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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교육 10년의 회고

<부산시정 10년의 회고 : 교육>


부산 교육 10년의 회고


동천초등학교 교장 공 재 동


1. 문민정부의 출범


  1993년은 우리나라 역사상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는 해이다. 제6공화국인 노태우 정권 말기에는 정치권과 지도층이 각종 특혜 시비와 부정부패에 연루되어 총체적 위기라는 말이 공공연연하게 유포되는 분위기 속에서 사회 소외계층의 갈등과 교육계의 변화와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 가는 상황이었다. 1961년 5월 쿠테타로 집권한 군부에 의한 2년간의 군정을 거쳐 1963년 12월에 탄생한 제3공화국 이후 제6공화국까지 정부는 끊임없는 정통성에 대한 논란에 휩싸였으며, 급기야는 국민의 신뢰를 잃고 정권 유지를 위한 공권력의 남용과 민주화 운동의 억압이 대대적을 자행되었다. 이로 인한 정치적 불신과 무관심은 극에 달하고 이것이 총체적 위기론으로까지 비화되었던 것이다. 1993년 2월 25일 문민정부의 출범으로 정치적 정통성을 회복한 정부는 본격적인 개혁을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문민정부 초기에는 변화와 개혁을 통한 신한국 창조를 강조하면서, 구시대 인물과 군부 출신들을 과감히 배제하고 재야와 학계의 새로운 인물을 대거 발탁하면서 과거와 의 결별을 선언하게 되었다. 그리고 국정 전반에 걸친 개혁과 변화 분위기를 주도하면서 최대 과제로 부정부태의 척결, 경제 회복, 국가 기강 확립 등 3대 과제를 선정하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전 분야에 걸쳐 본격적인 개혁을 추진함으로써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특히 김영삼 대통령은 깨끗한 정부, 튼튼한 경제, 건강한 사회, 통일된 조국을 국정지표로 내세우며 스스로 교육 대통령임을 표방하고 교육부조리 척결과 입시 지옥으로부터의 해방, 교육 예산 GNP 5%로 확보 등 교육개혁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다. 문민정부는 교육개혁을 위하여 1993년 8월 대통령령 제13955호로 교육개혁위원회 규정을 공포함으로써 본격적인 교육개혁에 착수하기도 했다.

 

2. 전교조 해직교사의 복직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제일 먼저 해결해야 할 교육 과제가 전교조 해직교사에 대한 것이었다. 그 해 4월, 당시 오병문 교육부장관과 정해숙 전교조위원장이 처음으로 대면하여 서로의 입장을 정리한 후 7월 24일 교육부가 일방적으로 전교조 해직교사 문제의 해결안을 발표했다. 전교조를 탈퇴한 교사에 한하여 1994년 3월 새 학기부터 선별 복직시킨다는 내용이었다. 교육부는 8월 20일부터 9월 30일까지 복직신청을 받겠다고 했다.

  전교조는 1989년 5월 28일 전국의 초․중․고교 교사들이 연세대에 모여 ‘식민지․반민주적 교육에서 민주적 교육으로 전환하며, 지난 20년간 군사 문화적 교육에서 벗어나는 것, 현재의 반민중적 교육에서 벗어나 참교육을 실천하자.’고 외치며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전남체육고의 윤영규 교사를 위원장으로 선출함으로써 공식 출범한 단체이다. 당시 문교부는 전교조 가입교사 1,516명을 직위 해제한 바 있다.

  이에 전교조는 무조건 복직을 요구했다. 그러나 교육부는 거듭 탈퇴 조건을 굽히지 않는 가운데 전교조는 1993년 9월 24일 중앙집행위원회를 열고, 1단계로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해직교사 30여 명에 대해 탈퇴각서를 쓰고, 2단계로 정부와의 협상을 거쳐 11월 초 1,300여 명의 복직을 추진하며, 마지막으로 조직 유지를 위해 200여 명은 잔류하면서 전교조 합법화 투쟁을 통해 전원 교단에 복직한다는 이른바 3단계 복직 방안을 결정했다. 교육부는 탈퇴 마감 시한인 9월 30일을 한 달 가량 연기하였으며, 결국 10월의 2차 마감 때는 1,490명 중 95.6%인 1,424명이 복직을 신청했다.

그리고 1년 후인 1994년 3월 전교조 해직교사 1,135명이 교단에 복귀했다. 우리 부산에서도 해직교사 71명 중 66명이 복직을 신청하고 다음 해 3월 교단으로 돌아왔다.


3. 교육개혁위원회와 5․31 교육개혁


  정부는 1993년 8월 정부는 대통령령 제13955호로 공포한 교육개혁위원회 규정을 근거로 1994년 2월 5일자로 이석희 위원장을 비롯한 각계 대표 25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교육개혁위원회를 정식 발족시켰다. 1994년 9월 5일 교육개혁위원회는 그 동안의 협의를 바탕으로 ‘신한국 창조를 위한 교육개혁의 방향과 과제’를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질 높은 교육 실현, 교육 수요자 중심의 교육 구현, 교육의 다원성 추구, 교육 운영의 자율성과 책임성 제고, 지원체제 강화를 교육개혁의 방향으로 제시하였다. 1995년 5월 31일 교육개혁위원회는 9개 분야 72개 영역의 제1차 교육개혁 과제를 발표하였다.

  1996년 2월 9일 제1차 교육개혁 과제의 후속 조치로 4개 분야 58개 영역의 제2차 교육개혁 과제가 발표되었으며, 1996년 3월 26일 교육개혁 과제 세부추진 일정이 확정되고, 1996년 4월 9일 위원 46명으로 구성된 제2기 교육개혁위원회가 출범하였다. 그리고 그 해 교육부 직제를 교육개혁 추진 체제로 전면 개편하였으며, 8월 20일에는 지방교육 자치제도 개선 등 5개 분야 24개 영역의 제3차 교육개혁 과제가 발표되었다. 마지막으로 1997년 6월 2일 4개 분야 24개 영역의 제4차 교육개혁 과제가 발표됨으로써 총 23개 분야 120개 영역에 걸친 교육개혁 과제가 확정되었다. 이 중에서 45개 과제는 교육부에서, 나머지 75개 과제가 시․도 교육청에서 추진해야 할 과제였다.

  우리 교육청은 1995년 6월 17일 부교육감을 위원장으로 하는 제1기 교육개혁 추진위원회를 출범시키고 교육개혁을 위한 실무추진반을 구성하는 등 교육청 단위의 교육개혁을 실천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기에 이르렀다. 참고로 제1기 교육개혁 추진위원회 명단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위원장  김순종(부교육감)

  위  원  백은희(초등교육국장)    조석연(중등교육국장)    고현숙(관리국장)

          피승대(행정관리담당관)  이상권(초등장학과장)    박재열(중등장학과장)

          조주호(과학기술과장)    김성룡(행정과장)  전병우(동부교육청학무국장)

          김태순(서부교육청학무국장)   선병은(남부교육청학무국장)

          지천수(동래교육청학무국장)

  간  사  윤길남(기획감사담당관)


4. 시․도 교육청 평가


  시․도 교육청 평가는 1991년 지방교육자치제가 실시되면서 교육부의 권한이 대폭 지방으로 이양됨에 따라 시․도교육청의 책무성을 제고하고 교육자치제 하에서 교육개혁의 실효성을 확보하기 위해 1996년 처음 실시되었다. 특히 교육개혁으로 확보한 GNP 5%의 교육예산의 성공적이고도 효율적인 집행 여부는 시․도 교육청이 정책 의지와 비중을 어디에 두느냐에 달려 있다는 점을 주목하여 시․도 교육청 평가가 이를 조정하고 견제하는 효과적인 정책의 지렛대 역할을 해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뿐만 아니라 교육청 평가는 지방 교육의 지휘 부서인 시․도 교육청 간의 경쟁을 촉발하여 현장 교육의 질 제고를 위한 자구 노력 분위기를 조성하고 이를 통한 다양한 교육개혁 과제의 성공적인 실천에 의의를 두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교육청은 처음 실시한 1996년에는 우수 교육청으로 선정되었고, 다음 해인 1997년에는 최우수 교육청으로 선정된 이후, 이어서 1998년과 1999년 연속 3년을 전국 최우수 교육청으로 선정되는 위업을 달성하였다. 우리 교육청은 교육부로부터 받은 지원금으로 전국 최대 규모의 학생교육문화회관을 건립하였으며, 전국에서는 처음으로 교육정보원을 지어 21세기 교육을 선도하는 중요한 위치에 서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5. 초등학교 영어 교육 도입


  1995년 2월 23일 교육부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 교육과정에 영어 과목을 주당 2시간씩 신설하고 1997년부터 이를 시행한다고 발표했다. 정부의 이러한 조치는 그 동안 외국어 조기 교육의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일부에서 제기한 반대론과 교원 수급과 교재 개발에 소요되는 재원 확보 문제 등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매번 그 실시가 유보되었음을 감안하면 획기적인 조치가 아닐 수 없었다. 이 안에 따르면 우선 3학년부터 실시하고 점차 전학년으로 확대한다는 것이었다.

  전세계 컴퓨터 정보의 80%, 라디오 방송의 60%, 전화 통화의 85%를 차지하며, 전세계 인구의 30%가 영어를 사용하고 있는 국제적인 추세를 감안한다면 영어 교육 조기 도입은 필연적이라 할 수 있다. 초등학교부터 회화 위주의 영어 교육을 도입하는 등 영어의 생활화를 통해 적어도 고교 졸업자는 영어로 충분히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수준까지 끌어올리겠다는 것이 정부의 의지였다.

  교육부는 초등학교 영어교육을 담당할 영어 전담교사가 7천에서 9천명 정도가 필요할 것으로 보고, 교사 충원 방안으로 교육대학이나 사범대학에서 영어 전담교사를 확보하되 그 동안 현직교사 중 영어 의사소통 능력이 있는 사람을 명예교사로 위촉하고, 자원봉사자와 원어민 교사 또는 해외 교포를 일정기간 연수를 시켜 영어 전담교사로 활용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교육대학 영어 심화반에서 일정한 영어학점을 이수한 학생에게 초등학교 영어교사 자격증을 주고 사범대학에서도 필요한 영어 관련 학점을 취득할 경우 이 같은 자격을 주기도 했다.

  이러한 교육부의 방침에 대하여 영어과외 조장, 전인교육 부실화, 회화 능력을 갖춘 교사 및 교재 미확보 등을 이유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초등학교 교사들은 중등 자격을 가진 교사가 초등학교에 진출을 반대하고 나섰으며 많은 초등학교 교사들이 자체적으로 연수를 실시하여 초등학생의 영어지도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여 영어 전담 교사 확보안을 두고 의견 차를 노출하기도 했다.

 

6. 제1대 민선교육감 취임


  교육감 선거제도가 교육위원에 의한 간선으로 바뀌면서 처음으로 실시한 선거에서 정순택 교육감이 제1기 민선 교육감으로 당선되어 1995년 3월 2일 제10대 부산광역시교육감에 취임하였다.

  지방교육자치제도는 1952년 처음 도입되었지만, 현대적 의미의 지방교육자치제도의 골격이 짜여진 것은 1991년에 마련되었다. 1964년부터 1990년까지의 시․도 및 시․군 단위의 교육자치제도는 의결기관의 기능을 시․도에서는 문교부장관이, 시․군에서는 시․도 교육위원회가 대행하도록 하면서 시․도에는 합의제 집행기관으로 교육위원회를, 시․군에는 독임제 집행기관으로 교육장을 두는 방식이었다. 교육위원회 의장은 시․도지사가 맡도록 함으로써 시․도지사에게 교육에 관심을 갖도록 했으나 회의에 불참하는 일이 많았고, 자신이 당연직 의장인 교육위원회의 의결 사항에 대하여 거부권을 행사하는 일까지 있어 실효를 거두지 못했던 것이다.

  1991년 지방자치 부활을 계기로 지방교육자치제도를 새롭게 설계하면서 집행기관간 연계를 차단한 것은 교육의 자주성,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교육계의 주장이 반영된 결과이지만 한편으로는 합의제 집행기관 시절에 시․도지사가 교육에 대하여 무관심했고 무성의했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1991년 지방교육자치제에 의해 첫 민선 교육감이 등장한 이래 우리 교육청은 1995년에 부산광역시교육위원회 간선을 통해 첫 민선 교육감이 선출되게 된 것이었다. 정순택 교육감은 4년 후인 1999년 제11대 교육감 선거에 재출마하여 단독 출마하는데, 교육감 선거제도가 학교운영위원회 대표와 교사 위원 일부에 의한 간선으로 바뀐 후 첫 교육감이 되기도 했다. 정순택 교육감은 이 선거에 단독 출마하여 90%를 훨씬 넘기는 득표로 재선에 성공했지만, 이듬해 청와대 교육수석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김으로써 임기를 채우지 않은 첫 교육감이 되기었다.

  정순택 교육감은 이외에도 몇 가지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전국 최연소 교장이라는 기록과 함께 전국 최연소 교육감이기도 했다.             

  

7. 국민학교 명칭 변경


  1996년 3월 1일을 기해 일제히 국민학교 명칭이 ‘초등학교’로 바뀌었다. 이러한 명칭 변경은 해방된지 50여년 만에, 일제의 잔재를 청산한다는 의미도 함께 가지고 있어 역사적인 일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1895년 근대적인 학교제도의 도입됨에 따라 최초의 초등교육기관인 소학교가 개교하였다. 이 소학교는 심상과 3년, 고등과 2~3년으로 구성되었으며, 학령은 8세에서 15세까지로 8년이었다. 이 소학교는 다시 1906년 보통학교령에 의해 초등교육을 담당하는 보통학교로 개편되었다가 1938년 다시 소학교로 명칭이 바뀌었다.

  1941년 일제는 제4차 교육령 개정을 공포하면서 종래의 소학교를 국민학교라 개칭하고 수업 연한을 6년으로 통일하였다. 일제가 국민학교령을 공포하게 된 목적은 대륙침략을 위한 인력기반을 마련하고 철저히 일본 국민화하기 위한 황국신민화 교육, 전시체제화 교육의 시책에 따라 국민학교라는 명칭으로 개칭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광복과 함께 이러한 일제의 잔재를 불식하고 새로운 교육 목적과 내용으로 재출범하게 되었다. 1945년 9월 17일 재 개교한 국민학교에서는 종전의 일어, 일본 역사, 수신 등의 과목을 폐지하고, 국어 국사 공민과로 바꾸는 한편, 그 동안 정규 교육과정에서 제외되었던 한글 습득에 주력하였다.

  그 뒤 1948년에 제정된 헌법과 1949년에 제정된 교육법에 의거하여 의무교육 6개년 계획을 수립, 1950년 6월부터 국민학교에 대한 의무교육을 본격적으로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6․25 전쟁으로 보류될 수밖에 없었다.

  1952년 교육법시행령이 반포되어 이전의 7개 과목에서 실과를 더하여 8개 과목으로 정하고, 1953년에는 교육자치제도가 실시되어 의무교육의 추진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이어서 1954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처음으로 교육과정 시간 배당 기준령이 공포되어 우리나라 학교교육의 기틀이 잡히면서 국민학교 교육도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근대교육이 시작된 지 55년만에 소학교에서 국민학교를 거쳐 초등학교로 명칭이 변경된 것이다.

  


8. 교육개혁 박람회


  1996년 7월 20일 교육개혁의 실천사례와 미래 교육상을 보여주는 교육개혁 박람회가 김영삼 대통령 등 각계 인사 261명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삼성동 한국종합전시장에서 14일 간의 일정으로 개막되었다. 박람회는 시교육청, 대학, 교육산업체 등 모두 56개 기관이 참가해 1995년 5월 31일 발표된 교육개혁 방안에 따른 일선 교육현장의 각종 교육개혁 사례가 소개되었다.

  개막식에는 김영삼 대통령을 비롯한 김종서 교육개혁위원장, 안병영 교육부장관, 김현옥 국회교육위원장, 이준해 서울시교육감, 김민하 대학교육협의회장 등 각계 인사 260명이 참석했다. 교육부가 주관한 이 박람회는 교육개혁 방안의 성공기법을 확산, 공유하고 범국민적 관심과 참여의식을 높이기 위해 마련되었다.

  15개 시도교육청이 모두 참여한 초중등교육관은 교육개혁 우수사례, 교단 선진화를 비롯한 특색 있는 사업, 멀티미디어 교실 등을 소개하였는데, 특히 우리 교육청이 마련한 ‘해양탐구 코너’는 특수 안경을 쓰고 해양생물과 자원을 탐사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14일간 진행된 이 박람회는 우리 교육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늠하게 해주는 유익한 행사였다.


9. 국민의 정부 출범과 전교조 합법화


  1998년 2월 25일 제15대 대통령이 취임함으로써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게 되었다. 1997년 12월 18일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단일 후보로 추천한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된 것이다. 3일 새 정부가 발표한 초대 내각의 교육부 수장으로 이해찬 장관이 임명되었다. 국민의 정부는 문민정부가 시행해오던 교육개혁을 이어 받아 마무리한다는 원칙을 발표하고 교육개혁 작업을 계속하게 되었다.   

  1998년 11월 노사정위원회는 교원노조를 특별법 형식으로 법제화하기로 합의하고, 1999년 7월부터 교원들도 자유로이 복수노조를 결성하고 자유로이 단체교섭 및 협약을 체결할 수 있도록 되어있는 전문교원단체도 복수화한다는 방침을 정하고 ‘교원단체설립및교섭에관한법률’을 개정하였다. 이에 따라 교원노조는 평교사 중심으로 구성돼 단체교섭 및 협약체결하게 되었다.

  노사정위원회는 사립학교의 경우 전교조측이 주장해온 학교 차원의 교섭을 인정하지 않는 대신 전국 교섭은 사학재단연합회와, 시․도 단위의 교섭은 시․도 사학재단연합회와 갖는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교섭창구 단일화 문제는 정부가 조합원 과반수를 차지하는 단일조직과 교섭하겠다는 당초의 방침에서 후퇴, 전교조 주장대로 노사 자율에 맡기기로 했다. 또 교원노조에 단체협의 체결권을 주되 예산 및 법령에 의해 결성되는 사항은 협약체결 대상에서 제외키로하는 등 이견을 모두 해소했다. 이런 협의를 바탕으로 마침내 1998년 12월 29일 국회 노동위는 전체회의를 열어 전교조를 허용하는 내용의 ‘교원노조설립및운영에관한법안’을 표결로 통과시켰다. 이로써 1989년 5월 연세대에서 참교육 실현을 목표로 경찰의 봉쇄를 피해가며 기습적으로 결성된 전교조는 10년만에 합법화의 길을 찾은 셈이었다.

  환경노동위는 이날 모두 18명의 소속의원 중 국민회의 6명, 한나라당 6명, 무소속 1명 등 16명이 참석한 가운데 법안을 표결에 부쳐 찬성 10, 반대 1, 기권 5로 가결시켜 법사위로 넘겼다.

  곡절을 겪은 끝에 결국 1999년 1월 6일 국회는 본회의를 열어 한나라당의 실력저지를 무릅쓰고 교원노조법과 교원정년단축 관련법 등 모두 66개 안건을 여당 단독으로 강행 처리했다. 국민회의와 자민련 소속 여당의원들은 이날 오후 3시경 본회의장으로 통하는 모든 출입문을 봉쇄한 한나라당 측의 저지를 뚫고 회의장에 들어가 김봉호 부의장의 사회로 안건을 통과시켰다.


10. 교원 정년 62세로 단축


  1998년 12월 30일 국회 교육위원회는 65세로 되어있는 교원의 정년을 1999년 8월부터 62세로 단축한다는 내용의 ‘교육공무원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이 통과됨으로써 1998년 8월에 62세가 되는 12,647명(자연 퇴직자 1,500명 포함)이 일시에 교단을 떠나게 되었다.

  이들은 퇴직금과 연금일시금 이외에 정년단축으로 인한 위로금 성격의 명퇴수당을 받게 되었는데, 명퇴수당은 연령에 따라 한 살에 평균 1천만원씩 차이가 나, 62세에 3,063만원, 63세 2,070만원, 64세 1,035만원이었다. 교육부는 이미 이에 필요한 재원 8천여억원을 확보해 놓고 있었다. 교육부는 당초 3단계에 걸쳐 교원의 정년을 65세에서 60세로 낮출 계획이었으나 국회에서 경과조치 없이 62세로 상향조정한 것이다.

  정년단축으로 나이 든 교사들이 교단을 떠나면 교단에 새로운 기운이 일 것으로 학부모들은 기대하였으나, 법 개정 과정에서 발생한 교사의 집단 반발로 향후 교단은 심각한 갈등을 초래하게 되었다.

  교육개혁을 주도해 온 이해찬 교육부장관이 교사 집단으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기도 했으나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상 초유로 교사의 정년을 단축한 점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교원의 갑작스러운 정년 단축은 경험 많은 교사가 교직을 떠나고 초등학교의 교사난을 불러와 중초교사 임용 기간제 교사 임용 등 교사 임용에 있어 파행을 불러와 심각한 교단의 갈등을 더욱 부채질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11. 부산광역시교육감 보궐선거


  2000년 10월 4일 정순택 제11대 부산광역시교육감이 임기 중 청와대 교육․문화수석 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김에 따라 공석 중인 교육감 보궐선거가 실시되었다. 시교육청 조석연 정책국장, 정무진 중등교육과장, 강학석 서부교육장, 교육위원회 설동근, 정홍섭, 김정남 위원 등 6명의 후보가 경합을 벌인 이 선거는 1차 투표에서 과반수를 획득한 후보가 없어, 2차 결선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현역 교육위원인 설동근 위원이 56%의 지지를 받아 제12대 부산광역시교육감으로 당선되었다.

  설동근 교육감은 1948년 생으로 1969년 부산교육대학을 졸업하고 6년간 부산시내 초등학교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으며, 1975년 대한선박 토성호 통신사로 승선하여 통신장을 거친 후 1983년 삼영선박을 설립하여 회사를 이끌어 왔다. 1998년 제3대 부산광역시교육위원으로 당선되어 의정활동을 하는 동안 부산지역 학생들의 학력이 5개 도시 중 최저라는 사실을 언론에 공개하여 그 동안 학생들의 학력이 전국 상위인 줄로만 알고 있었던 부산시민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기도 했으며, 학교 현장의 문제점을 찾아 해결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교육위원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그는 교육행정의 권위주의를 불식하고 일선학교의 자율권을 대폭 신장하며, 특히 학생들의 학력을 전국 최저 수준에서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고 공약함으로써 학부모들의 지지를 얻어 당선되었다.

  설동근 교육감의 당선은 몇 가지 측면에서 전국적인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학력이 초대 졸업이었다는 것과 교직 경력이 6년뿐이며, 더구나 초등학교 교사 출신이라는 점이었다. 전국을 통틀어 초등교사 양성기관인 교육대학 출신이 교육감으로 당선된 것이 처음이라는 것 이었다. 처음에는 이러한 짧은 교직 경력과 교대 졸업이라는 학력이 문제가 되어 우려 섞인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발로 뛰는 행정, 교단 중심의 행정으로 훌륭한 교육감으로 평가 받아 2년 6개월의 잔여 임기를 채운 후 2003년 1월 20일 제13대 부산광역시교육감 선거에 재출마하여 압도적인 표를 얻어 재선되는 영광을 차지하기도 했다.


12. 교원 업무경감과 교실 기초환경 개선


  제12대 부산광역시교육감으로 취임한 설동근 교육감은 오래된 현안 문제 중의 하나인 교원 업무경감을 제일 먼저 추진하였다. 교사, 장학사, 교원단체 회원으로 구성된 ‘교원업무경감 협의회’를 만들고 먼저 학교의 각종 장부와 문서 유통량을 조사했다. 그 결과 각급 학교에서 시행하고 있는 학교 장부가 초등학교 72종, 중학교 138종, 고등학교 158종으로 나타나 그것이 교원 업무 부담에 크게 작용하고 있음을 알고 비슷한 종류끼리 서로 통폐합하는 등 학교 장부를 50%로 줄였다. 그리고 학교의 결재과정에서 위임전결을 대폭 확대하여 결재로 인한 시간 낭비를 막는 한편, 공문서 유통 감소, 업무 분장 재조정 등으로 교원의 업무를 대폭 경감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20학급 미만의 학교부터 교무보조원을 배치하였으며, 연차적으로 확대하는 방안도 강구하였다.

  한편 학교 현장에는 최첨단 교재들이 들어와 학습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으나, 정작 학생들의 건강과 직결된 교실 기초환경이 매우 낙후된 것을 알고 부산광역시교육청이 이를 시정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사실 학생들이 60%가 시력에 문제가 있고, 더구나 10년 전에 들여온 책걸상은 학생들의 체격에 맞지 않아 학생들이 척추 이상을 호소하는 경우가 허다한 실정이었다.

  교실기초환경 개선을 위해 먼저 학생 책걸상 높이 조절, 교실 조도 개선, 냉난방 설치를 3대 과제로 설정하고 우선 학생용 책걸상에 높이 조절기를 부착하여 체격에 맞도록 조절하였으며, 교실의 조도를 교육부 기준인 300룩스로 높이는 작업을 했다. 그리고 2005년까지 5개년 계획으로 교실에 냉난방을 설치하기로 하고 2,207개 교실에 시설 설치를 끝냈다.

  이런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 산업자원부가 28년만에 학생용 책걸상 KS 규격을 재조정하였으며, 서울시교육청이 자체로 교실의 조도를 조사하여 발표하는 등 그 파장이 전국을 퍼져나갔다.


13. 부산과학고 과학영재학교로 지정


  2001년 10월 과학기술부는 2002년 3월부터 발효되는 영재교육법에 대비해 전국에서 2개교를 과학영재학교로 선정, 연간 1백 30억을 집중 투자해 과학기술분야의 영재를 양성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시․도 교육청으로부터 신청을 받아 심사를 했는데 그 결과 부산과학고등학교가 우수한 점수를 받아 과학영재학교로 선정되었다고 발표했다. 1위의 차이가 워낙 커서 원래 2개 학교를 선정하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부산과학고등학교 1개를 선정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부산과학고등학교가 과학영재학교로 지정됨에 따라 2003학년도부터 학년 당 8개반(급당 인원 18명) 144명 정원의 신입생을 전국 단위로 모집하게 되며, 이들 학생들은 KAIST 자동진학, 해외 연수, 대학 위탁 교육 등 정부 차원의 지원을 받게 됐다. 과학기술부와의 협약에 의해 부산교육청은 학생 선발, 교육과정, 교원 임용, 학생 평가 등에 있어 실질적 영재교육에 적합하도록 관련 제도를 운영하고, 과학기술부는 이러한 영재교육이 실현될 수 있도록 재정 지원을 하면서 학교 운영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되어있다.

  과학기술부는 물적 인프라 구축 지원을 위하여 120억원을 학보하고 영재학교 교원을 위한 R&E 프로그램과 교원의 국내외 연수를 지원하기 위한 예산을 확보한다는 것이었다. 교사진은 2005년까지 70%가 박사학위 소지자로 충원할 계획으로 있다.


14. 2002학년도 대입수능 성적 전국 최상위


  2002학년도 대학수학능력 시험에서 부산의 학생이 자연계열에서 1위 차지를, 인문계열에서 2위를 차지했다고 언론이 보도했다. 서울대학 진학률 역시 5년만에 지방 1위이던 대구시를 제치고 부산이 1위를 차지했다는 보도도 함께 함으로써 부산 학생의 학력이 전국 최하위에서 최상위로 부상한 것이어서 이 소식에 접한 부산시민들을 즐겁게 했다.

  이와 같은 결과는 그 동안 부산광역시교육청이 고등학교 3학년을 대상으로 1년에 2 차례 실시하던 기초학력 진단평가를 1, 2학년에도 확대 실시하였으며, 초등학교와 중학생에게도 부산지역 교사들의 출제위원이 되어 연간 2차례씩 기초․기본학력을 평가하는 등 학생들의 학력 신장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으로 풀이되었다. 


15. 지난 10년 동안의 부산교육 개황


  지식기반사회의 본격적인 도래는 교육의 핵심 기관인 학교의 기능과 역할에 전면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학교는 더 이상 유일한 학습의 장이 아니며, 수백 년 동안 지속되어온 전통적인 학습 방법에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현재에 이르러 학교가 해야 할 일은 평생학습의 기반이 되는 기초․기본 지식을 책임지고 가르치는 한편, 지식을 선택․조직하여 응용하는 능력을 개발하는 일이다. 과거에는 지식의 전달에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지만 이제는 그런 일은 상당 부분 멀티미디어의 기능에 맡겨지게 되었다. 그리고 학교와 교사는 오히려 실천하기 어려웠던 도덕성, 사회성, 예술성 등을 키우는 경험의 장을 제공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때이다. 그러므로 학교의 역할과 기능은 새롭게 규정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부산교육은 과거 어느 때보다 질적인 도약을 이룩한 시기였다고 자부할 수 있다. 젊고 유능한 교육감이 배출되어 교육현장을 크게 바꾸어 놓았는가 하면, 실업계 고등학교의 위기를 예상하고 전국 최초로 특성화고등학교를 설립하여 활로를 모색한 일에서부터 건전한 학생문화의 창달을 위한 전국 최대 규모의 학생교육문화회관의 건립, 정보화 시대를 대비한 전국 최초의 부산교육정보원 설립 등은 3년 연속 교육부의 시․도교육청 평가에서 최우수 교육청으로 선정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동안 어려운 과제로 전국 어느 시․도교육청도 해결하지 못한 교원의 업무경감의 과감한 시도, 교실 기초환경의 획기적인 개선, 철저한 교단중심의 교육행정 등의 성공적인 사례는 부산교육의 국제적 경쟁력을 높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학생들이 학력을 전국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은 뭐니뭐니해도 큰 성과가 아닐 수 없다. 학력이 바탕이 되지 않는 교육은 미래 사회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음이 명백하다.

  부산광역시 교육청은 이러한 발전을 바탕으로 교육이 지역사회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교육의 역할 제고에 기여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