닐 것이다. 득하여 체화되고 체화된 춤과 몸의 하나됨을 통해서 보고 또 보이는 것도 일체의 경지가 될 수 있을까. 타고난 기운으로 춤 아닌 다른 길을 갈 수 없었던 선생에게 딸의 춤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지. 과연 보기에 ‘좋다’와 ‘타고났다’는 다른 것이었다. 임신 중에도 춤을 쉬지 않았고 임신한 채로 승전무를 재현한다는 것이 나중에 어떤 의미인지는 오히려 눈으로 확인할 수밖에 없는 것이 된다. 한몸으로 춤을 춘다는 것이, 몸과 춤이 하나 된다는 것은 말로 설명이 안 되는 불가해한 것이기 때문이다. 과도한 춤작업으로 애가 거꾸로 서는 바람에 산모의 생명에 위험을 받는 등의 고통이 따르기도 했지만, 그러한 고통을 뚫고 나온 생명은 더욱 강인한 것이었다. 딸의 춤은 선생에게 어쩌면 자신의 거울 같은 분신이 되기도 했지만 오히려 자신을 넘어서는 새로움을 발견하는 신비로 풀이된다.      

원향 선생은 어려서부터 풍류를 즐기고 좋아하던 부친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자랐다. 통영에서 제일 큰 한약방을 경영하시던 선친 엄수영 공은 통영시 무형문화재보존회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북, 장구, 피리, 소리, 춤에 능했던 인물로 엄마의 심부름으로 아버지를 찾아 드나들곤 했던 기방, 그곳 기녀들의 화려한 차림새와 춤추는 모습에 반해 5세의 나이에 춤이라는 꿈을 키워가게 되었다. 이후 7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퇴기 이국희 선생에게서 통영 굿거리춤과 칼춤을 배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일찍이 하늘의 부름을 받고 유명을 달리했지만 생전의 남동생은 승전무보전회 이사를 지냈고, 1남 5녀 중의 차녀로 온 집안이 사진, 춤, 피아노, 도예, 플루트 등을 전공하고 있다. 비단 이러한 가정적인 배경뿐 아니라 지치지 않도록 내달려온 선생의 저력에는 풍광이 아름다운 한려수도 통영의 자연이 준 바람결, 숨결이 담겨있다. 대학시절 경남여고에서 교생 생활을 할 당시 청마 유치환 선생은 통영으로 갈 것을 권했고, 졸업 후 통영여고의 교사로 재직 시 이민기 교감으로부터 이순신 장군 기념행사의 군대 행렬 속 8선녀의 춤을 찾아 연구할 것을 제안받게 되었다. 이후 고故 정순남 선생과의 첫 만남으로 이어져 우리 춤인 승전무를 발굴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는 설득 끝에 전수를 허락받게 되었다. 이러한 인연들이 모여 결국 통영의 마지막 예기 조합장과 통영에 흩어진 3현 6각 악사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계기가 마련되고, 이로써 1966년 통영의 승전무가 최초로 재현되어졌으며, 찾을 길 없던 8선녀의 춤사위가 고故김해근, 고故이국희, 고故정순남, 엄옥자의 계보로 이어졌다. 1968년 선생은 당시 26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전수 후 1년 만에 승전무가 중요무형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되면서 정순남 선생과 함께 최연소 인간문화재로 지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71년에는 연소자를 중요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에서 제외하는 제도가 생겨나 잠시 자격 해제되었지만, 87년 북춤과 칼춤이 합설되며 준보유자로 인정되고, 96년 마침내 예능보유자로 재인정되었다.

승전무勝戰舞는 경남 통영에서 전승되어 온 북춤으로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왜군과 맞서 싸우기 전 병사들의 사기진작과 전쟁에서 승리한 후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축하의 의미로 추게 하던 춤이다. 때문에 무고(북춤)와 검무(칼춤) 등이 합쳐져 힘차고 강한 동작으로 이어지던 것이 대부분이었으나 후에 기방으로 흘러들어 오늘날의 승전무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통영 승전무는 충무공의 춘추제사와 탄신제 등에 헌무獻舞되던 중요한 문화재로 춤사위 하나하나에서 민족 정서를 대변하는 대표적 전통예술이다. 후대에 와서 그 맥이 끊길 뻔했던 것이 중요무형문화재 제21호로 지정받아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후학들을 배출해내고 있다.

<칼의 노래를 넘어서> 전통과 현대의 어우러짐을 좇아

선생이 집대성한 『승전무의 실상』(2008년)에서는 칼춤과 북춤으로 나뉘어 있다가 승전무로 묶어진 역사적인 실상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또 승전무의 구성요소 및 구조분석, 정신과 사상 등 미적 세계를 다루면서 라바노테이션(무용기록법)을 사용한 무용표기를 통해 승전무를 원형대로 남기고 세계 속으로 내보내기 위한 준비 작업을 거쳤다.

우리의 국악國樂(Korean traditional performing arts)은 연극의 원류와 마찬가지로 가무악歌舞樂 일체인데,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전통무용에 대한 전승과 발전이 차단되었기에 규방으로 흘러들 수밖에 없었던 상황 속에서 선생의 역할은 실로 막중했던 것이다. 사라져 가는 것에 헌신하고 몸에 배어들게 함으로써 그 향을 품어내는 작업에서 승전무 발굴의 동기와 원향지무의 전수 및 보급의 의미를 다시 돌아보게 된다. 전수과정에서 사람에 따라 변화하는 가변성의 여지가 있는 것이지만 원형의 발굴과 복원에의 걸음을 멈출 수 없다. 또 변질이나 소멸을 막느라 자칫 창조적 개성이나 자가생산적인 것을 가로막게도 되지만 끝내 한국춤의 유형적 즉흥성 속에서 피어오르게 되는 춤사위를 상상하게 된다.   

한국전통춤이 현대민족예술로서 재창조되어야 한다는 선생의 신념의 바탕에는 문화유산으로서의 전통춤 확산 운동에 대한 소망이 서려 있다. 선생의 말을 빌어 ‘악 바탕에 춤을 실어라.’는 음악이자 노래이고 춤이자 연행인 우리 풍물의 생동을 미리 본 것이다. 또 ‘악을 춤으로 풀어라.’에 달하기 위해서는 장단이 같은 한 배를 가지고 있더라도 춤을 모르고서야 힘 있고 구성지게 풀어내거나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그 맛이 눈으로 보는 악樂이 될 것이다.

전통문화의 전승과 재창조 작업으로 전통춤을 오늘날의 춤으로 발전시키는 시도에서 선생이 보여준 <칼의 노래를 넘어서>(2004년)라는 무용극은 통영바닷가에서 유년기를 보낸 선생의 삶의 고백이 담겨있다. 충무공의 영웅담을 전쟁과 무력의 횡포를 초월하려는 인간애의 구가로, 구국영웅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삶과 죽음을 그 아내와 어머니 그리고 며느리의 여인 삼대의 시각에서 재조명하여 죽음에서 출발하여 삶으로 회귀하는 극적 변증법으로 새로운 해석을 통한 현대화 작업으로 평가받았다. 실제 삶의 드라마 속에서 춤의 대가이자 스승인 어머니의 뒤를 좇은 것이 이 작품 내에 모녀의 춤으로 풀어지며 특별한 기개를 펼치게 된다. 그리고 이어 <봉황되어 춤을 추리>(2008년)에서도 딸의 안무와 출연을 통해서 삶의 극적인 드라마가 숨어들게 된다. 유년의 바다와 통영의 북소리에 이어,  3부에서는‘봉황의 비상 - 내 눈이 열리고(대본 김정자)’ 악가무가 춤으로 노래되었다. 이것은 시차를 두고 단지 춤이 아니라 향이 되고, 이후로도 계속될 것이다.

작성자
예술부산 2010년 3/4월호
작성일자
2012-06-05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첨부파일
부산이라좋다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이전글 다음글

페이지만족도

페이지만족도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만족하십니까?

평균 : 0참여 : 0

댓글은 자유로운 의견 공유를 위한 장이므로 부산시에 대한 신고, 제안, 건의 등 답변이나 개선이 필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부산민원 120 - 민원신청 을 이용해 주시고, 내용 입력시 주민등록번호, 연락처 등 개인정보가 노출되지 않도록 주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상업광고, 저속한 표현, 정치적 내용, 개인정보 노출 등은 별도의 통보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부산민원 120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