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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장군 오르내린 산 ‘장군산’

일본인 마음대로 지명 왜곡… 장군암 남쪽 ‘암남동’
이야기 한마당 - 서구 장군산·장군암

내용

서구와 사하구의 경계가 되는 천마산(天馬山·324m) 산줄기가 바다를 향해 남으로 내리다가 불쑥 솟아오른 봉우리 같은 산이 있다. 이 산을 장군산(將軍山·152m)이라 한다.

장군산 아래는 삼면이 바다인 반도(半島)형이 되어 장군반도 또는 암남반도라 하다가 1990년대 공원으로 조성·정비되면서 암남공원이란 공식 명칭을 가지게 되었다.

장군산·장군반도와 정운 장군

장군산에서 거슬러오른 천마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깎아지른 절벽이 된 그 위에 30명은 앉을만한 평평한 바위반석이 있다. 이 너럭바위를 장군암(將軍岩)이라 한다.

장군암은 송도지역은 물론 영도나 중앙동 지역에서 보면 천마산 동쪽 낭떠러지로 보이는데 영도로 가는 고압선 송전탑이 높이 서 있다. 장군암에서 바라보면 영도의 봉래산, 송도해수욕장 앞으로 널브러진 바다가 눈앞으로 펼쳐진다.

장군산과 장군반도의 유래를 말하고 있는 현재까지의 기록 거의 모두는 임진왜란 당시 부산포해전에서 전사한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 장군이 이곳에서 전사했다고 해서 그리 말한다고 하고 있다. 이 같은 기록은 몰운대에 세워져 있는 충신 정운순의비(鄭運殉義碑)가 '동래 몰운대는 옛날 녹도만호 증 병조판서 정운공이 순절한 곳'이라고 한 기록에 영향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 비문 내용은 실제 사실과 다르다.

이를 밝히기 위해서는 전라좌·우도와 경상우도의 3도 연합수군이 임진왜란 당시 부산포해전을 벌였을 때 정운공이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수군의 우부장으로 활약한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잘못 전해진 역사적 사실

그 날의 사실은 이순신 장군이 쓴 부산파왜병상(釜山破倭兵狀)에 소상히 나타나 있다. 그에 의하면 1592년 9월 1일(음력) 첫닭이 울 무렵 가덕도를 출발한 3도 수군이 왜의 수군 집결지가 돼버린 부산포(오늘날 동구 좌천동과 범일동 앞바다)로 진격하기까지 곳곳에서 28척의 적선을 쳐부수었다. 그러나 일방적인 우리의 전과일 뿐 큰 싸움이 벌어지거나 아군의 인명손실이 있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부산포에서 적선 470여 척과 벌인 싸움은 치열했다. 종일을 바다 위에서 싸운 우리 수군은 적선 100여 척을 쳐부수는 전과를 올렸다. 이 때 정운공이 적의 철환(鐵丸)을 머리에 맞고 전사한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숨을 거둔 정운공을 별도 사람을 시켜 각별히 호상(護喪)했다고 적고 있다.

이 부산포해전에서는 육지에 오른 적도 없었다. 바다 위에서 종일 싸우다가 해가 저물어서 가덕도로 돌아왔는데 돌아온 시간을 삼경(三更:밤 12시쯤)이라 적고 있다. 이 기록으로 보아서는 정운공이 전사한 곳은 오늘날의 좌천동과 범일동 앞바다의 배 위가 된다. 암남동의 장군산이나 장군반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관련이 없다해도 나라와 겨레, 인류를 위한 공이 큰 분을 기리기 위해 지명을 삼을 수는 있다. 그것은 충무공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어도 그를 기리기 위해 충무동이나 충무로 같은 지명을 쓰는 것과 같다.

그러나 정운공이 장군산에서 전사했다든가 송도 앞바다가 부산포해전의 격전지라고 사실 아닌 사실을 끌어들일 수는 없다.

장군산 유래와 전설

천마산 동쪽의 장군암에 대해서는 여러 전설이 있다. 그 하나는 옛날 힘세고 날랜 장군이 장군암에서 장군산으로 날아 뛰고, 장군산에서 영도의 봉래산으로 날아 뛰었다가 다시 장군암으로 뛰어왔다는 전설이다. 그런데 장군암에서 보면 장군산이나 영도의 봉래산은 실제 날아 뛸 만큼 가깝게 보인다.

또 하나의 전설은 장군암에서 200m쯤 내린 용암사의 용암(龍岩)에는 하늘에서 용이 내리고 장군암에는 하늘에서 장군이 내려 악인(惡人)을 다스렸다는 전설이다. 또 하나는 천마산의 유래와 비슷하게 하늘에서 용마가 장군을 태워 내린 바위가 장군암이란 것이다.

지명은 실제 사실로 주위 사람들의 공감대에서 생겨나는 경우가 많다. 장군산과 장군암도 사람이 그리 많이 살지 않았을 그 때부터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이름으로 본다. 그렇다면 어느 때의 어느 장군을 말했을까? 그것은 다대포수군첨사영의 절충(折衝)장군일 것이다.

장군 자주 오르내린 산 '장군산'

다대포수군첨사영은 조선초에서 말까지 바다를 지키기 위해 오늘날의 다대동에 자리잡고 있던 수군진영이다. 나라의 최남단인 다대진은 나라의 최북단인 만포진처럼 변지구(邊地區)로 나라에서 매우 중요시하여 군의 통수자도 군직으로서는 최고 위계인 정3품 당상관인 절충장군을 두었다. 절충장군이란 적의 침입을 막고 군사상의 외교담판까지 조정에서 위임받은 장수다.

다대첨사영의 절충장군은 국가에서 경영하는 동래지역 국마장(國馬場:말을 기르는 목장)을 감독하는 감목관(監牧官)을 겸하고 있었다. 그 당시 동래지역 국마장은 절영도(영도)와 현재의 사하구·서구·남구 지역이 중심지였다. 다대첨사영은 지금의 구평동에 있던 서평포만호영까지 관장하고 있었다.

공식 호칭이 장군인 이곳 장군은 다대포에서 5리 안의 서평포만호영도 순시해야 했고, 10리 쯤 떨어진 천마산 주위 목마장과 함께 바다도 감독 순찰해야 했다.

장군이 순시 순찰로 나올 때는 수행군관이 많이 따라 위풍도 당당했다. 그렇게 나와서 바다와 목장지역을 가장 잘 살필 수 있는 곳이 장군산과 장군암이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은 장군이 자주 오르내리는 산이요, 장군이 오가면서 좌정하는 바위라 하여 장군산·장군암이라 하게 된 것이다.

암남동 동명 유래

암남동의 동명 유래도 지금까지의 거의 모든 기록은 '아미동의 아미골 남쪽이 되어 암남동이라 한다'고 하고 있다. 이는 일본인 도꼬오 겐겨오(都甲玄卿)가 일제강점기인 1937년경 부산부사원고를 쓰면서 식민지사관을 심기 위해 일본의 일본서기(日本書紀) 같은 일본서적에서 견강부회식으로 인용, 곡필(曲筆)을 한 그 곡필이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는 잘못이다.

암남동은 장군암 남쪽이 되어 암남동이라 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현재 장군암은 남부민동에 속해 있지만 암남동의 마을 이름이 먼저 생기고 남부민동이 뒤에 생겼다. 암남동 이름의 유래가 된 장군암은 암남동 지역으로 보아서는 맨 먼저 햇살이 비쳐드는 곳이 되어 옛부터 우러러보는 이마와 같은 존재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부산이야기 2007년 3·4월호 기사 입력 2013-09-10 다이내믹부산 제호
자료출처 : 다이내믹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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