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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부산 개항 우리나라 개화기 출발점

1876년 부산 개항… 서구 문물·문화 부산으로 밀려와
이야기 한마당 - 우리나라 개화기와 부산개항

내용

개화기(開化期)를 우리말 큰사전은 "개항(開港) 때부터 대한제국이 망한 때까지의 시기"라 하고 있다. 사전 그대로의 뜻을 따르면 이 개항은 부산의 개항이 중심이라고 봐야 한다.

부산의 개항은 1876년 조·일수호조규에 의해 이뤄졌다. 대한제국이 망한 때라 한 것은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제로 점유한 1910년을 말한다. 이 사이가 35년이다. 이 35년은 우리나라 개화기이자 부산개항기가 된다.

우리나라 개화기와 부산개항의 의미

그러면 개화기가 되는 부산의 개항기를 살펴보자. 앞에서 말한 조·일수호조규는 강화도에서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 체결한 조약으로 흔히 '강화도조약'이라 한다. 이 조약이 부산을 개항케 한 조관(條款)은 제4관이다.

제4관의 첫 머리는 "조선국 부산초량항(釜山草梁項)에는 일본공관이 있어 오랫동안 양국 국민의 통상구역이 되어 있다. 이제 마땅히 종전의 관례와 세견선(歲遣船) 등의 일을 개혁하고 새로 만든 조관(條款)을 근거로 무역사무를 처리하도록 한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부산초량항의 '항'을 잘못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이 때의 '항'은 목 '항(項)'이지 항구 '항(港)'이 아니다. 그 당시는 지금의 영도대교가 가설되기 이전으로 용두산(본 이름은 草梁小山(초량소산)) 아래 바다와 영도 쪽 바다 사이 좁은 물목을 '草梁項(초량항)'이라 했다.

일본공관이라 한 것은 그 당시 지금의 용두산 주위에 있던 초량왜관에서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 물품을 매매하는 통상이 이뤄진 상관을 말했다. 그렇게 통상을 해 왔지만 이제까지 일본(주로 대마도)에서 1년에 몇 척의 배만 올 수 있게 조선 측에서 제한한 그 세견선 제도를 고쳐 새로 조약을 만들어 무역사무를 본다는 것이다.

그렇게 강화도조역으로 개항한 부산의 항구는 그 동안 왜관으로 왜선이 오가던 초량항(草梁項)의 초량왜관 선창이었다. 그 자리는 지금의 동광동에 있는 부산데파트 앞이 바다였을 때의 그 바다이다. 말하자면 지금의 중앙동 연안부두에서 남으로 롯데월드를 짓고 있는 동쪽자리 짬까지다.

개항장의 일본인 거류지

흔히들 부산초량항의 항을 부산항으로 생각하고 지금의 북항인 부산항 전체가 개항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건 아니다. 지금의 부산북항인 그 당시의 수정동 앞의 두모포나 좌천동 앞의 부산포 우암포 감만포 용당포는 종전대로 우리의 포구로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통상을 하기 위해 항구를 열자니 그에 따른 설비와 사람이 거주할 땅이 필요했다. 그래서 강화도조약 제4관에는 "개항한 곳의 대지(垈地)를 임차(賃借)하고 가옥을 짓는 일들에(조선 정부가)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에 따라 우리 정부가 일본에 빌려준 땅이 그 동안 일본인이 상행위를 할 수 있게 제공해 주던 용두산 주위(지금의 동광동과 광복동 지역) 초량왜관 자리였다. 말하자면 초량왜관 자리가 개항장 자리가 된 것이다.

이 개항장을 일본이 매년 일화(日貨) 50엔을 조선 정부에 지불하는 조건으로 조차(租借) 한 것이었다. 이 조차지가 우리나라로서는 외국에 빌려준 맨 처음의 땅이었다. 강화도조약이 맺어진 1876년 이후에는 이 조차지로 일본인이 몰려들었다. 그렇게 몰려드는 사람은 초량왜관 때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초량왜관 때는 대마도 장사꾼이 오가면서 머무는 정도였다. 머무는 인원도 100∼20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고 대마도 도주가 보내는 왜관 관주가 왜관 내부를 다스렸다. 그러나 일본정부가 정식으로 조차지를 얻어 일본전관거류지(日本專管居留地)가 되자 대마도를 비롯해서 규슈(九州) 지방과 야마구찌현(山口縣) 일대의 일본인이 모여들어 상권을 가지면서 상주지역을 형성해 갔다.

일본 조계지의 관리는 일본정부에서 파견된 관리관, 이사관, 영사관 등의 이름을 가진 관리가 그들 일본인을 다스리며 우리 정부 또는 동래부와 외교교섭을 했다.

부산, 국제항 기반 조성

그러나 거류지의 일본인은 우리 지역을 함부로 다닐 수 없었다. 다닐 수 있는 간행리정(間行里程)이 법으로 정해져 있어서 그 범위 안으로만 다닐 수 있었다.

그 간행리정은 처음은 전관거류지에서 10리였는데 개항기가 계속되는데 따라 일본측의 끈질긴 요구로 간행리정이 넓어지고 전관거류지도 부평동 남부민동 쪽으로 확대되고 항구도 오늘날의 국제 부두 쪽으로 넓어져 갔다.

그런데 부산의 개항은 무력을 앞세운 일본에 의해 강제로 체결된 일방적인 불평등 조약인 조·일수호조규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개항 이후 정부에서 여러 선진국과 통상조약을 맺는 한편 조차지를 선진국에 내어줌으로써 국제항으로 탈바꿈해 갔다. 1882년에는 우리나라와 청국(중국) 사이 조·청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1884년에는 청국영사관이 부산에 주재하고 초량동에 9만700㎡의 청국조차지가 설정됐다.

1883년에는 영국과 통상조약을 맺고 영국영사가 주재하며 영주동의 영선산(1910년 착평공사로 없어짐)에 2만895㎡의 조차지를 한 해 16원 70전으로 조차했다.

개항한 부산항으로 들어오는 배는 일본 선박만이 아니었다. 청국 영국 러시아 미국 독일 프랑스 선박도 들어왔다. 이러한 선박들에 실려오는 것은 개화의 서구상품이었다.

일본 선박에 실려오는 상품도 중간무역의 구미상품이 많았다. 개화기의 그날 개화복(양복) 개화모(서양모자) 개화화(구두) 개화장(서양지팡이) 같은 이름이 생겨난 게 그 여파였다. 그 당시의 외래품은 배를 타고 온다고'박래품(舶來品)'이라고도 했다.

개화기 상품, 배 타고 온다고 '박래품(舶來品)'

외래 개화품과 함께 그 동안 쇄국이 가진 봉건성도 개항지에서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의 지혜가 깨어서 열린다는 개화를 강화도조약으로 비롯된 부산의 개항에 기점을 둘만도 했다. 부산 개항 4년 뒤인 1880년 원산이 개항하고 7년 뒤 인천이 개항했지만 인적 물적 교류는 부산에 따르지 못했다. 그러나 1910년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제로 점유하자 개화기가 가진 개방적 진취력은 일본의 사슬에 묶여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부산 개항기 35년은 우리나라 개화기 35년이 된다. 그런데 실제 개항기의 항구나 개항장은 지금의 중구지역에 국한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역사로서 부산사를 말할 때면 그 좁은 지역이 부산 전체를 말하는 것처럼 되어 있다. 그 말은 다른 지역의 지역사는 '신라시대 → 고려시대 → 조선시대 → 일제강점기 → 광복' 이렇게 시대를 구분을 하면 되는데 부산사를 말할 때는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 사이 '개항기'를 넣지 않으면 부산의 지역사를 풀 수 없다는 사실이다.

부산사가 가진 특이성이 여기 있다. 그만큼 부산의 지역사는 부산사와 함께 한국사의 변천, 특히 한국의 개화기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말이 된다.

부산이야기 2007년 7·8월호 기사 입력 2013-09-24 다이내믹부산 제호
자료출처 : 다이내믹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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