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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부산인물 부산진에 다 있었네!

박재혁·최천택·장건상·양정모… 수많은 독립운동가·경제인 배출
이야기 한마당 - 부산진 사람들

내용

지역이나 나라를 지키는 군사가 머물고 있는 곳을 '진영(鎭營)'이라 한다. 부산(釜山)이란 산(오늘날의 좌천동 증산으로 '시루대'라고도 함) 아래 수군 군사진영이 조선 초부터 머물고 있어서 좌천동 지역을 '부산진'이라 했다.

부산진의 역사적 유래

임진왜란 이후 수군진영을 범일동의 자성대성으로 옮겼다. 그래서 조선 후기는 동구의 좌천동과 범일동 지역을 부산진이라 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행정구역은 좌천동과 범일동을 동구에 넣고 부산진구에서 벗어나 있다. 이는 일제강점기인 1936년 부산부가 오늘날의 부산진구 지역에 출장소를 두면서 좌천동과 범일동에서 벗어난 자리인데도 부산진출장소라는 이름을 붙인 잘못을 1957년 부산시가 구제(區制)를 실시하면서 출장소 이름 그대로 '부산진구'라 한 것이 잘못이었다.

부산진 사람들을 이야기하려고 하면서 부산진구 얘기가 나온 것은 진짜 부산진 사람, 말하자면 옛날의 좌천동과 범일동 사람 얘기를 혹시 행정구역상의 부산진구 사람과 혼돈할까 해서 한 말이다.

그리고 지금의 좌천동과 범일동의 평지지역은 바다가 메워진 매축지대로 옛날은 지금의 반 넓이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부산진 사람들은 민족의식과 국가관이 강했다. 그것은 임진왜란 때는 왜적과의 첫 싸움터가 되어 선대 주민이 부산진성에서 옥쇄(玉碎)하다시피 했고, 수군진영이 계속 바다를 지키고 있었던 국방의 요지가 되어 국가관이 투철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한 사실은 부산진 지역에서 배출된 선각자와 항일투사에서 본다.

부산진의 선각자·항일투사

평민의 몸으로 1693년과 1696년 두 차례나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막부에 울릉도와 독도는 우리 땅임을 밝혀 그들의 인정을 받아낸 안용복(安龍福)은 좌천동 출신이다.

그 동안 수영 출신으로 얘기되어 왔으나 1996년 일본 돗도리현 현립박물관에서 안용복이 그 때 차고 있던 호패(號牌)의 기록이 확인됨으로써 그의 주소가 부산의 좌천 1리였음이 밝혀졌다.

개화기의 선각자 박기종(朴琪淙)도 1839년 좌천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구한말의 절영도첨사, 부산항 경무관, 중추원의관 등 요직을 거치면서 부산 최초의 근대교육기관인 개성학교 설립과 상법회사 설립에 중추적 역할을 했다. 1920년 9월 13일 일제강점기의 부산경찰서를 폭파하려고 서장실에 폭탄을 던져 우리의 독립 의지를 천명한 박재혁(朴載赫)의사는 1895년 범일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대구형무소에서 단식으로 자결했다.

박재혁과 함께 독립운동을 한 최천택(崔天澤)도 1896년 좌천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제경찰에 54차례나 검속될 정도로 철저한 항일운동가였다.

중국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상하이임시정부 요인인 양한나(梁漢拿)도 1892년 좌천동에서 태어났다. 상하이임시정부에서 국무위원을 역임한 장건상(張建相)은 1883년 경북 칠곡에서 태어났으나 어릴 적 부모를 따라 좌천동으로 이주하여 좌천동에서 구국이념을 쌓아갔다.

1868년 좌천동에서 태어나서 1919년 이후 만주에서 김좌진, 이범석과 함께 독립군 훈련에 헌신한 최상운(崔尙雲) 또한 좌천동 출신이다. 이러한 지사들이 좌천동에서 많이 배출된 것은 임진왜란 때 정발(鄭撥) 장군과 함께 싸우다 순사한 분들을 모신 정공단(鄭公壇)에 지역 유지들이 선열의 유지를 이어받기 위한 교육기관인 육영재(育英齋)를 설립한 영향도 있었다. 그것은 1919년 3·1 운동 당시 정공단에 태극기가 계속 꽂혀져 있었던 일이나 박재혁 최천택 장건상 문상우(文尙宇·은행가) 들이 육영재에서 수학한 일로서도 알 수 있다. 육영재는 그 뒤 사립육영학교가 됐다.

부산진 여성들의 애국심

좌천동은 남성 뿐 아니라 여성들의 애국심 또한 옹골찼다. 구한말의 우리 정부는 일본의 농간으로 일본정부에서 1천300만원(1907년 통계)이란 거액의 국채(國債)인 빚을 지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우리 정부는 그 빚을 갚을 힘을 가지지 못했다. 갚지 못하면 국토가 일본에 빼앗길 것이란 당시의 국내 여론이 있었고, 그 여론은 절박했다.

이에 국채보상(國債報像) 국민운동이 일어났다. 이때 좌천동에서는 '좌천리 감선의연(減膳義捐) 부인회'가 조직되어 부인들이 반찬값을 매일 3∼4푼씩 줄여서 모은 돈으로 국채보상금에 보탰다. 좌천동 부인들은 또 부산진부인회를 조직하여 앞으로의 개명사회를 위한 여성교육을 위해 1908년 양정숙(養貞塾)을 개설하고 교사까지 신축했다.

좌천동의 여성운동 가운데 1919년 3월 11일의 부산진일신여학교의 3·1운동은 경상남도(당시의 부산은 경상남도 소속)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이었다.

이 같은 부산진의 민족의식으로 부산 개항기는 물론 일제강점기에도 좌천동에는 일본인의 거주는 딴 지역에 비해 아주 적었다. 부산진 사람은 딴 지역에 비해 민족이 가진 지사적(志士的) 지조(志操)가 기질화(器質化) 되어 있었다.

광복후 부산경제 일으킨 경제인들

광복후는 경제인으로 얘기를 돌려보자. 광복후의 이곳 출신 경제인으로는 부산상공회의소 1·2·3대 회장을 역임한 김지태(金智泰) 씨가 좌천동에서 태어났고, 4대 회장을 지낸 박선기(朴善琪)씨는 범일동에서 태어났다.

6대에서 14년 간 회장을 한 강석진(姜錫鎭)씨는 경북 청도 출신이지만 좌천동에 차린 동명제재소에서 사업의 기초를 닦으면서 그의 말 그대로 좌천동이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1976년부터 세 차례를 이어 회장을 한 양정모(梁正模) 씨는 범일동에서 태어났다. 이를 통해 광복후 부산의 경제를 일으킨 중추적 사업가는 좌천동과 범일동 출신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김지태는 1962년 부인의 장신구가 밀수품이라는 꼬투리로 부산일보 부산문화방송 한국문화방송과 함께 기업체 모두를 혁명정부에 헌납(?)해야 했고, 강석진 씨의 동명산업은 신군부의 전두환 정권 때 악덕기업으로 낙인찍혀 해체·도산하는 비운을 맞았다.

양정모 씨의 국제그룹 역시 1985년 전두환 정권에 의해 부실기업으로 낙인찍혀 수많은 산하 업체가 까닭 없는 공중분해를 당해야 했다.

그 때 양정모 씨는 정권에 정치자금을 대어주지 않은 괴심죄에 걸렸다고 했다. 그것은 김지태 씨나 강석진 씨도 같은 연유에서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국내의 쟁쟁한 기업가 중에서 하필이면 이곳 출신 기업가가 연이어 변을 당해야 했는가?

그 때 그런 말이 있었다. 이곳 출신은 광복전이나 광복후를 막론하고 굽히지 않는 지조, 그 지조 하나에 산다고.

부산이야기 2007년 5·6월호 기사 입력 2013-09-16 다이내믹부산 제호
자료출처 : 다이내믹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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