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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정 10년의 회고 : 시정일반>
10년의 문틈을 엿보며 - 작가 신 태 범
글에 들어가면서
이 글의 줄기를 세우고 쓰기 시작한 이틀째의 일이다. 정확히 2003년 7월 18일 이른 오후, 막 배달된 '부산일보' 1면의 큰 제목만 대충 훑어 보고 버릇대로 5면의 사설 난을 펼쳤다. 굵은 활자의 제목이 눈길을 확 잡아당긴다. '끊이지 않는 공무원 인사 잡음'. 나의 직업적 친정(親庭)과 관련한 글이라 그럴 것이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나는 30여 년 동안 부산시의 구석자리 한 곳을 지키다가 퇴직했다. 서둘러 글을 읽어가던 나는 아득한 격세지감(隔世之感)에 빠지고 말았다. 아아, 이렇게 변했구나! 흡사 뒤통수를 맞은 사람처럼 터져 오르는 탄성을 억제하기 힘들었다. 내용의 핵심만 인용하면 이렇다.
-(위 줄임) 최근 OO구청과 OO구청의 경우 부구청장(副區廳長)들이 다면평가제를 무시하고 무리한 승진 인사를 단행했다는 이유로 공무원노조에 의해 출근을 저지당하는 수모를 겪었다고 한다. (중간 줄임) 게다가 OO구청에선 구의원이 특정인의 승진을 요구하는 등 3~4명에 대한 인사 압력을 넣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공무원노조가 반대 성명을 발표하는 상식 밖의 일까지 벌어졌다. OO구청 구의원들이 5급 사무관 인사 내용을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구청장을 항의 방문까지 했다는 대목에선 어안이 벙벙하다. (아래 모두 줄임)-
나는 그 글 속에서 일부 잘못된 지방자치단체 공무원 인사 잡음에 대한 논설위원의 호된 비판이나 지적보다는 지난 10년(1993~2002년) 동안 충격적으로 변화한 공직사회의 한 단면을 읽고 있었다. 하급직원이 부구청장의 출근을 저지한다· 10년 전이라면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던 일인가· 어림없는 소리다! 상명하복(上命下服)의 엄격한 위계질서(位階秩序)를 근간으로 삼아왔던 공직사회에서 그건 마치 풍차를 향해 칼을 휘두르는 돈키호테보다도 더 무모한 만용이요, 도전이었을 것이다. 제아무리 떳떳하고 정당한 명분일지라도 상급자의 출근길을 가로막는 행위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기름통을 지고 불 속에 뛰어드는 자해행위나 다름없는 일일 터이었다. 그때는 그랬다.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불합리한 지시나 명령이라 할지라도 면전에 대놓고 거부하거나 항명하지 못했다. 그것은 불문율이었다. 그때의 관료조직이란 상관이나 상부의 명령에 대한 절대 복종과 충성을 강요당하는 왕조시대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더욱이 오랜 군부독재 아래서 공무원 조직은 더욱 완강하고 견고한 집단으로 뭉쳐져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일사불란한 계통조직의 생리가 꼭 부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공직사회의 결속력을 다지고 강력한 추진력을 발휘함으로써, 과업 수행과 업무의 효율을 높였다. 공직자들이 지난 80년대 한국 고도성장의 주요 견인차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러한 조직력의 힘이었다. 그리고 조직의 내부 결속은 눈에 보이지 않는 끈끈한 인간관계의 형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여러 가지 명분의 회식 자리나 단체 연수회, 혹은 빈번했던 퇴근 후의 술자리 등은 직장동료들 사이에 남다른 우애와 신의를 다지게 만들었다. 물론 이러한 일은 선의의 동지애로 발전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서로 봐주기나 담합이라는 병폐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한 결코 무너지는 일이 없을 것 같았던 공직사회 조직에 균열과 붕괴의 조짐이 일기 시작한 것은 대체 어느 시점이었을까. 나는 아마도 그것은 바로 지난 10년, 더 엄밀하게 말하면 문민정부가 들어선 90년대가 아니었나 싶다. 그렇다. 지난 10년은 거센 변화와 개혁의 소용돌이가 하루도 쉼 없이 몰아친 가파른 시간이었다. 그런 가운데 부산지역은 정치적으로는 감격의 문민시대 창출지로서의 자부와 긍지, 상실과 무력감이 극단적으로 교차한 시기였다. 경제적으로는 주력산업인 신발과 섬유 등이 사양의 비탈길로 미끄러지면서 새로운 산업구조 조정의 진통과 몸부림을 치러야 했다. 사회적으로는 그때까지 억눌려왔던 각종 집단적 개인적 욕구가 어지럽게 분출하고 폭발하는 혼란과 공황 사태가 이어지며 이른바 이념적 공백의 시련을 치르기 시작했다. 시정 역시 그러한 숨 가쁘고 험난한 시대적 이랑을 헤치며, 새로운 지방시대 개방화시대 국제화시대를 열어가기 위한 혹독한 산통을 치르며 오늘에 이르렀다. 이 글은 나라 안팎에서 휘몰아친 거센 변화와 개혁의 바람 속에서 힘겹게 달려온 지난 10년의 부산시정의 발자취를 연대순에 얽매이지 않고, 문틈으로 엿보듯 큰 줄기를 따라 적어보는 일종의 인상기가 될 것이다. 굳이 어떤 문제를 제기하거나 해답을 얻어내기보다는 큰 굴곡을 이룬 사실들을 되짚어 나가노라면, 시정이라는 거함(巨艦)을 운항해 온 주역들인 공직자들의 변모 과정도 자연스럽게 함께 드러나리라 믿는다. 그러다 보면 앞에서 잠시 언급했던 <무리한 인사에 항명하며 부구청장의 출근을 저지>할 수 있을 정도로 공직사회에 충격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만든 시대적 동인들은 저절로 밝혀질 터이다. 또한 거기에 더하여, 앞으로의 새로운 10년을 열어갈 공직자의 자세나 모습은 어떻게 변모해 갈 것인가 하는 의문에 대한 어렴풋한 대답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참으로 다행한 일이겠다.
1. 역사의 여울목을 넘으며
시정의 새로운 10년은 1993년을 기점으로 시발한다. 30년 동안 사실상의 군부독재와 그 연장 선 위에 있었던 노태우 정권에서 명실공히 문민시대를 열었던 감격의 해였다. 이해 2월, 제14대 김영삼 대통령의 취임과 더불어 드디어 문민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부정부패 공직자 척결’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 공무원의 기를 죽였지만 ‘문민정부’ 역시 ‘부정부패 척결’을 국정목표의 제일로 꼽았다. 관가(官街)에는 대대적 사정의 한파가 몰아쳤다. 한편 ‘신한국 건설’을 위한 ‘치욕의 과거사 청산’을 위해 전직 두 대통령을 비롯한 ‘5.18 연루자’들을 법정에 세우는 사태도 벌어졌다. 그것은 쓰라린 민족사적 상처를 치유하는 의미 외에도, 한 시대의 굴곡을 뛰어넘어 새 시대를 여는 상징성으로서 국민 모두에게 정신적 정서적 거대한 변화를 일으키게 만든 시발점이 되었다. 국가발전의 실질적 주역이면서도 온갖 푸대접에 숨죽여 지냈던 근로자들의 자각과 결속이 거센 물살을 이루었다.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라는 진정한 의미의 근대적 시민의식이 성숙하면서 다양한 목소리의 민간단체가 생겨났다. 여기에 편승하여 노골적으로 집단이익을 내세운 각종 불법 폭력 시위가 각계각층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부작용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한 혼란 속에서 점차로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는 더불어 사는 사회의 건설이라는 새로운 이슈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건강보험과 연금제도 등 사회보장 제도의 본격적인 도입 실시와 더불어, 각종 사회 안전망의 구축과 확보가 국가의 우선적 과제로 떠올랐다. 파이를 키우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함께 나누어 가지는 일에도 드디어 무게를 두고, 복지사회의 구현이라는 구호가 아닌 현실로서 실현을 보는 단계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 모두가 참된 민주화를 이룩하기 위해 한번쯤은 치러야 할 험난하고 고통스런 과정이기도 했다. 문민정부의 창출지로서 남다른 자부심과 긍지를 지닌 부산은 그 어느 지역보다 변화와 개혁에 대한 욕구와 기대가 컸다고 하겠다. 더욱이 지방자치제의 부활과 더불어 참된 지역발전과 지역성의 회복은 지역사회의 가장 큰 화두였다. ‘2002 아시안게임’ 유치 운동은 부산시민에게 지역발전을 위한 자발적 참여의 불길을 일으킨 도화선이 되었다. 1993년 5월 부산시의회 제21회 임시회의에서 ‘2002 아시안게임유치 추진단 구성결의안’을 채택하면서 유치 운동은 본격적인 열기를 더하기 시작했다. 아시안게임 유치 운동은, 지역발전은 지역주민 스스로가 이룩해 나가야 한다는 주인의식을 확고하게 일깨운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시민 자치의식의 확립과 개발의지의 결속이야말로, ‘2002 부산아시안게임’이 지역사회에 가져다 준 그 어떤 물량적 성과보다도 값진 결실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안팎의 국가적 지역적 변화의 물살은 공직사회에도 거부할 수 없는 파장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경직된 관료조직에도 개개인의 자율과 창의력을 높이 사려는 민주화의 물결이 서서히 스며들기 시작했다. 바깥으로는 ‘국민 제일주의’를 표방한 대민행정(對民行政)의 봉사 수준을 높이는 일이 강조되며, 행정이 서비스라는 개념이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했다. 상명하복(上命下服)의 경직된 조직이 아니라 하의상달(下意上達)의 자유로운 창의가 존중되는 열린 조직으로서의 변화가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문민정부 출발에 맞추어 1993년 3월 취임한 정문화 시장은 공직사회의 ‘변화와 개혁’의 기초를 다지는 일에 많은 정력을 기울였다. 시장공관의 개방과 이른바 군사작전지역으로 출입을 통제 받아온 몰운대, 태종대, 신선대 등 해안 경관지역의 있달아 개방조치 등은 변화를 체감케 하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시민과 조직사회에 자율과 개방을 앞당기는 촉매가 되었다. 정부가 전격적으로 단행한 금융실명제와 공직자 재산공개 등은 열린 행정을 향한 발걸음을 가속화시켰다. ‘작은 정부’의 정책에 따라 1국 1과 10계를 폐지하고 단행한 조직개편도 모든 공직자들에게 변화하는 행정환경에의 적응을 요구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그러나 가장 큰 행정환경의 변화는 <행정 전산화>였다. 1994년 10월에 마지막 관선시장으로 취임한 김기재 시장은 ‘시정 전산화 중장기계획’을 확정하였다. 2001년까지 1인 1대 컴퓨터를 목표로 하는 본격적인 행정업무 전산화의 길이 열린 것이다. 1967년 5월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에서 컴퓨터를 도입하여 통계업무에 적용한 것이 우리나라 행정정보화의 효시이다. 부산시는 1978년 전자계산기를 도입함으로써 실질적인 시정정보화의 걸음을 뗀 셈이다. 이후 1985년부터 토지기록, 차량등록, 인사관리 등의 온라인 업무를 단계적으로 실시하면서 전산화 시스템을 구축하고, 90년대 초부터 개인용 컴퓨터를 보급하기 시작하면서 행정업무의 전반적 전산화가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먼저 기안지 위에 볼펜으로 세심하게 공들여 기록하고 작성해야 했던 모든 공문서들이 워드프로세서의 자판기 위에서 손쉽고 빠르게 처리되었다. 볼펜에 앞서 잉크와 펜으로 국한자(國漢字)를 혼용해 또박또박 써야 했던데 비하면 참으로 엄청난 편리함이요 신속함이었다. 거기서 더 나아가 전자결재와 모든 정보의 공유에 따른 부처간의 협조시간 단축 등은 기존의 사고와 행동에도 막대한 변화를 일으키는 요소가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무 자동화에 따른 근무환경의 변화는 이전의 기성세대 공직자들과 이후의 컴퓨터세대의 공직자들과의 사이에 현격한 현실인식과 가치관의 차이를 만들어 놓았다. 이 세대간의 간극은 후일 공직자들의 직장협의회(공무원 노조) 발족으로 한층 더 강화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가장 큰 과제의 하나로 떠오른 세대간의 갈등 해소와 맞물려, 앞으로 공직사회가 풀어나가야 할 최대의 숙제가 아닌가 생각된다. 1995년 1월 1일부로 부산직할시가 광역시로 이름이 바뀌었다. 3월에는 제6차 행정구역 확장으로 기존의 동래구를 나누어 연제구를, 남구를 나누어 수영구를, 북구를 나누어 사상구를 신설하고, 양산 동부 5개 읍․면을 기장군으로 편제해 부산시로 맞아드리게 되었다. 그리고 7월 1일은 34년 만에 부활한 민선 자치단체장 선거에 의해 당선된 문정수 시장이 민선시정 1기를 연 역사적인 날이다. 민선시정의 출범으로 공직사회의 개혁과 변화는 가속화되면서 독자적인 지역개발 청사진이 하나 둘 가시화되어 나갔다. 1996년 <전자 시장실>이 개통되었다. 이는 상징성이 매우 강한 <열린 행정>의 단초가 되었다. 아시안게임조직위원회가 공식 출범하고 ‘아시아드주경기장’이 착공되었다. ‘가덕도 신항만 개발 계획’이 확정되었다. 논란이 거듭되던 삼성자동차 유치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인상을 시민들에게 심어준 사건은 역시 <부산국제영화제>의 창설이었다. 이는 역대 어떤 시장도 미처 착안하지 못했던 <문화산업>에 대한 시민적 자각을 불러일으킨 이벤트였다. 1996년 9월 13~21일까지 열린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는 남포동 극장가를 중심으로 31개국 171편의 영화가 상영되면서 국내외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는 예상 밖의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영화제는 단순한 축제를 넘어서서 그와 연계한 다양한 영상산업들이 지역발전을 담보할 당당한 미래산업의 하나로서 충분한 가능성이 있음을 일깨워 주었다. 열악한 문화적 인프라와 희박한 시민들의 문화적 마인드 속에서 거둔 부산국제영화제의 성공은 대단한 충격이요 변화의 징후였다. 할리우드에서 제작한 영화 ‘쥬라기 공원’ 한 편이 벌어들인 수익이 현대자동차가 1년 동안 수출해 벌어드린 수익보다 많다는 사실은 이제 부산시민들의 상식이 되어버렸다. 어쨌거나 이후 부산시에는 영상산업 전담 부서가 생기고 부산영상위원회 등 영상산업 관련 기구와 기관들이 연이어 들어서게 되었다. 그리고 부산이 새로운 국제적인 영화의 도시로 부상하고 있음은 참으로 희망적인 일이다. 정부의 해양수산부 신설과 때맞추어 ‘21세기 세계 첨단 해양도시 건설’의 계획이 발표되면서, 명실공히 지역발전의 그랜드 디자인이 그려졌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시민들에게 지역발전의 주체로서 근대 시민정신을 확고하게 다지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뒤이은 ‘아시안 위크’ 등의 국제행사들은 시민들에게 개방화 국제화 마인드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2. 흐르는 물은 역류하지 않는다
1997년 연말 벼락 치듯 날아든 IMF 체제 소식은 모든 국민에게 엄청난 경악이요 충격이었다. 이어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의 당선과 정권교체는 그때까지 여당의 텃밭으로 자부해온 부산지역으로서는 마치 예상 밖의 철퇴를 맞은 것이나 다름없는 이중의 타격이었다. 이듬해 2월에 출범한 ‘국민의 정부’는 여러 가지 개혁적인 정책들을 있달아 발표하면서 IMF 위기 극복을 위한 긴급 조치들을 단행하였다. 부실 경제의 온상으로 지목되던 금융권 구조조정의 칼날은 부산지역에서 더욱 가혹하였다. 4개 종금사 폐지에 이어 유일한 시중은행인 ‘동남은행’의 퇴출은 지역경제에 엄청난 파장을 몰아왔다. 더하여 산업구조조정 과정에서 많은 부산시민이 미래의 지역발전의 희망으로 기대고 있었던 ‘삼성승용차’가 1차 조정대상으로 떠올랐다. 부산시민의 상실감과 패배감은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깊고 심각하였다. 모두가 치명상을 입은 사람들처럼 허탈해 했다. 그러한 암울한 가운데 실시된 전국동시 지방선거에서 민선2기를 열 새로운 시장으로 안상영 후보가 당선되었다. 안상영 시장은 1990년 관선 부산시장에서 물러난 지 8년 만에 민선시장 선거에 도전해, 개표 진행 과정에서 역전 재역전 끝에 기적적인 당선의 영예를 차지하여 전국적인 화제를 일으킨 바 있었다. 1998년 7월 1일에 취임한 안상영 시장은 <서비스 시정 세일즈 시정>을 캐치프레이즈로 삼아 위기에 빠진 지역경제의 회생에 행정력을 집중하면서 시정의 전반적인 쇄신과 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8월 새로운 조직 개편안에 착수하여 15실․국․본부․단 및 62과․담당관을 11실․국․본부․단 및 50과․담당관으로 감축했다. 이른바 수요자 위주의 행정 서비스를 제고하고, 시정의 경영 수익성을 높이기 위한 부서를 보강하는 개편이었다. 계장 제도를 폐지하고 팀웍 중심의 담당제 제도를 도입해 내부 행정의 창의력과 생산성을 높이고자 하였다. 9월 조직개편에 따른 부산시정 사상 최대 규모인 442명의 인사가 단행되었다. 이 대대적인 조직개편은 연초에 중앙동 구 청사에서 연제구 초고층 전자동 시스템의 인텔리전트 건물인 새 청사로 이전한 공직자들에게 근무환경의 획기적 변화와 더불어 새로운 긴장과 자세를 요구했다. 1996년 정보통신담당관실로 조직을 개편하고 전자문서 시스템을 도입한 부산시는 1998년 3월부터 부산광역정보센터 서비스를 실시하기 시작했으며, 2001년 목표였던 1인 1대 컴퓨터의 보급이 거의 이루어지고 있었다. 여기서 화제를 잠시 돌리면, 연산동의 새 청사는 이전 후 시장실에 딸린 이색적인 내부 조경시설 등이 이러저러한 화제를 일으키며 많은 시민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한동안 새 청사는 시내 유아원 어린이들의 단체 방문 관람지가 되었으며, 시민 관람객들도 줄을 이어 찾기도 했다. 타 시․도에서도 시찰단이 방문하기도 했다. 이는 아마도 알게 모르게 부산시에 근무하는 모든 공직자들에게 남다른 자부심과 긍지를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으며, 안으로 책임감과 사명감을 다지는데도 큰 영향력을 끼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물론 이후 경쟁적인 지방 관청의 대형화가 정치적 사회적 이슈가 되기도 했지만, 꼭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평가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형식은 때로 내용을 결정하는 중대한 요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당히 넓은 공간의 청사 1층 휴게실은 시민들에게 열린 공간으로서 다양한 용도로 제공되었다. 1999년 10월 전국 최초로 자치단체가 주관한 ‘채용박람회’도 이 휴게실에서 열려, 시내 77개 업체가 참여해 687명의 자리를 내놓았고 4,800여 명이 신청하여 구직의 어려움을 단적으로 드러내기도 하였다. 이후 같은 장소에는 실업자 상담소가 상설 운영되면서, 부산시 주관의 ‘채용박람회’는 여러 차례 더 열리며, IMF의 고통에서 탈출해 나가는 한 통로가 되기도 하였다. 한 동안은 지역 생산업체의 제품들을 선보이고 홍보하는 상설 전시장을 설치하여 시민들에게 지역산업 육성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침체의 늪에 빠진 지역경제 살리기를 위한 안상영 시장의 노력은 각별했다. 중소기업종합지원센터를 착공하고, 전국 최초로 2,400억 원의 공모채를 발행 판매하였으며, 해외 마케팅 전문가를 채용하여 ‘외자유치팀’을 설치했다. 해외시장 개척과 자본 유치에도 적극 나섰다. 해외 자매도시 등에 ‘부산상품센터’를 세우고 과감한 지역 상품 홍보와 판매 전략에 나섰다. 1999년 4월에는 국내 최초의 종합 파생상품시장인 ‘한국선물거래소’를 개장하였다. 그러나 이와는 별개로 1999년 1월 정부 노사정위원회에서는 ‘공무원직장협의회’를 설치하기로 결정함으로써, 공직자 사회에 일대 혁명적 변화를 예고하게 되었다. 그 동안 공무원 사회에서 알게 모르게 공론화 되어 오던 ‘공무원 노동조합 결성’이라는 민감한 사안을, 정부기관에서 공식적으로 거론하고 약간은 변형된 타협안이긴 하지만 단체 결성을 용인한 것 자체가 굉장한 변화였다. 그러나 물꼬는 한번 트이기가 어렵지,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도도한 물살은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것이 정한 이치이다. 같은 해 4월 전국 기초자치단체 최초로 ‘연제구 공무원 직장협의회’가 결성되어 창립 총회를 가지게 되었다. 이어 5월 부산시 직장협의회가 출범하였다. 이렇게 전국적으로 파급되어 결성된 공무원 직장협의회는 급기야 전국 연대조직을 결성함으로써 미래의 공직 사회의 변화와 개혁의 폭풍을 몰아칠 태풍의 눈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특히 8월 4일 연제구에서 실시키로 발표한 각급 승진심사대상자에 대해 상사, 동료, 부하직원 등으로 배심원을 구성해 심의하기로 한 ‘다면평가제’는 공직 사회에서 본격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범상치 않는 변화의 징후의 일단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의미 깊은 사건이었다. 그리고 10월에 대청공원 안에 새롭게 자리잡고 문을 연 ‘부산민주공원’의 개관은 전국 유일의 시민항쟁 기념관으로써, 조직의 안팎에서 불고 있는 거센 민주화 자율화 개방화의 풍향을 가름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새 천년의 개막과 함께, 새로운 공직사회를 열어 가는 변화의 바람을 가속화시켰다.
3. 새로운 지평을 향하여
부산시는 2000년 새해 아침을 ‘새 천년 맞이 부산축제’를 시작으로 열었다. 그러나 이는 비단 새로운 한 세기를 여는 뉴 밀레니엄 축제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급격하게 변화하는 국내외의 역사적․시대적 조류에 능동적으로 대처 대응하며, 지방화․국제화․개방화 시대에 살아남을 지역발전의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고 전략을 수립해 나가야할 중대한 시발점이 되어야 했다. 당면한 지역경제의 침체를 타개하는 일이 가장 급한 과제였다. 안상영 시장의 의욕적인 경제난국 타개를 위한 다각적인 시책의 실행으로, 미국 경제전문지 ‘포천’에서 부산시가 아시아 태평양지역에서 기업하기 좋은 10대 도시에 선정되는 등의 성과를 거두며 해외 투자자의 유치가 더욱 본격화되었다. 이 사이 4월에 실시된 제16대 총선거에서 부산지역 17명의 국회의원 당선자 전원이 야당의원이 차지해 지역적 색채를 강화하게 된 것은 양날의 칼처럼 부정적 긍정적인 면을 모두 내포하고 있는 정치적 사건이었다. 이 무렵 프랑스의 ‘르노’에서 삼성 자동차를 인수하게 된 것은 IMF 이후 허탈감에 빠졌던 부산시민들에게는 오랜만의 위안이 되었다. 그리고 11월에는 해운대구 우동 옛 수영비행장 부지 일대에 21세기 첨단 ‘디지털 부산’의 심장부가 될 ‘센텀 시티’ 건설 공사의 첫 삽을 내렸다. 이어 연말에는 가덕도의 부산신항만 제1단계 민자사업의 기공식이 있었다. 옛 부산시청 부지에 세계 최고층 ‘부산 제2롯데월드’ 건설 기공식이 뒤를 이으며, 시민들에게 지역발전에 새로운 기대와 희망을 안게 만들었다. 그리고 동년 6월에 시민단체들이 동조를 선언한 가운데 추진하기 시작한 ‘지방분권화 운동’은 지방시대를 맞아 독자적인 지역의 목소리를 찾고, 보다 능동적으로 참된 지방시대를 앞당기려는 지방자치단체 최초의 의미심장한 운동이었다. 이는 대구․광주․울산광역시와 경상남북도․전라남북도 등 이웃 지자체단체의 호응으로 연대세력을 이루며 지방분권화의 법제화에 불길을 당기는 도화선이 되었다. 7월 11일 부산시장이 제안한 ‘지방분권화’ 추진을 위한 영호남 8개 시․도 공동협의체인 ‘국토개발 균형발전 추진위원회’를 공식 출범하게 된 것이다. 한편 국가적으로는 6월 13일 김대중 대통령의 분단 55년만의 북한 방문과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었다. 10월 13일에는 노르웨이 노벨위원회에서 2000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김대중 대통령을 선정했다. 새 천년이 시작된 2001년의 시정은 ‘해양수도 부산시대를 향한 제2 개항의 해’를 선포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해 2월, 민원 접수․처리․완료까지의 과정을 공개하는 ‘인터넷 공개 시스템’을 시범 운영하는 외에, 부산시의 모든 행정정보 및 지역정보를 인터넷으로 제공하는 시스템 개발에 박차를 더하며 인터넷 시대의 열린 시정 실현에 큰 걸음을 떼어놓았다. 또한, 7월부터는 부산시 본청 및 직속 사업소까지 전자결제 시스템을 시행함으로써 전자행정의 보편화를 이룩하게 되었다. 전자결재의 실현으로 공무원들은 결재판을 들고 결재자를 직접 찾아가 설명하고 결재를 받는 공간적 시간적 낭비를 최소화하고, 행정업무의 신속함과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이버 공간을 통한 결재 시스템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인간적 교류를 차단하여 상사나 동료 사이를 지나치게 사무적이고 비인간적인 관계로 만드는 역작용도 없지 않았다. 이는 위에서 말한 직장협의회의 발족과 더불어 자신의 목소리를 키우기 시작한 하급 직원들(그들은 대개 디지털 환경에서 자라온 신세대 공직자들이기도 하다)에게는 입지를 강화해 주는 결과가 되기도 했다. 한편 부산국제영화제가 아시아권 최고의 영화제로 자리매김하면서, 영상산업도시로서의 발전 가능성을 한결 드높이게 되었다. 부산 출신의 감독이 주요 장면을 부산서 촬영한 영화 ‘친구’가 한국영화 흥행사상 전무한 기록을 세움으로써, 부산은 영화촬영지로서 국내외에 큰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고, 실제 많은 영화들의 촬영신청이 봇물을 이루었다. 5월엔 축구경기장 3배 크기의 부산전시․컨벤션센터(BEXCO)가 부산의 새로운 명물로 문을 열었으며 국제도시로서 대형 국제회의 및 대규모 국제행사의 유치 등에 활력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벡스코에서는 개관 기념으로 ‘국제모터쇼’를 유치한 것을 필두로, 2002년 한일월드컵 축구대회 본선 조추첨 행사를 유치하는 등 부산을 국제사회에 널리 알리는 홍보의 본산 구실을 톡톡히 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국내 최초로 ‘인장 케이블막 구조’로 만들어진 부산의 대표적 건축물인 ‘부산아시아드 주경기장’이 7년 만에 완공되고, 강서 금정 기장 등의 보조경기장 등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2002년 아시안게임의 성공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더하였다. 시정 10년을 마감하는 2002년은 한일월드컵 예선전, 2002 부산아시안게임, 아태장애인경기대회, 세계합창올림픽 등 대규모 국제행사가 연이어지는 문자 그대로 국제적 이벤트의 한 해였다. 부산시는 2002년을 ‘부산 방문의 해’로 정하고, 이어지는 대형 국제행사로 부산을 방문할 해외 손님맞이를 위한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협조를 이끌어내고자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부산발전을 10년 이상 앞당길 것으로 기대되는 이들 국제행사의 성공 여부는 부산의 현재를 저울질하고 웅대한 미래를 가늠할 절체절명의 찬스였다. 5월 31일 드디어 서울서 화려한 막을 올린 2002 한일월드컵 개막식은 전국에 환호와 열광과 감격의 물결을 한달 내내 일으키게 하는 서막에 불과했다. 부산에서 열린 한국과 폴란드 대전에서 한국이 월드컵 진출 48년 만에 첫 승리를 올리는 것을 시작으로, 기적같은 4강의 신화를 이룩하며 한민족의 저력을 유감없이 전세계에 과시했던 2002 한일월드컵은, 우리 역사상 다시 찾아오기 힘든 전 국민적 축제가 되어버렸다. 수많은 이변과 화제를 연출해낸 2002 한일월드컵은 IMF로 한동안 숨죽이며 움츠러들었던 모든 국민들의 허전한 가슴을 가득하게 채워준 기쁨과 축복의 잔치가 되었다. 6월 13일 실시된 제3회 전국동시 지방선거에서 안상영 시장이 재선에 성공하였다. 미진한 지역경제 회생과 전쟁과 다름없는 국제경쟁 시대를 헤쳐갈 도시경쟁력 강화가 여전히 시정의 최대 화두였다. 그러나 당면한 대형 국제행사의 성공은 장래의 부산발전을 좌우할 시금석으로써 어느 하나도 소홀하게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안상영 시장은 지난 1998년 처음 민선시장에 취임하면서 단행한 직제 개편과 계장 제도 폐지에 이어, 시정의 틀을 과장 중심 국장 책임제로 전환하고 과장 전결권을 50% 이상 확대했다. 이는 점차 자율성을 확대하고 창의력을 높이 사는 공직사회의 변화에 발맞추어, 보다 많은 권한과 책임을 하부 조직으로 옮겨줌으로써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조처였다. 9월 29일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에서 드디어 10년을 준비하고 기다려온 2002 부산아시안게임의 막이 올랐다. 북한을 포함한 44개 전 OCA 회원국 선수단이 참가하여 16일간 열전을 벌인 부산아시안게임은 ‘역대 최고의 성공 대회’로 모든 외신들의 극찬을 받으며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지역발전을 위한 부산시민의 저력을 유감없이 과시한 아시아인의 축제였다. 이어 10월 19일부터 9일간 세계 39개국 175개팀 1만여 명이 참가한 ‘부산합창 올림픽’ 역시 큰 성공을 거두었다. 10월 26일부터 열린 아태장애인경기대회도 43개국 1,675명의 선수단이 참가한 가운데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였다. 2002년은 모든 부산시 공직자들이 연이어지는 초대형 국제행사로 거의 날밤을 새워야한 한 해였다. 부산시민 역시 그에 못지 않게 거듭되는 국제행사의 성공을 위해 각자 맡은 바 직무에 최선을 다하며 협조하고 참여했다. 한 마디로 지역발전의 기반을 만들기 위해 시정과 시민이 한 덩어리가 되어 달리고 또 달렸던 한 해였다. 그러한 시정과 시민의 빈틈없는 융화와 단결은 지역발전을 위한 새로운 이정표를 만들었으며, 부산시민의 샘솟는 열정과 저력을 다시 한번 스스로 확인하고 자신하는 값진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다시 시작될 시정 10년의 앞날을 약속하는 가장 믿음직한 동력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본격적인 지방시대 국제화시대 개방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공직자들에게도 새로운 각오와 자세를 가다듬는 분기점이 되었다고 믿는다. 다만, 아날로그 세대인 40~50대 이상의 공직자들과 디지털 세대인 20~30대 공직자들과의 정서적 감각적 차이와 가치관 윤리관의 괴리의 극복이 오는 10년의 최대 과제가 아닐까 생각된다. 가끔 40~50대의 중견 공직자들을 만나다 보면 요즈음의 공직사회가 영 옛날 같지 않다는 푸념을 늘어놓는다. 직장 상사나 부하 직원 사이에 옛날처럼 존경심이나 애정이 없을 뿐만 아니라, 끈끈한 동료의식이나 신뢰감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전에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사무실 동료직원들끼리 어울려 만들었던 퇴근 후의 술자리는 이제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매우 드물어졌다고 한다. 모두들 퇴근 벨이 울리기 무섭게 책상을 치우고 뿔뿔이 자기 갈 길을 찾아 흩어진다는 것이다. 그만큼 개인의 사생활에 충실하고 가정적으로 변모한 건 이해하고 좋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너무 냉혹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이기적이고 개인화되어 인정과 인간미가 지나치게 메말라 삭막하고 건조해 졌다는 것이다. 이 글에 들어서면서 인용한 ‘부청장 출근 저지’의 해프닝은 오늘의 공직사회에 도사린 그러한 세대간의 이념과 정서의 격차에서 오는 갈등의 한 작은 징후에 다름 아니다. 신․구세대 공직자 모두가 이를 보다 심도있게 분석하고 숙고하면서 갈등해소의 묘책과 방법을 함께 모색해 나가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어차피 ‘공무원 노조’의 실현은 시간문제로 보이고, 합법적 공무원 노조의 결성은 여러 가지 예상치 못한 또 다른 파장을 몰고 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예상되는 변화를 정확하게 예측하고 이에 대비하는 지혜야말로 지난 발자취를 되돌아보는 참된 역사의 교훈일 것이다. | |