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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윤제 선생님을 기리며…

예술부산 ‘예인탐방’ ⑨ 윤제 故이규옥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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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부산|예인탐방
내용

생각해보면 안다는 것은 결국 몰라서 하는 말이고 참으로 알고 보면 모른다는 말이 옳다. 모르고 알아야 하며 깨친 바 없이 깨쳐야 하는 심오한 진리에의 길은 이 모두 아득하고 멀기만 한 것인가? 
(이규옥,「知, 不知」)

그가 언젠가 쓴 단상 속에는 인생의 심오한 깊이와 회한이 가득하고, 나약한 한 인간의 고뇌가 서려있는 듯하다. 하지만 사색으로 침잔하는 그의 정신세계와는 달리 내가 느꼈던 윤제선생님의 필력은 인생의 ‘오만함’과 함께 힘이 서려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필력에 있어서만은 ‘충만한 자신감’이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는 작품은 목단, 참새그림으로 매우 서민적인 것을 선택하였으나 데생력이 뛰어나 실상 인물, 화조, 미인도, 풍속 등 어떤 소재에도 구애받지 않았다.

학창시절은 열정과 낭만이 있던 시간들이었다. 동아대학교 재직 시절, 서울에서 김기창, 장우성과 같은 후소회 멤버들이 내려오면 주머니에 한 푼도 없으시면서도 그들과 제자들을 이끌고 멋들어진 술집으로 데리고 가 거창하게 대접하였다. 화기애애하고 취기가 막바지에 이르면 선생님은 주인마담을 불러 그녀의 치마폭에 화조화 한 폭을 일필휘지로 그려 술값에 대신하기도 했다. 그리고 윤제선생님이 즐겨 다니시던 한 단골 술집의 외상값이 세월에 묻혀 계산하기 어렵게 되자 한 폭에 참새 100마리를 그려주어 술값에 대신하셨다. 그의 호방한 필력은 그 시절 부산에서 타의추종을 불허하였으며, 제자들이 감히 따를 수 없는 경지의 그것이었다.

목단화 1_130x68cm

지금 생각해 보면 선생님은 유독 나를 아끼셨던 것 같다. 윤제선생님은 그 누구와의 술자리도 거절을 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애주가였는데 늘 나를 데리고 다니셨으며, 그의 필치를 닮고자 하는 나의 열정을 가상히 여기셨다. 그 가운데 지금도 마음속 깊이 감사드리고 싶은 것은 스승과 다른 길을 선택한 나의 결정을 존중해 주셨던 점이다.

당시 윤제선생님의 수업방식은 눈으로 보고 익히고 스스로 터득하라는 방식이었다. 학생들에게 당신이 그리는 방식이 옳다고 따라 그리기를 강조하기보다는, 개성 있고 자기개발에 의한 독자적인 필력을 높이 평가하는 선생님이셨다. 즉 스승이라는 위치가 맹종적 답습을 요구하는 권위적 존재였던 그 시절, 윤제선생님은 제자들의 창조적인 작품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주셨던 분이었다. 학창시절 나는 곧잘 윤제선생님의 모란이나 새 같은 화조화를 흉내내 보기도 하고, 당신도 흡족해 하셨으나 나는 어느덧 풍경에 심취하게 되었다. 일정한 소재에만 구애받지 않는 윤제선생이었기에 나의 선택을 존중해 주셨고 모든 걸 포용하면서 가르침을 주셨다.

참새_72.7x60.0cm

그에 대한 에피소드 몇 가지를 말하자면,

대학원 시절 어느 날 수업시간이 다 지나도록 오시지 않으셔서 그 다음 주에 왜 안 오셨냐고 여쭤 보았다. 보통 다른 교수님이라면 중요한 회의가 있었다던가, 사정이 생겨서 그랬다고 하셨을 텐데 윤제선생님은 그날 ‘미스부산’ 선발대회 심사위원으로 참가하셨다는 이유와 함께 그날 수업은 미인들의 심사이야기로 시작하여 그것으로 끝을 맺었다.

그리고 채색화 그림을 그릴 때 손가락 사이에 두 세 개의 붓을 끼우고, 게다가 귀에 붓을 하나 더 꼽고, 그리기도 하였다. 어찌나 빠른지 화선지 전지크기를 완성하는데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아마도 그 당시 수업을 들었던 학생들에게 강렬하게 남아 있는 스승의 일면일 것이다. 술에 취하시기라도 하면 그의 호방한 필치는 한결 더해졌다. 마치 무술에서 ‘취권’이 있듯이 ‘취필’로 후진들에게 시험을 보이실 때면 그 기개와 필력을 감히 누가 흉내를 낼 수 있으랴?

그러나 그렇게 정열과 낭만이 있었던 반면 가난한 시절이었다. 그는 평생 모은 재산이 없었다. 월급을 받기라도 하면 사람사귀기와 술에 금전을 쏟아 부어, 즐기며 사는 호방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또한 개인적인 욕심이 없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정의로운 사람이었다.

스승님은 발병하기 직전까지 학교수업을 계속하셨다. 연로하셨지만 그만큼 후진양성에도 열정은 여전하셨던 것이다. 젊은 시절 맺어진 윤제선생님과의 인연은 정말로 ‘인연 아닌 인연’이 되어 재능을 이어받은 그의 아들이 나의 제자가 되었다. 당신은 연로하니 어린 아들을 잘 가르쳐 달라는 노장의 진심어린 부탁은 당신의 제자인 나에게 앞으로의 무한한 책임감을 주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실 한 아들이 아니라 당신이 못 다한 후진양성의 막중한 소임을 나에게 남기신 것이었다.

반평생을 넘어 붓을 잡고 매진해 왔다. 모든 것을 순리대로 이해하게 된다는 이순耳順-나이 육십이 되면 소리가 귀로 들어와 마음으로 통하기 때문에 그 이치를  깨달아 저절로 얻게 된다는 「논어論語」에 나오는 공자의 말씀-이 목전에 닿으니, 이제야 비로소 스승님의 짧은 단상에 공감되어진다. 돌이켜보면 결국 안다는 것은 모르는 것이요, 도리어 모르는 것만도 못한 것이며 깨친 것도 도리어 아니 깨친 것만 못하여 한탄스러운 것을......

‘땅 위의 바위는 구름은 스쳐 보내되 붙잡지 아니한다’는 당신의 말씀처럼 그는 세상의 뜬 가치에 미련을 두지 않고 주향酒香와 묵취墨趣 속에서 한 세월을 살았던 예술가였다.

글·정갑주/동아대 회화과 교수

작성자
예술부산 2010년3/4월호
작성일자
2012-05-29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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