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옛 정취 느끼며 걷는 문화 나들이
도시철도로 만나는 부산 - 토성(문화코스)
임시수도기념관·비석마을·감천문화마을… 부산 근·현대 역사 오롯이
- 내용
- 감천문화마을은 기존의 마을을 깨끗하게 보존하면서도 마을 곳곳에 공공미술 작품을 조화롭게 설치해 문화예술마을로 탈바꿈했다(사진은 감천문화마을을 찾은 관광객들 모습).
햇살이 아주 좋은 봄날이다. 휴일을 맞은 부산은 거리마다 사람들로 넘쳐난다. 부산을 찾은 여행자들의 해맑은 미소도 여기저기 눈에 띈다. 모두들 봄날을 만끽하느라 여유로우면서도 활기찬 모습들이다.
도시철도 1호선 토성역에 내린다. 역 주위로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즐거운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대부분 감천문화마을로 가는 사람들이다. 감천문화마을행 마을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소에는 길게 줄이 이어져 있다.
토성역을 중심으로 아미동과 부민동 주변은 한국 근·현대사의 신산했던 생활터전과 근대문화유산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일본인 공동묘지에 귀환 동포와 피란민들이 천막집을 짓고 살았던 '비석마을', 태극도 사람들이 맨손으로 '도인촌'을 일구었던 '감천문화마을', 일제강점기 수탈의 역사와 6·25전쟁 피란의 역사가 아로새겨진 임시수도기념관(옛 경남도지사 관사, 임시수도 대통령 관저)과 동아대박물관(옛 경남도청, 임시수도 정부청사) 등이 그 것이다.
옛 임시수도 정부청사, 지금은 동아대박물관
부산은 이렇게 질곡의 역사를 딛고 일어나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깊은 봄날, 그 길을 따라 또박또박 그 시절을 걸어보는 것이다.
토성역 2번 출구로 올라와 부민사거리 방향으로 걷는다. 곧이어 동아대 부민캠퍼스. 캠퍼스 정문에 있는 붉은 벽돌의 동아대박물관 앞에 선다. 부산이 임시수도였던 시절 정부청사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1925년 일제가 경남도청을 진주에서 부산으로 옮기면서 지었던 건축물이다. 부산시 등록문화재 41호.
6·25전쟁이 발발하고 후퇴를 거듭하던 정부는 마침내 부산에서 임시정부를 꾸린다. 이때 경남도청(현 동아대박물관)을 임시수도 정부청사로 사용했던 것. 이렇게 부산에서 꾸려진 대한민국 임시수도는 6·25전쟁 이후 1953년 8월15일까지 3년여를 지속하게 된다.
일제강점기에는 경상남도청으로, 6·25전쟁기에는 임시수도 정부청사로, 그 이후 부산지방법원 및 부산지방검찰청 본관 등으로 사용되며 영욕의 근현대사를 기억하고 있는 건축물이 바로 이 건축물이다. 그러하기에 옛 경상남도지사 관사(지금의 임시수도기념관)와 더불어 우리 근현대사의 정치·사회적 변화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부산의 대표적 공공건물인 것이다.
지금은 동아대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는데, 개국원종공신녹권, 동궐도 등 국보를 비롯해 보물 11점, 부산시 유형문화재 9점 등 다양하고 진귀한 유물 3만여 점을 상설 전시하고 있다.
임시수도 역사 담긴 임시수도기념관
임시수도기념관으로 오르는 길. 동아대 부민캠퍼스에서부터 임시수도 기념거리가 조성돼 있고, 오래전 시민의 발이었던 전차도 새롭게 단장해 전시하고 있다. 계단을 올라 임시수도기념관 앞에 선다. 1926년 일제강점기 조선침략을 위한 경남도지사 사택으로 지어졌다가, 6·25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란 온 임시수도의 대통령관저로 사용됐던 기구한 운명의 장소. 그렇기에 더욱 소중한 '반성과 교훈'의 역사적 장소다. 1983년 도청이 경남 창원으로 이전하면서 지금의 '임시수도기념관'으로 자리하고 있다. 부산시 기념물 제53호. 현관 앞 정원. 온갖 나무들이 짙은 녹음으로 싱그럽게 서있다. 참새들 옹기종기 모여들어 재잘재잘 노래하고 있다.
현관 앞 현판을 바라본다. 사빈당(思?堂), '나라를 생각하는 집.' 이곳에 들르면 항상 대한민국을 생각하라는 뜻이다. '두 번 다시 나라를 빼앗겨서는 안 되겠다'는 결심을 하라는 장소다. 독립운동가 한형석 선생의 글씨다.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응접실이 있다. 이곳은 이승만 대통령이 주요 정치 인사들과 정치 일정을 논의, 결정하고 외국 주요 인사들의 예방을 받기도 했던 곳이다. 서재에는 이 대통령 밀랍인형이 책상 앞에 앉아 있다. 가끔씩 진짜 사람으로 착각해 놀라는 방문객들이 더러 있다고 한다. 거실에는 관저 식구들이 모여 지내던 사생활 공간. 일본식으로 잘 조성된 후원은 이 대통령이 사색을 하거나 국내외 인사들과 환담을 나누던 장소였다고 한다.
2층은 이 대통령의 유품과 당시 역사자료를 전시하고 있는 전시실이다. 당시에는 대통령의 집무실로 사용됐고, 프란체스카 여사가 관저 살림살이를 맡아하던 곳이기도 했다. 이처럼 대통령 관저는 숙소로만 사용한 것이 아니고 대통령의 다양한 정치활동이 이루어지던 장소이기도 했다.
임시수도 1,000일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임시수도기념관. 이곳으로 '삐악삐악' 병아리같이 앙증맞은 유치원생들이 견학을 왔다. 이들의 맑은 얼굴에서 새로운 역사의 희망을 떠올리는 건 과한 욕심일까?
일본인 공동묘지에 세워진 비석마을
임시수도기념관에서 부산대 병원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이곳에서 감천고개를 향해 아미동 언덕길을 오른다. 꼬불꼬불 산복도로가 산길처럼 이리 휘고 저리 휘며 아미산으로 오르는 것이다. 한참을 오르니 도로 왼쪽으로 마을 쉼터가 하나 있는데, 이 부근이 일본인 공동묘지 위에 사람들이 천막을 치고 살면서 만들어진 비석마을이다. 비석마을은 공동묘지 위에 집터를 만들면서 묘비석을 주춧돌로, 기둥으로, 축대로 사용하면서 마을 이름이 자연스레 붙여졌다.
행정구역으로는 부산 서구 아미동 산 19번지. 감천고개에서 산상교회 주변으로 이어지는 아미동 16, 17, 19통 일대지역으로, 골짜기를 따라 일제강점기 시절 조성된 일본인 공동묘지가 있던 곳이다. 이곳 일본인 공동묘지는 부산항 개항 이후 왜관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일본인들의 묘지를 1907년 이곳 비석마을 쪽으로 모으면서 형성됐다. 그 넓이만 해도 총 7만9천200㎡에 이르는 큰 규모의 공동묘지였다.
광복 이후 연고가 없어진 묘지 위에 일본 귀환 동포와 6·25전쟁 피란민들이 하나 둘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한 것이 지금의 비석마을이 된 것. 묘지 면적이 9.9~23.1㎡ 정도가 되니, 그 위에 올린 집 규모도 고만고만하다. 묘비석을 건축자재로 사용했기에, 마을 골목과 집 주변 곳곳에는 비석과 상석 등 묘지의 흔적들이 아직도 남아있다. 마을을 자세히 둘러보면 오르막길 계단이나, 석축, 담벼락 등에 하나, 둘 쯤 묘비석이 박혀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그 빗돌에는 가문의 문양이나 대정, 소화 등 일본의 연호도 찾아볼 수가 있다.
이처럼 비석마을은 '죽은 자의 집' 묘지 위에 '산 자의 생활터전'을 세운 곳이다. 해서 삶과 죽음, 사람과 영혼이 함께 공존하는 공간이 비석마을이다. 아직도 집안에 촛불을 켜고 죽은 자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주민들이 있다고 하니, 이 모두가 우리가 공유해야 할 아픈 역사의 유산인 것이다.
감천문화마을, 도인촌에서 문화예술마을로
비석마을에서 감천고개로 오르다 보면 오른쪽으로 계단식 마을이 펼쳐진다. 1955년 태극도 사람들이 보수동에서 옮겨오면서 '도인촌'을 형성하는데 이것이 '태극도 마을'이다. 그때는 흔히들 '기차마을'이라고 불렀다. 밤이 되면 루핑집 창문으로 불빛이 새어나오는데, 멀리서 보면 수평으로 길게 이어진 집이 달리는 밤기차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높은 언덕배기의 마을이 성채처럼 견고하고 오밀조밀해, 멀리서보면 마치 사라진 잉카제국의 공중도시 '마추픽추'가 연상이 돼 '부산의 마추픽추'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현재는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기존의 마을을 깨끗하게 보존하면서도 마을 곳곳에 공공미술 작품을 조화롭게 설치해 문화예술마을로 탈바꿈했다. 국내외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감천문화마을'이 바로 그것이다. 프랑스 '르몽드', 미국 'CNN' 등 세계 유수의 언론이 극찬하며 소개한 장소이기도 하다.
'하늘마루'를 오른다. 하늘마루는 감천문화마을을 안내하고 관련 자료들을 전시하는 전시 안내관이자 전망대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주민이 거주하던 집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면서 재생하는 방식으로 설계됐다. 전망대에 서니 우선 감천마을 전체가 조망이 되는데, 마을 곳곳이 제 깊은 속살을 환히 다 드러내 보이고 있다. 마치 레고를 쌓아놓은 듯 촘촘하게 집들이 들어차 있고, 색색으로 알록달록하다. 그리스 지중해 마을 '산토리니'처럼 오밀조밀하게 편안한 마을이 골목골목 햇빛을 받으며 평화롭기만 하다.
마을로 들어서자마자 만나는 좁은 골목과 골목, 미로가 따로 없다. 마을 곳곳마다 어느 방향으로 가도 골목과 골목이 만나고, 까꼬막의 계단과 계단이 만난다. 골목은 가로로 '집과 집'을 이어주고, 계단은 세로로 '골목과 골목'을 이어준다.
그들이 만나 소통의 길을 만들고, 아름다운 문화의 마당을 만든다. 그래서 마을 곳곳으로 이방인들이 모이고 이 계단과 골목을 서성거리게 한다. 카메라로 연신 정겨운 소통의 골목을 담기에 바쁜 것이다.
이렇게 마을주민과 이방인이 함께 담소하는 곳, 옹기종기 둘러 앉아 서로 커피 한 잔 건네는 곳. 이곳이 바로 부산의 속살을 제대로 만나는 곳이다. '힐링 부산'은 이렇게 따뜻한 햇볕 아래서, 바야흐로 깊고 넓어지는 셈이다.
- 작성자
- 부산이야기 2014년 6월호
- 작성일자
- 2014-06-11
- 자료출처
- 부산이라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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