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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어찌 옳지 않은 것을 추종해 이익을 얻겠느냐?

길에서 청렴을 만나다 ②정약용

내용

어찌 옳지 않은 것을 추종해 이익을 얻겠느냐? -정약용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鎔·1762~1836)을 이야기할 때 유배생활을 빼놓을 수 없다. 순조 1년(1801), 정약용 나이 마흔에 유배길에 오른다. 경상도 장기현(포항시)과 전라도 강진군에서 의 유배생활은 16년간 계속됐다.

정약용의 첫째 아들 정학연은 하루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냈다.

“귀양살이의 고통이 얼마나 심하십니까? 다행히 소자가 유배에서 풀려날 방안을 마련했습니다. 판서로 있는 사촌 홍의호와 아버님의 석방을 막고 있는 이기영 대감과 강준흠 대감에게 용서를 구하신다면 일이 잘 풀릴 듯하옵니다.”

그러나 정약용은 자신의 신념을 버리는 것은 유배생활보다도 더한 고통이라 생각했다.

“천하에는 두 개의 큰 기준이 있으니, 하나는 시비(是非)이고 다른 하나는 이해(利害)이다. 여기에서 다시 네 단계의 등급이 나온다. 옳은 것을 지키며 이익을 얻는 것이 가장 높은 등급이고, 그 다음이 옳은 것을 지키며 해를 입는 등급이고, 그 다음이 옳지 않은 것을 추종하여 이익을 얻는 경우이고, 가장 낮은 것이 옳지 않은 것을 추종하여 해를 입는 것이다. 네가 제시한 방도는 필시 셋째가 아니면 넷째이니 내가 어찌 이런 일을 하겠느냐. 내가 절개를 굽혀서야 되겠느냐?”

다산 정약용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모진 수난 생활에도 학술활동에 매진했다. 모든 것을 잊고 학문에 몰두한 결과로 나온 것이 바로 ‘주역사전’, ‘맹자요의’,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과 같은 500권의 주옥같은 저술들이다.

국민권익위원회 청렴교육 자료.

백성을 다스리는 것에 대한 도리를 논술한 책 ‘목민심서’. 유배생활 하는 동안 저술한 것으로 유배가 끝나는 해인 1818년 완성됐다.

뛰어난 실력과 인품 지닌 인물

실학자이자 19세기 초 조선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던 개혁가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鎔·1762~1836). 그는 정치·과학·예술 등 다방면에 탁월한 업적을 남겼으며, 늘 국가와 백성을 생각한 인물이었다.

정약용은 1762년 경기도 광주군 마현(남양주)에서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학문이 높은 사람만 될 수 있다는 옥당 관리, 즉 홍문관 관리를 8대 연속으로 배출한 명문가였다.

어릴 때부터 영특했던 정약용은 스물두 살에 소과 시험인 생원시에 합격, 스물여덟에는 대과인 문과에 급제했다. 20대에 대과까지 패스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는 병조참의(국방부 국장), 황해도 곡산부사(시장, 군수), 부승지(대통령비서) 등을 역임하며 탄탄대로를 달렸다. 정조는 능력 있는 인재를 알아보고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정약용 또한 뛰어난 업적으로 정조의 총애에 보답했다.

정약용이 강진에서 처음 자리 잡은 집 ‘사의재(四宜齋)’. 사의재는 ‘생각, 용모, 언어, 동작을 마땅히 바르게 하는 방’이라는 뜻이다.

부당한 일을 바로잡는데 앞장서다

정약용은 실력뿐만 아니라 맑고 곧은 성품과 행실을 갖고 있었다. 탐욕이 없었으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공공의 이익을 저버리거나 자신의 일을 통해 부당한 이익을 취하지 않는 이상적이며 청렴한 관료였다. 그는 포악한 정치를 하는 관리들을 신랄히 비판하며 “위국애민(爲國愛民)을 달성하지 못하는 지도자라면 현직에서 바로 물러나야 한다”고 일갈했다.

“전 삭녕(현 강원 철원군과 경기 연천군 일대)군수 강명길은 탐욕이 넘치고 인색함이 심한 자입니다. 백성의 소송과 관청 업무는 뒷전이고, 식비와 녹봉을 후려쳐 차지하고 멋대로 거둬들였습니다. 향청(鄕廳·조선의 지방자치기관)의 임원은 뇌물 바치는 문을 항상 열어놓고 있습니다.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수령의 짐 꾸러미가 너무 무거워 나룻배로 실어 나를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1794년 다산이 정조에게 보고한 내용이다. 당시 경기도에는 지독한 흉년이 들었고, 백성의 먹을거리를 걱정한 정조는 다산을 암행어사로 파견했다. 다산의 보고를 받은 정조는 부평부사로 부임해 있던 강명길을 즉시 파직했다.

다산은 ‘정치’란 ‘바로잡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토지를 개량해 백성에게 고루 나눠주고, 유통을 원활히 해 물자를 통하게 하며, 멸망할 위기에 있는 사람을 구제하는 게 모두 정치라고 했다.

강진군에 있는 다산유물전시관. 정약용의 생애와 업적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작성자
김정희
작성일자
2012-05-25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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