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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제1553호 기획연재

“충렬사 기와 잘 얹었다” 대통령 한마디에…

부산시정 현대사 숨은 얘기를 찾다 - 제3화 문화시설 짓고 가꿔 문화불모지 오명 벗다 4

내용

기와 색깔 상식 밖 논란 3개월여 만에 싹 사라져
갖은 트집·반대 무릅쓰고 충렬사에 국내최대 기록화
부산시민 정신 구심점으로

옛말에 길가에 집 짓지 말라고 했다. 별 관계도 없는 사람들이 오고가면서 한마디씩 거들면 배가 산으로 가듯, 집 짓는데 도움은 되지 않고 방해가 될 뿐이라는  것을 빗대서 한 말이다. 부산 동래 충렬사 정화공사를 할 때가 딱 그 짝이었다.

충남 아산의 현충사 성역화로 전 국민의 이목이 아산으로 집중되던 때가 있었다. 1975년 5월 25일, 당시 부산시 문화계장이던 김부환(73) 씨는 부산 충렬사 제향을 마친 뒤 시장을 모시고 오는 차 안에서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시장님, 일년에 4억씩 3년간 12억만 주시면 아산 현충사 못잖게 충렬사를 정화해서 부산시민 정신의 구심점으로 삼도록 하겠습니다."

당시 부산시장은 박영수 씨. "이 사람아, 내가 부산시장을 천년, 만년한단 말이가." 그 한마디로 정화사업은 물 건너 간 듯싶었다. 문화계장을 3번째 하고 있던 김부환 씨는 부산시에서는 만년 문화계장을 못 벗어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듬해 8월 자청을 해서 상공부 소속 마산수출자유지역으로 근무처를 옮겼다. 5개월여가 지난 1977년 1월 느닷없이 박 시장이 그를 불렀다.

"이 사람아, 상공부에서 국가에 충성하나, 부산시에서 충성하나 똑 같은 것 아닌가. 자네는 사학과를 나와서 문화재 업무에 흥미가 있고, 언젠가 나에게 12억만 주면 충렬사를 정화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15억 예산을 확보했으니 나를 좀 도와주게."

부산시의 유능한 사무관들을 제쳐두고 "나를 좀 도와주게" 하는 겸손한 시장의 뜻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상공부 근무 6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부산시로 돌아왔다. 그것도 신설된 부산시 문화재과장으로 승진해서 돌아오니 벌집을 쑤셔놓은 듯 시끄러웠다. 지방행정사무관으로 승진한 지 2년이 겨우 지난 시점에 과장 승진이었으니 주위의 따가운 질시와 견제가 상상을 초월했다.

온갖 질시와 견제 속에서 충렬사 정화작업이 시작됐다. 지금 같으면 시민반대에 막혀 꿈도 못 꿀 일이었지만 충렬사 주변의 교회와 집들을 철거하고, 부지 7만6천33㎡을 확장했다. 난제가 첩첩산중이었다. 무엇보다 공사감독은 도시계획국장, 문화재 고증은 문화재과장 책임 아래 시행되는 것이어서 국장과 과장 사이에 사사건건 부딪히는 일이 많았다. 일부 국장·구청장들은 서로 잘 보이려고 시장에게 아부성 제안이나 건의를 늘어놓기 일쑤였다. 일일이 해명하고 설득하느라 일은 쉽사리 진척되지 않았다. 정확한 지적은 열 번, 백 번이라도 고쳐야 하겠으나 그렇지 못한 지적이 문제였다. 더러는 귀가 솔깃해진 시장까지 설득하고 해명하자니, 이게 무슨 짓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입술을 깨물어가며 처음 해결한 일은 기념관 안에 전시할 기록화. 100호 정도 크기의 16점을 제작하는 것으로 조잡하게 계획된 것을 한국에서 가장 큰 3천호 크기 2점과, 300호 크기 4점으로 압축했다.

기존 계획을 뒤집는 것인데다 예산까지 더 드는 것이어서 반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결재를 올려도 결재가 나지 않았다. 견디다 못해 라인을 생략하고 시장 결재를 바로 받아 시행에 들어갔다. 윗분들에게는 그것이 두고두고 눈엣가시였다. 점잖기로 소문 난 김학중 당시 부시장 앞에서도 호된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서울대 미대 정창섭 교수에게 의뢰해 '부산분전순국도', 부산대 이의주 교수에게 의뢰해 '동래보국충정도'를 완성했다. 당시 그린 그림들은 지금도 한국기록화 역사상 가장 큰 대작으로 충렬사에 자리 잡고 있다.

공사가 한창일 때 최석원 시장이 부임했다. 부임한 지 두 달이나 되었을까. 어느 날 시장께서 급히 찾는다는 전갈을 듣고 바람처럼 달려갔다. "자네 눈에 색맹 있나?" 밑도 끝도 없이 질문이 쏟아졌다. 어리둥절해 눈만 껌벅이고 있는데, "시장이 묻는데 대답을 안 하느냐"고 재차 윽박지르는 바람에 한다는 대답이 지금 생각해도 빙긋이 웃음이 난다. "예, 최근에 색맹검사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중·고등학교 입학시험 칠 때 색맹검사를 했는데, 그때는 이상이 없었습니다."

"그럼 충렬사 정당에 청기와를 올린다고 해놓고 왜 옥기와를 올렸소. 그리고 기와는 검어야 하는데 왜 희다 검다하는 불량품을 사용했소. 당장 기와를 교체하시오."

어디서 또, 무슨 말을 들은 것이 분명했다. 시장을 이해시키기 위해 가마에서 기와가 구워지는 과정, 고려청자의 빛깔, 문화재 보수공사에 쓴 청기와 견본과 사진첩을 만들었다. 기와는 보통 800~900도 사이에서 구우면 검은색이 되지만, 더 잘 굽기 위해 1천100도로 열을 가하면 은회색이 나오고, 은회색 기와가 10년 이상 세월이 흐르면 검어지게 된다는 보고서를 올려도 막무가내였다. 기와를 교체하라는 불호령뿐이었다.

5천만원이 넘는 관급 기와를, 그것도 하자가 없는데 무슨 재주로 교체를 한단 말인가. 2주에 한번씩 개최하는 대책회의 때마다 터지고 깨졌지만 묘책이 없었다. 주위에서는 위로는커녕 한술 더 떠서 교체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쪽으로 의견을 몰아갔다.

골머리를 싸매고 있던 1978년 1월, 오후 4시쯤 진해 별장에 계시던 박정희 전 대통령께서 사전예고도 없이 충렬사 현장으로 시찰을 나온다는 전갈이 떨어졌다. 서둘러 시장님과 브리핑 차트판을 들고 안락로터리를 돌아 대통령께서 하차하는 지점에 대기했다. 박 대통령이 탄 차가 시장이 서 있는 바로 앞에 섰다. 대통령께서는 한 발은 땅에, 한 발은 차안에 두고 미처 내리지도 않은 상태에서 충렬사를 쳐다보시더니 "야, 충렬사 기와 잘 입혔다"고 첫 말씀을 던졌다. 그 뒤의 대책회의부터는 기와 이야기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다. 3개월의 고심이 눈 녹듯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충렬사 정화사업은 기와의 색깔부터 기록화의 크기에 이르기까지 많은 우여곡절과 논란을 겪었다. 기와색깔의 논란을 잠재운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칭찬 한마디였다(사진은 부산정신의 상징 충렬사를 찾아 참배하는 시민들).

 

작성자
박재관
작성일자
2012-11-29
자료출처
다이내믹부산
제호

다이내믹부산 제1553호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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