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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제1492호 기획연재

“부산 전동차 크기를 서울에 맞추라니”

부산시정 현대사 숨은 얘기를 찾다- 제1화 · 부산지하철 뚝심으로 뚫다 ⑤

내용

“부산지하철 전동차 크기를 서울과 같은 규격으로 하라니요?”

“부산이 서울을 따라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부산과 서울은 엄연히 인구가 다르고, 지형이 다릅니다. 차량 폭을 똑같이 하라는 말에 도저히 공감할 수 없습니다. 부산은 부산특성과 실정에 맞춰 해야겠습니다.”

전동차 규격을 놓고 정부와 부산, 부산과 서울업체간 한바탕 입씨름이 벌어졌다. 입씨름 정도가 아니었다. 국내굴지의 대형업체들은 외부 압력을 행사하며 로비를 벌였고, 정부 관련 부처는 상당 부분 업체와 뜻이 맞아 있었다. 1980년의 일이다.

부산지하철 전동차는 서울보다 폭이 좁고, 길이가 짧다. 업체로비를 받은 정부는 부산 전동차를 서울 규격에 맞출 것을 종용했지만, 부산은 부산인구와 지형특성에 맞추겠다며 버텨 결국 뜻을 관철시켰다. 사진은 부산지하철 1호선 개통에 앞서 가진 시승식 모습. 왼쪽 모자를 쓴 임원재 부산지하철 기획단장이 한 방송사 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지하철 건설을 위해 필요한 첫 단계는 토목공사 설계다. 토목공사 설계를 하려면 가장 먼저 전동차 규격과 전기공급 방식을 결정해야 했다.

상공부, 업체로비에 “서울 맞춰 표준화하자”
부산, “인구·특성 따라 하겠다” 끝내 버텨

“어느 날 상공부(지금의 건설교통부)에서 ‘차량규격 표준화회의’라는 것이 열렸습니다. 서울시 지하철본부장, 철도청 관계자, 국내굴지의 D, H그룹 관계자들이 함께 자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회의 명칭에서 보듯이 말이 회의지 이미 결론을 내놓고, 차량규격을 서울과 통일하는 쪽으로 몰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부산에서 올라간 우리는 발끈했지요. 한바탕 고성이 오갔습니다.”

당시 부산지하철 기획단장 임원재 씨, 계획계장 조창국 씨, 설계계장 이재오 씨, 전기계장 윤종육 씨 등의 증언이다.

“세계 어느 도시도 그 도시 실정에 맞춥니다. ‘전동차 표준화’라는 말은 지금껏 단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지하철이 발달한 프랑스는 노선에 따라서 전동차 길이와 폭을 만듭니다. 심지어 고무타이어도 씁니다. 여기 계신 분들이 저희들 보다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부산은 부산대로 도시특성이 있으니, 부산특성에 맞춰야 하겠습니다.”

임 기획단장을 비롯한 부산 지하철 건설의 주역들은 이날 회의에서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서울의 전동차 규격은 폭 3m20㎝에 길이 20m다. 부산 전동차는 서울보다 폭이 40㎝ 작은 2m80㎝에 길이 역시 2m가 짧은 18m다. 그 이후 건설한 대구, 대전, 광주 등의 전동차 규격 역시 부산과 같다.

전동차의 크기는 장래 이용할 승차인구와 노선의 지형적 여건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 원칙이다. 상공부는 그런 부분을 무시하고 전동차를 만든 회사(메이커)를 내세워 서울과 같은 규격으로 결정할 것을 강력하게 권유했다. 전문가라고는 없는 ‘부산촌놈’이라 생각하고, 힘으로 밀어붙이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부산촌놈’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전동차 규격 표준화라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꼭 표준화를 하려면 주요 부품에 대해서 표준화하는 게 효율적이지 않습니까? 주요 부품을 표준화 해놓으면 언제라도 소모품을 바꿔 끼울 수 있지 않습니까? 전동차 규격을 표준화시키면 어쩌자는 겁니까? 아예 전동차를 통째로 바꾸자는 이야깁니까?”

서울 폭 3.2m·길이 20m 부산 2.8m·18m
부산 뜻 관철했지만 두고두고 ‘괘씸죄’ 곤욕

부산은 전동차 규격을 서울과 달리 해야 할 이유로 여러 가지를 더 내세웠다. 첫 번째가 공사비. 전동차 폭을 서울처럼 3m20㎝로 할 경우 토목공사비가 700억원이 더 들어간다는 점을 내세웠다. 700억원은 부산 전체 전동차 구매가격의 50%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 돈을 정부가 지원하겠다면 3m20㎝로 할 용의가 있다고 대들었다. 또 하나는 인구. 서울은 당시 인구가 1천만명을 넘었지만 부산은 20년 뒤 예상인구가 480만명에 불과하니, 굳이 건설비를 낭비하면서까지 전동차 폭을 크게 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폈다. 또 지하철 노선의 지형여건이 서울보다 불리해 급경사, 급곡선이 많은 지점에도 정거장을 설치해야 하기 때문에 플랫폼과 전동차간 이격거리를 좁히려면 전동차 길이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 관계자와 업체 대표들도 만만찮았다.

“상공부와 업체 관계자는 좁은 나라에서 전동차 규격이 도시마다 다르면 제작비도 많이 들고, 생산의 표준화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그래서 또 맞받아 쳤습니다. 그런 논리라면 자동차는 왜 여러 가지냐? 길이와 폭을 똑같게 표준화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몇 시간에 걸친 논쟁과 논리 싸움 끝에 결국은 상공부가 부산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부산지하철 전동차의 폭을 2m80㎝, 길이를 18m로 만든 이야기다.

그날 ‘차량규격 표준화회의’에서 부산은 논리 싸움에서 이겨 뜻을 관철시켰지만 ‘괘씸죄’는 두고두고 치러야 했다. 이후 열린 정부감사 때마다 부산은 전동차 규격 문제를 빌미로 많은 시달림을 받았다. 요즘보다 행정이 다소 어둡고, 지방자치가 아닌 정부 일변도 체제에서 벌어진 일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그때 부산지하철의 전동차 규격은 잘 결정했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다른 지방 도시들이 부산의 전동차 규격을 따라 했다는 것이 그날의 결정이 잘 된 것임을 입증해준다.

작성자
박재관
작성일자
2011-09-21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부산이라좋다 제1492호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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